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흘러가는 건 구름만은 아니다>

김현거사 2013. 8. 3. 08:37

 

  

  

        <흘러가는 건 구름만은 아니다> 

 

  흘러가는 건 구름만은 아니다. 사람도 흘러간다. 돛 달고 바다 위를 범선처럼 달리고, 청산에 뭉게뭉게 칠층탑 쌓는 것이 구름이다. 인생 무대를 끝없이 달리고, 청운의 푸른 꿈 마음 속에 구층탑 쌓는 것이 사람이다. 낮은 붉은 노을에 물들고, 밤은 달빛에 물드는 것이 구름이다. 청춘엔 진홍빛 연정에 물들고, 노년엔 달빛처럼 쓸쓸한 회한에 물드는 것이 사람 이다. 나는 어디서 출발한 구름일까. 앞으로 갈 곳은 어디일까, 흘러가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맨처음 흘러간 곳은 진주 본성동 이다. 성곽이 있고, 남강이 있었다. 집엔 구기자 넝쿨 늘어진 담이 있었다. 네살 쯤으로 기억된다. 나는 밑이 터진 바지가 입기 챙피하다고 고집부리다가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된통 얻어맞았다. 그 당시를 기억할만한 소꿉 친구는 화자다. 우리는 담에 붙은 작은 구기자 빨간 열매 따먹으려고 뜀뛰기도 하고, 골목 속에서 이리저리 뛰놀았다. 화자는 나보다 한살 위지만, 기집애였다. 나는 명색이 사내애였다. 간혹 화자에게 손찌검을 해, 화자네 할머니가 나를 혼내려고 우리 집 우물까지 회초리 들고오시곤 했다. 신촌으로 흘러가 이대를 졸업한 화자는 지금 덕소로 흘러가서 산다.

 

 두번째 내가 흘러간 곳은 문산이다. 앞산에는 백로가 훨훨 날아다녔고, 서쪽에 남강이 있었다. 일본인이 살던 적산가옥이라, 집안에 바위가 있어 나는 바위에 올라가 말타기 하며 놀았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 올라가면, 이층엔 다다미방과 후쓰마가 있었다. 천정에는 스기목으로 정교하게 매화나무를 조각한 창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은 이층 후쓰마에서 귀신 나온다고들 했다. 거기 일본 사람이 쓰던 뚜께 40센티 되는 비자나무 바둑판이 있었다. 조개패로 둥글게 다듬은 바둑알이 있었다. 집 앞은 바로 교문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교문에 나갔다. 거기 기율부원이 있었다. 완장 차고, 학생들 군기 잡고, 출근하는 선생님에게 경례 부치는 것이 그들 일 이다. 나는 그들이 멋있어 보여서 옆에 가서 얼쩡거렸다. 교장실에서 자주 놀았으므로 선생님들 이름은 잘 알았다. 그들이 나타나면 나는 오는대로 그분들 이름을 불렀다. 학생들은 그때마다 재미있어 키득키득 웃었지만, 철없는 꼬맹이 탓할 순 없는 일이다. ' 김박사 왔어?' 선생님들은 나를 아는체 해주고 통과했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미리 박사 칭호 받은 셈이다. 

 

 구름이 세번째 흘러간 곳은, 이번에는 다시 진주 망경동 육거리 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진양군 교육감에 당선되시어 이사온 것이다. 육거리엔 이발소가 있고, 구멍가게와 한약방이 있다. 우리집은 마당에 감나무가 셋 있어 나는 감은 원없이 따먹고 컸다. 집엔 온동네 아줌마들이 몰려와 물을 퍼가던 우물이 있었다. 붕어를 키우던 연못이 있었다. 나의 여름은 대문 밖 평상위에서 부채 부치다가 별빛 아래 잠든 새 지나갔다. 간혹 누가 평상에 앉아 키타를 치거나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다. 은경이 엄마는 중학생에게 최초로 문학을 이야기해준 여인이다. 그는 우리 집에 세든 진주농대 교수 부인이다. 서울 출신이라, 듣기 좋은 표준어를 썼고, 미인이었다. 내가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이호우의 <달밤>을 외는 것은 그 분 덕이다. 칠암동 대밭의 달빛, 망경산 절벽의 참나리꽃, 천전학교 주변 탱자꽃을 지금 기억하는 것은, 그때 내가 좋아한 그 얼굴 하얗고 키 큰 소녀 덕 이다.

 

 그후 구름은 천리길 흘러 서울로 왔다. 이문동 수유리 창동 등 서울 외곽 전셋집 전전하다가, 첫번째 내집에 머문 곳은 이문동 이다. 골목 끝 28평 집 밑에는 춘천 가는 기차가 다녔고 중량천이 보였다. 기차는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소리치고 지나갔지만, 그 사이를 막아준 것은 척박한 땅에서 자란 하얀 아카시아꽃 이다. 뜰에 키운 작은 배나무를 잊지 못하겠다. 첫해에 두 개 열렸는데, 아까워서 오래 두었더니 맛이 하도 달아서, 뒷집 할머니와 나눠먹은 기억이 난다. 다시 흘러간 곳은 같은 이문동 33평짜리 집이다. 나는 이 집에 처음으로 내 키보다 큰 감나무를 심었다. 그후 나는 다시 한강을 건너 강남으로 갔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전세로 있다가 처음 내 아파트 소유한 곳은 서초동이다. 두번째 단감나무 심은 곳은 삼성동 이다. 옆에 봉은사가 있고, 한강이 있었다. 추석 때, 멀리 백운대 바라보면서, 한강에서 낚시를 하였다. 내가 세번째 대봉시 감나무 심은 곳은 토평동이다. 옆에 온달장군의 애화가 서린 아차산성이 있고, 앞에 한강이 있었다. 아리수변 그 넓은 둔치의 가을 코스모스꽃은 청초하였다. 내가 네번째 대봉시 감나무를 집 앞뒤에 심은 곳은 용인시 성복동이다. 별도 복 있다는 성복동 이다. 옆에 광교산이 있고, 여인들이 멋 부리고 걸어다니는 실개천과 산책로가 있었다. 나는 진주에서 흘러와서 서울 네곳에 감나무 심은 셈 이다. 세월이 유수라, 지금 그 감나무 중에는 가을에 한 접 이상 감을 다는 큰나무도 있다. 탱자나무, 참나리, 보리수도 심었다. 탱자나무는 진주 칠암동  길, 참나리는 망경산 절벽을 생각케 하는 꽃 이다. 보리수는 제대 후에 글 쓴다고 찾아간 남해 생각케 하는 나무다. 탱자나무는 휴가 차 고향 가는 보성 출신 직원한테 부탁해서 심었고, 참나리는 강화도에서 씨앗을 따와서 심었다. 

 이제 구름이 마지막 머문 곳은 용인이다.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의 용인이다. 정처없이 흘러온 구름이 소멸될 곳은 아마 여기일 것이다. 집 뒤엔 아파트 5층 높이의 버드나무가 있다. 둥치 우람한 버드나무는, 70 평생 이 세상 모든 희노애락 다 맛보고 흘러온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다. 나는 비 젖는 버드나무, 안개 속의 버드나무, 별빛 속의 버드나무를 보기 좋아한다. 나무가 햇볕에 빤짝빤짝 수많은 잎새를 뒤채이면서 살랑살랑 보내주는 맑은 바람을 즐긴다. 청풍(淸風)은 무엇인가. 어디서 오는가를 생각한다. 사실 버드나무는, 내 아득한 소년시절 고향집 앞에도 있었다. 대학시절 교정에도 유심히 바라보던 큰 나무가 있었다. 청소년 때부터 오랜 벗이다. 나는 버드나무를 보며, '내 모든 욕망과 바램도 결국 저 바람에 뒤채이는 버드나무 잎새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가고 옴이 다 무상(無常)이라 한다. 그런데 버드나무는 한 자리에 영원히 뿌리 박고 머물었고, 나는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처음부터 한자리에 고요히 선 버드나무는, 애잔한 그리움 지닌채 흘러다닌 나보다 현명하였다'는 결론도 내린다.

 이제 나는 새벽이면, 향을 피워놓고, 선정인(禪定印) 자세로 버드나무 앞에 앉는다. 부처님께서 결가부좌하고,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서 깊은 명상에 잠길 때 수인(手印)이 선정인 이다. 만년(晩年)에 두 늙은이가 마주 앉은 것 이다. 버드나무는 묵언(默言)을 하고, 나는 명상에 잠긴다. 지금 나는, 이 버드나무 옆에 사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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