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대나무의 운치

김현거사 2014. 4. 4. 11:58

 

      

      대나무의 운치

 

 

  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살던 집에는 큰 대밭이 있었다. 대밭은 채마밭과 과수원, 세 칸 본채와 재를 쌓아둔 창고와 오줌을 모아 비료로 쓰던 변소가 달린 아랫채를 감싸고 있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여름에 북창을 통해서 대밭에서 방으로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이다. 그다음 생각나는 것은 대밭에서 짹짹거리며 울던 신선한 새소리와 간혹 대밭에 까치가 커다란 날개를 퍼득이고 날아오고, 꿩이 꿩꿩  울던 기억이다. 

 그러나 나는 전에는 한번도 대밭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그저 대밭은 그 밑에 평상을 깔고 참외나 수박을 깍아먹던 시원한 곳, 비 온 뒤 죽순이 솟아나던 곳으로만 알았다. 대란 것은, 그냥 그걸로, 내가 포구총, 방패연, 피리, 필통, 낚싯대, 회초리 같을 걸 만들며 놀았고, 어른들은 울타리, 평상, 돗자리, 빗자루, 키, 죽부인, 삿갓, 우산, 바구니, 숟가락, 복조리같은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든 나무로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백팔십도 방향 전환하여 다르게 본 것은, 세월이 훨씬 지난 때다. 일본 교또에서의 어느 봄날이다. 차창 밖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낮으막한 구릉의 과수원에는 복숭아꽃 매화꽃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나는 비 젖은 꽃들에 눈을 고정시키고 구경하다가, 갑자기 새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대나무를 본 것이다.

  대나무는 안개 속에서 가늘게 내리는 비에 젖으며 미풍에 살랑살랑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실비는 댓잎에 옥구슬로 맺혔다가, 바람에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후두둑후두둑 주변에 은구슬을 뿌리고 있었다. 전신이 이쪽저쪽으로 휘어지는 대나무가 능수버들보다 부드럽고, 난초잎처럼 고운 곡선을 그린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것은 한 편의 시였다. 대나무가 이렇게 깔끔하고, 청량하고, 우아하고, 풍류 가득한 나무였던가. 나는 충격적인 그 장면을 가슴에 담았다. 처음 대나무에 대해서 개안을 한 것이다. 

  유흥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 적 있다. 일단 대나무의 멋을 알자, 나는 맨 먼저, 집에 돌아가면, 괴석 한 점과 대나무를 나란히 백자화분에 심어보자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산 가득 대밭으로 덮힌 내고향 진주 정촌의 한 야산을 생각했다. 거긴 제갈량이 유비를 만나 세상에 나오기 전에 살았던 와룡강(臥龍岡)과 비슷한 풍경이 있다.

 제갈양은 출사하기 전에 죽림에 살았다. 작은 개울이 있고, 개울에는 나무로 엮은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가면 삽짝문이 있고, 그 안에 작은 초옥이 있다. 초옥 속 선비는 낮잠에 빠져있고, 실내엔 거문고가 보이고, 차 끓이는 풍로는 하얀 연기가 오르고 있다.

 나는 정촌에 돌아가 제갈량처럼 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이다. 

 그후 묵죽도(墨竹圖)에도 관심이 갖기 시작했다. 전에는 사군자를 봐도, 대나무 그림은 솔직히 좀 시큰둥 하였다. 국화와 매화는 각각 얼마나 향기가 고고하고, 난초는 그 잎새의 곡선이 얼마나 우아하던가. 그에 비해 대나무는 모습이 푸르다는 것 이외엔 별 특징이 없어, 묵죽도에 관심이 갈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저 선인들이 대나무의 사철 푸른 그 모습이 굳세고 곧은 충신의 절개를 느끼게 한다고 추켜올렸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교또에서 대나무가 사무치게 아름답다는 것을 인식한 이후는, 사정이 변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김부식 조희룡 김홍도 신위 이정 민영익 김규진같은 묵죽도 대가가 있다. 나는 이분들이 그린 묵죽도를 다시 보게 되었다. 바람에 가지가 휘어진 풍죽도(風竹圖), 댓잎에 눈이 소복히 쌓인 설죽도(雪竹圖), 비에 젖은 대나무를 그린 우죽도(雨竹圖), 괴석 옆에 놓인 대나무를 그린 죽석도(竹石圖)를 제대로 그 운치를 알고 감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그림들은 고결함과 청량감 가득한 그림이다. 보물이자, 우리 선조들이 남긴 정신적 문화 유산이다.

 대숲을 은거지로 삼고 유유자적했던 죽림칠현(竹林七賢)과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다섯번째 아들인 왕휘지(王徽之)와 소동파에 얽힌 고사도 깊은 공감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왕휘지(王徽之)는 '이 사람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耶)'라는 문장을 남겨. 대나무를 이 사람(此君)이라고 아예 사람으로  불렀다. 소동파는 녹균헌(綠筠軒)이라는 시에서 '식사에 고기가 없을 수 있다해도, 거처에 대나무가 없어서는 않되네. 고기가 없으면 사람이 수척해지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 하였다. 이런 표현은 먼저 대나무의 아름다움을 모르고서는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대나무 같이 고결한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문장인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최근 우리나라에 대나무 열풍이 불어온 것이다. 전남 담양 죽녹원로에서는 대나무 축제가 열리고, 울산 태화강은 대숲길이 새로 만들어지고, 진주 남가람공원에는 대나무 향 가득한 휠링길이 생긴 것이다. 이젠 젊은 사람들이 청죽 울창한 대숲길을 걸으며, 그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대나무 울타리의 감흥을 표현하기 시작한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 

 사실 내가 성장한 진주 근처는 대밭이 많다. 촉석루 건너 남강은 십리 대숲이 있고, 정촌의 야산도 산이 온통 대밭이다. 남강 상류인 경호강도 동네마다 대밭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소싯적부터 대나무의 여러 모습을 보아왔다. 달빛 비치는 대밭, 눈 내린 대밭, 칡꽃 핀 대밭, 그 아래 강에 낚싯배가 뜨있는 대밭, 그 옆에  홍시가 탐스럽게 달린 감나무가 선 대밭을 숱하게 보았다. 그러나 교또 여행 이전에는, 대나무가 가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것인 줄 예전에 미쳐 몰랐던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대나무 무성한 진주에서 성장한 소년이라는 그 자체에 자부심을 느낀다. 태어나기를 대밭 속의 신안동 언덕 위 한옥에서 태어났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제 칠순 노인이 되었다. 고향에 가면, 대나무 뿌리로 만든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남강변을 고고히 홀로 거닐어 보리라  생각한다. 댓잎에 서걱거리던 바람소리, 새벽마다 어린 나의 잠을 깨우던 새들의  울음소리를 회상하며, 묵죽도를 그린 선비처럼, 대숲의 고결하고 청량한 운치를 느껴보리라 생각한다.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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