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무가 진정한 시인이다

김현거사 2013. 10. 28. 07:47

     <나무가 진정한 시인이다>

 

   나무가 진정한 시인이다. 시인이 이 소릴 들으면 좀 섭섭하겠지만, 나는 나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봄비 내리자말자, 나무는 시를 쓴다. 개나리와 진달래, 매화와 목련을 보라. 반갑다고 버선발로 뛰어나온다는 말이 있다. 잎도 나기 전에 꽃부터 피운다. 가장 먼저 꽃 피우는 나무가 개나리다. 개나리는 가지에 작고 신비한 황금의 종을 주렁주렁 단다. 황금 종소리가 개나리 옆에 가득하다. 진달래는 어떤 시를 쓰는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정한(情恨) 깊은 피학적(被虐的) 시다. 그래서 산에 진달래 가득 피면 두견새는 밤 새워 통곡을 한다. 매화는 달빛 속에 향기 풍기는 여인 이다. 빙결같은 얼굴에 보일듯 말듯 향수 청초하다. 목련은 어떤 시를 쓰는가. 목련의 피부는 청순한 어린 소녀 같다. 천상에서 하얀 나비들이 군무를 하듯 목련은 핀다. 이런 청순한 시를 보면서, 누가 나무를 진정한 시인이 아니라고 감히 생각할 수 있을까. 나무는 시인일뿐 아니라,  천재다. 천재가 아니고선 어느 누가 벌과 나비들이 찾아와 춤 추도록 할 수 있겠는가.

 

 봄이 만남과 환희가 주제라면, 가을은 이별과 애상이 주제다. 밖으로 나가 나무의 가을시를 보면 그런 생각 떨칠 수 없다. 나무는 쓸쓸한 호숫가를 거닌다. 비 젖는 가로등 옆을 지킨다. 맑은 계류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이끼 덮힌 바위 위에 낙하하기도 한다. 노란 은행잎은 초로의 여인 같다. 은은한 미소가 품위 있다. 백양나무는 귀족 같다. 하얀 줄기가 그렇고, 연초록 잎이 그렇다. 단풍은 카페의 여인 같다. 붉은 루즈를 입술에 거침없이 바른다. 나무마다 쓰는 시가 다르고, 개성이 다르다. 서리 내린 가을산이 노랗고 붉은, 황홀한 단풍 궁전으로 바뀌면, 나는 그냥 한 마리 귀뚜라미가 되고 싶다. 이슬 젖은 풀섶에서 밤새도록 울고 싶다. 달빛 속에 가을 편지를 떨어뜨리는 오동잎을 보면, 나는 당장 답장을 쓰고 싶다. 금방 수첩을 꺼내든다.

 

 춘추시대에 백아(伯牙)라는 거문고의 명수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을 타면, 친구 종자기(鍾子期)는 '참으로 근사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는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기가 막힌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구나' 하고 감탄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은 다음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은 뜻을 알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소리를 들어주고 시를 읽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그런가. 나무가 천의무봉의 천재요, 원조격 시인임을 알아주는가. 나는 어느 날 나무가 더이상 지음(知音)이 없다고 오해하여, 절필하는 날이 오지않을까, 그것을 심히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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