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배건너의 추억

김현거사 2014. 1. 9. 16:08

 

  

   배건너의 추억

 

 사람들은 거길 배건너라 불렀다. 나룻배가 목가적으로 사람을 싣고다녔던 모양이다. 강 건너는 층을 이룬 바위절벽에 촉석루가 있었다. 이쪽엔 대숲과 백사장이 있었다. 동네는 비단띠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지며 흐르는 강을 끼고 있었다. 그 위엔 하얀 백로가 날라다녔을 것이다. 물에 흘러온 흙이 쌓인 과수원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곳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갔다. 문산중고등학교 교장에서 진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님 덕에 문산 촌놈이 도시로 온 것이다. 집집마다 다투듯이 빨간 감을 달고있던 감나무가 기억난다. 하늘에 날라다니던 꼬추잠자리 떼가 기억난다. 봄이면 하얀 탱자꽃, 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볼만하던 탱자나무울이 기억난다. 칙칙폭폭 약골 터넬에서 까만 석탁연기 품으며 경전남부선 열차가 나오던 기억이 난다. 배건너는 초등학교 하나와 역전파출소 하나가 전부인 작은 동네였다. 대충 15분만 돌아다니면 동네를 다 볼 수 있었다. 시내로 나가려면, 통나무를 뗏목처럼 엮어서 만든 가설다리를 건넜다. '배다리' 라고 부른 곳이다. 거길 통과하려면 누군가가 얼마씩 돈을 받던 기억이 난다.

 

 6.25 동란 직후라 우리는 임시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당시 기억 중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배고프던 기억이다. 우리는 지금 스리랑카나 아프리카 난민촌 아이들 같았을 것이다. 머리에는 쇠똥이 가득했고, 팔다리는 여위었다. 배 나오고 기름기 번들번들한 사람을 당시는 사장티 난다고들 부러워 했다. 학교 이름은 강 앞에 있다고 천전학교였다. 등교하면 우리는 우선 우리 운동장보다 두배나 넓은 옆의 뽕밭에 들어갔다. 입술 까매지도록 오돌개를 따먹었다. 교정 안의 감나무에도 올라갔다. 떫지만 약간 달작지근한 풋감을 따먹었다. 남의 집 울타리에 달린 노란 탱자도 따먹어보았다. 밀감이나 유자보다 엄청나게 시고 쓴 것을 입에 넣곤했다. 영양가는 근처 방직공장의 번데기가 가장 높았을 것이다. 거기서 금방 삶아 김이 모락모락 나던 뜨거운 번데기를 얻어먹곤 하였다. 집은 아무리 뒤져보아야 먹을 것 없을 건 뻔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밖에서 자력으로 해결한 것이다. 산에 가서 칡 캐고, 송쿠 꺽고, 찔레 새순 껍질 벗겨 먹었다. 들판에서 삐삐 뽑고, 고구마와 감자 캐먹었다. 논에서 메뚜기 잡고, 고동 잡고, 미꾸라지 잡아서, 고무신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이 모든 먹거리가 요즘은 웰빙식품으로 대접받으니, 참 다행스럽다. 

 

 당시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급받은 크레용과 연필깍기는 달나라 별나라 물건이었다. 이런 원조물자를 보내준 미국은 천국보다 부자나라였다. 선생님이 가루우유를 나눠주면, 우리는 그걸 집에 가져와 밥솥에 쪄서 딱딱하게 만들어 먹었다. 쬬크렛을 처음 먹어본 그 황홀하던 감촉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미제껌도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밭에서 풋밀을 씹어 만든 껍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 쬰득쬰득하고 탄력있었다. 아까운 미제껌을 책상 밑에 붙혀놓고 몇날 며칠씩 씹고 또씹었다. 어른들은 그때 처음 C레이션 맛을 보았을 것이다. 미군의 일회용 도시락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속에는, 커피와 과자 야채 닭고기는 물론, 담배와 성냥도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자,우리는 모두 카리비안의 해적이 되었다. 밤에 남강을 헤엄쳐 건너가, 도동의 수박과 참외를 서리해 왔다. 낭만과 모험심을 키웠다.

 

 그 당시 미국공보원에서 제공하던 활동영화를 기억 못하면 말이 않될 것이다. 별빛 아래 영사기가 돌아가고, 이때 모이든 인파는 인산인해였다. 아이들, 청년과 처녀, 노인네와 부인네 모두 집을 비워놓고 나왔다. 어른은 아이를 찾고 아이는 어른을 찾고, 울고불고 난리 피우던 소리 지금도 기억난다. 영화는 무성영화였다. 변사가 있었다. 변사 흉내를 내곤 하였다. 대동강 부벽루와 이수일과 심순애를 기억할 것이다. '김중배의 다이어몬드가 그렇게 탐나더냐' '순애야! 이 손을 놓아라. 놓지않으면 발길로 탁 차 버릴 것이다.' 집에 돌아가며 그 당시 배건너 총각들은  <장한몽>의 대사를 외곤했다. '발길로 차려무나 꼬집어 뜯어라. 애당초 잘못 맺은 애당초 잘못 맺은 아 ~ 꼬집힌 풋사랑' 남인수의 <꼬집힌 풋사랑>을  노래하기도 했다. 진주 총각은 쏘렌토나 베니스 총각 비슷한 점이 있었다. 세레나데의 명수였다. 맘에 드는 처녀를 따라가서, 그것이 비록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일망정, 떨리는 음성으로 세레나데를 바쳤다. 그러다 혹시 일이 성사되면 어느날 둘이 별빛 아래서 만나기도 하였다. 영화 상영 중 간혹 필림이 끊겼다. 그러면 어둠 속은 난장판이 된다. 휙휙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 불었다. 누가 큰소리로 맹랑한 야유 한방을 터트리면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끊긴 영화가 다시 시작될 때도 거쳐가는 과정이 있다. 화면에 하나씩 1234 숫자가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일제히 그걸 읽어나갔다.

 나는 아직도 배건너 밤거리에서 들리던 총각들의 유행가 소리를 기억한다. 깊은 밤 진주극장의 영화나 천막 유랑극단의 써커스 구경하고, 노래 부르며 돌아오던 총각들 발자국 소리를 기억한다. 만약 물의 도시 베니스에 곤돌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아오라 쏘렌토로'란 가곡이 유명한 쏘렌토에 노래가 없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멋도 낭만도 없는 도시일 것이다. 진주도 마찬가지다. 총각들 유행가 소리가 없었다면, 아마 기억할 대상도 없었을 것이다. 

 

 자고로 진주는 평양과 쌍벽을 이룬다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진주의 백미는 촉석루와 서장대다. 절벽에 꽃 피고 달 뜨는 풍경을 일년 사시사철 구경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항상 다리 위를 내왕한 배건너 사람들이다. 동쪽 뒤벼리도 깍아지른 절벽이다. 그 뒤벼리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다. 배건너로 와서 칠암동 대밭에서 건너다 보아야 한다. 서쪽의 평거들판도 마찬가지다. 배건너 망경산에 올라가서 굽어보아야 황금빛 들판이 자세히 보인다. 그래서 나는 배건너 총각에게 감성 점수 백점을 놓는 것이다. 환경 따라 배건너 소년은 남강 은어처럼 민첩했다. 강변 버들처럼 싱싱했다. 대밭의 죽순처럼 부드러웠다. 소년들은 배건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비를 사랑하고, 강을 사랑하고, 구름을 사랑하였다. 숲속의 매미를 사랑하고, 남강의 모래무지를 사랑하고, 하늘의 종달새를 사랑하였다. 소녀를 사랑하여 봄에 망진산 절벽의 꽃을 꺽으러 올라가고, 가을에 밤늦도록 편지를 쓴 것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사라져버렸다. 사랑하던 모든 것 버리고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남강변에 흔하디 흔하던 갈가마귀떼 따라 떠났는가. 집집 울타리마다 흔하디 흔하던 탱자나무 따라 사라졌는가. 모든 것은 한여름밤의 꿈이었던가. 가난하던 그 소년들, 낭만적이던 그 총각들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꽃 피면 꽃 핀다고, 낙엽 지면 낙엽 진다고, 남강 둑에서 진주 출신 가요계의 황제, 남인수의 노래를 그렇게도 열창하던 그들은 떠났다. 맘보바지 나팔바지 입고 멋부리던 그 총각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앵도같이 곱던 우물가 소녀도 볼 수 없다. 이제 그들이 떠난 배건너엔 누가 사는가. 지금 배건너에 가면, 아무도 아는 이 없고, 다리 위에 구름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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