수필

돌아가리라

김현거사 2014. 8. 19. 09:22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나 강촌으로 돌아가리라.

거기 하얀 미사보를 쓴 성당의 자매님같은 구름 속 달이, 인적 끊긴 동네 마실 길 환히 비춰주는 곳으로 나 돌아가리라. 돌담 위에 박꽃 하얗게 피고, 개똥벌레 나르는 그 곳, 희미한 등잔불 아래, 짚으로 새끼 꼬는 사람들 사는 곳으로, 돌아가리라. 질화로에 군밤이 톡톡 튀는 곳, 타들어가는 쑥불 연기 그윽한 냄새 풍기는 그 곳으로, 나 어이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리. 

 

  돌아가리라. 지난 날을 탓하여 무엇하겠는가. 이제 숲을 찾았으니, 조롱을 벗어난 새처럼 바쁜 날개짓 하며 강촌으로 돌아가리라. 

 거기 아이들이 고동을 잡고, 해오라기 날으는 푸른 강이 있다. 뒷산에 꿩이 꿩꿩 울고, 뽕나무 위에서 닭 울음 소리 들리는 강촌이 있다. 내 어이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가리라. 장에서 탁배기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돌아오던 노인이, 고등어 자반 잠시 내려놓고, 장죽에 담배불 붙이고, 잠시 쉬어가던, 아름다운 섶다리가 거기 있다. 

 

 돌아가리라. 시냇가에 흙집 짓고, 무궁화 생울타리 치고, 토란과 매화와 소나무 사랑하며 살리라.

 토란은 잎에 굴러가는 아침 이슬이 좋고, 매화는 옥비녀 꽂은 여인처럼 청고(淸高)하여 좋고, 노송은 흰구름으로 옷소매 적시는 은자(隱者)같은 기품이 있어 좋다.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했고, 소동파는 대나무를 사랑했고, 주렴계는 연꽃을 사랑했다. 북송(北宋) 때 시인 임화정(林和靖)은 서호(西湖)에 은거하여,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살았다. 

 내 어이 그들처럼 산에 가득한 꽃 거울 같은 강에 아롱아롱 비치는 강촌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가리라. 거기 복숭아꽃 가랑비에 훔뻑 젖는 강촌이 있다. 거기 종달새 노래 정답고, 버드나무 아래 흘러가는 냇물 소리, 연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고요히 들리는 강촌이 있다.

 두어 이랑 밭에 고추와 상추를 심으리라. 고구마와 감자도 심으리라. 대추가 익고, 석류가 익고, 가지가 휘도록 달린 감나무의 감이 익어간다. 누렁텅이 호박이 지붕 위에서 늙어가고, 알암은 저절로 익어 산에 떨어진다. 내 어이 그 풍요로운 땅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옛부터 죽순은 채소의 보배요, 복숭은 과일의 보배요, 게는 수서동물의 보배요, 술은 음식의 보배라 하였다.

 안개 속에 조각배를 저어 낚시하는 어옹에게 부탁하리라. 갓 잡은 월척 붕어를 부탁하리라. 죽순은 붕어찜에 최고요, 복숭아는 화채에 최고요, 민물게는 국화철에 최고요, 술은 시(詩)를 아는 사람에게 최고다.

 두견주, 매화주, 솔순주, 머루주, 연엽주 독에 담아놓고, 진달래향, 매화향, 솔 향기, 머루향, 연꽃향을 즐기리라. 비록 신선은 기약할 수 없을지라도, 불노(不老)는 가히 기약할 수 있으리라.

 차는 혼자 마시는 걸 이속(離俗)이라 하고, 둘이 마실 때를 한적(閑寂)이라 한다. 달콤한 샘물로 차를 끓이고, 기괴하게 생긴 바위 옆에 자리를 펴리라. 혼자서 이속(離俗)을 맛보고, 바둑 두는 노인 불러, 둘이서 한적(閑寂)을 마시리라.

 

  산에 샘이 있고, 바위에 이끼가 있고, 꽃에 나비가 있고, 사람에게 흥취가 있다. 흥취를 움직이는 것에는 세가지가 있으니, 천공에 높이 뜬 달과, 숲 속의 뻐꾸기와, 여인의 허리처럼 부드럽게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이 그것이다. 천지 중에 청교(淸交)를 맺을 상대는 오직 이 셋 밖에 없다. 

 흥취를 깨는 데는 둘이 있으니, 부귀한 사람과 굽신거리는 사람이다. 부귀하면 대개 오만하기 쉽고, 아첨하는 사람은 뜻이 비루하고 천박하기 쉽다.  

 

  비 오는 날은 젖은 꽃묘종 옮기고, 달 밝은 밤은 노대에 올라가 달을 보리라. 

  흥이 나면 곱고 매끄러운 오동나무 수피에 작은 칼로 시를 새겨보리라. 죽상(竹床)에 개자원화보 펼쳐놓고, 석도(石濤)나 팔대산인(八大山人)의 산수화 그려보고, 법첩(法帖)을 펼쳐놓고 일필휘지 천하 명필 감상 하리라. 고졸(古拙)을 숭상하고, 번화(繁華)를 멀리 하리라.  

 세상에 한가한 일보다 좋은 일 없다. 한가하면 책을 읽게 되고, 산을 오르게 되고, 그림을 그리게 되고, 꽃을 완상하게 된다. 이것이 세상 사람 모두 부귀영화를 바라지만, 홀로 한가함을 구하는 뜻이다.

 

 돌아가리라. 달에 영허(盈虛)가 있고, 꽃에 성쇠가 있고, 사람에게 때가 있다. 

 바람이 고요하면 나도 고요하고, 바람이 멎으면 나도 멎으리라. 부귀는 바랄 바 아니고, 명예도 아니로다.

 왕희지는 집에 있을 때, 가느다란 꽃잎이 잔뜩 난 꽃을 들어다보며 꽃잎 수를 세는데 전심하여, 뒤에 제자가 수건을 들고 서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옛사람 풍류는 이와 같았다.

 대평상에 빗겨앉아서, 봄에는 매화를 기다리고, 여름에는 새소리 기다리고, 가을에는 만산홍엽(滿山紅葉) 기다리고, 겨울에는 설후관산(雪後觀山) 기대하리라.

 

 구름은 무심히 산골짝에서 흘러오고, 산빛 물빛은 아침 저녂으로 더욱 곱다. 꽃은 무심히 피고, 새는 석양에 둥지로 돌아온다. 돌아가리라. 새가 둥지로 돌아가듯, 돌아가리라. 텅 빈 공산(空山)을 굳이 채울 것이 무엇인가. 고요를 낙으로 삼고, 분수를 알고, 검소를 지키리라. 소박한 마음으로 나물국 맛있게 먹고, 자연에 몸을 맡겨, 천명을 누리다 가면 그만이지, 더 이상 무엇을 애태우고,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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