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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공사

김현거사 2014. 7. 22. 08:03

            

   두류동의 이틀 밤

 

  두류동에 사는 친구의 오두막은 허룸해서 좋다. 집이 작아 오히려 산에 눈이 더 간다.

 간밤엔 바위에 누워 눈이 시리도록 별을 보다가 잤다. 모처럼 북두칠성 또렷히 보았다. 서울에도 별은 있지만, 이처럼 영롱하진 않다.

 지리산 하늘은 보석처럼 아름다운 별을 모아 아예 수를 놓은 것 같다. 이처럼 별이 아름다운 곳은 공해가 없는 곳이다. 공해 없는 곳은 꽃빛이 영롱하다. 꽃이 이럴진대 사람은 어떨까? 이것이 틈만 나면 내가 지리산을 찾는 이유다.

  바위에 앉아 고요히 숨을 내쉬며 별 아래서 명상에 잠겨보았다. 어둠 덮힌 산은 고요한 선방(禪房)이다. 바위는 묵언에 든 참선객 이다. 바람소리 물소리는 범패(梵唄)다. 흔들리는 풀과 나무는 바라춤 추는 무용수다. 그 위를 지나가는 달과 별, 바람 구름은 나그네다. 산이 입선(入禪)에 든 것을 본다. 

 호흡법이 중요함을 느껴본다. 청산을 바라보며 서너번 깊은 호흡 하노라면, 맑은 공기 몸에 가득찬다. 서서히  몸의 화기(火氣)가 내려가고, 정신이 맑아짐을 느낄 수 있다. 마치 가만히 놓아둔 유리컵 속의 티끌이 밑으로 가라앉고 물이 청정해지는 이치와 같다. 마음 속 잡념이 가라앉아 마음이 청정해진다.

  마음이 청정하고 몸이 고요하니, 청산은 맑고 평화롭다. 나무잎은 살랑살랑 흔들리고 구름은 흘러간다. '꽃이 피고 새가 운다'는 경지를 읊은  고승들 선시(禪詩)가 생각난다. 이것이 틈만 나면 내가 지리산을 찾는 이유다.

  새벽에 일어나니, 찔레꽃 여기저기 만발했고, 밭엔 도라지와 당귀 잘 자란다. 어딘선가 산비둘기가 울고있다. 산속이 너무나 아름답다. 오늘 하루가 즐겁게 펼쳐질 것란 예감이 온다.

 우리는 아침 상을 바위 위에 채렸다. 천왕봉이 빤히 올려다 보이는 넓적 바위는 그 위가 평평하여 칠팔명이 앉을 수 있다. 

 밥상은 조촐해서 좋다. 원래 산중에서는 풀뿌리 나무뿌리를 캐어먹어야 제격이다. 약초 많은 신령한 방장산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날 우리 아침 식탁은, 깻잎, 당귀잎, 고구마, 감자, 방울도마도, 야쿠르트, 아카시아꿀이 전부였다. 

 벌꿀에 찍어먹는 당귀잎이 더없이 인상적일 수 없다. 당귀의 화사한 맛과 벌꿀 달콤함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고구마와  야쿠르트도 예사롭지 않았다. 하나는 뜨껀뜨껀하고 하나는 시원해서 좋다. 별미다. 해발 7백고지에서 캔 고구마는 유별나게 자줏빛이 곱다. 자주빛 먹거리는 안토시안계 색소를 지녀, 지방질을 흡수하고 혈관 안의 노폐물을 흡수해 피를 맑게 한다.

 땅 좋고 물 좋은 곳이 이곳이다. 산 바람 쐬고 자란 대추도마도 싱싱하다. 흐르는 물에 씻어온 한 소쿠리 타원형 대추도마도는 붉은 빛 선명하다.

 삼채전도 지져먹었다. 주재료는 삼채고, 부재료는 흑돼지 고기와 감자다. 삼채는 히말리야 1400 이상 고지 식물로 게르마늄이 인삼처럼 많다고 한다. 마늘 보다 천연 식이유황(MSM) 성분 6배나 많다고 한다. 잘게 썰어넣은 지리산 흑돼지 고기 고소한 맛을 내고, 감자는 사근사근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지리산 벌꿀 달콤하고, 지리산 당귀잎 화사하고, 지리산 대추도마도 싱싱하다.

우리는 이걸 선식(仙食)이라 명명했다.  불에 익힌 화식(火食)은 멀리하고 매일 아침은 이걸로 때우기로 했다. 채근(菜根)의 담박한 맛을 익혔다.  

 물맛도 빼놓을 수 없다. 소식(少食) 하고, 물줄기 한바가지 떠먹는 것도 멋이라면 멋이다. 우리는 그걸 산삼 썩은 물이라 불렀다. 한잔 마시면 흉중이 탁 터지고, 마음이 청산의 흰구름처럼 자유로워진다. 서산대사의 시처럼, 만국 도성이 개미집처럼 보인다. 

  가능하면 밥은 적게 먹고, 약초차 다려먹고, 숲을 산책하고, 먼저 서로 청소와 설겆이 하자는 것이, 산에 온 우리의 약속이다.

 식사 후, 서울서 가져간 꾸지뽕과 가죽나무 묘목 심었다. 꾸지뽕은 댱뇨에 특효이고, 가죽자반은 경상도 사람에게 귀한 음식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묘목 심는 일 자체가 즐겁다. 남명선생은 두류산 양단수에 도화 뜬 맑은 물을 읊었다. 그 복숭아나무를 작년에 심었는데, 이제 꽃이 지고 작은 열매가 달렸다. 복숭아 익어갈 산골 생각하면 흥이 더 난다. 나무인삼으로 불리는 오가피는 싱싱한 새 잎 달았다. 한잎 뜯어 입에 씹으니, 마냥 쌉싸롬하다. 

 인삼도 싹이 올라와 있다. 산에 심었으니 산삼이다. 같은 약초도 지리산에서 자라면 약효가 강하다. 허준과 유의태 선생이 그래서 산청에 살았을 것이다. 나는 몇년 전에 지리산 남쪽 화개동천 한 시인의 산에 삼을 심은 적 있다. 이번 단오엔 함양 서상 사는 친구 집과 이곳 중산리 두류동 두곳에 심었다.

 몸통에 주름 잡힌 3년근들이라, 당장 금년에 꽃 피고, 빨간 열매 맺힐 것이다. 열매는 새가 먹고 날아다니며 배설하여 먼 곳에 싹 튀울 것이다. 새야 어딘들 못날아 가랴. 지리산 이쪽저쪽에 애기삼 번질 생각하니 은근히 즐겁다. 내년 고희연 때 그걸로 삼계탕 끓이자며 우리는 미리 한바탕  통쾌히 웃었다.

  이 날은 종일 약초 심고, 약초 캐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자주빛 엉컹퀴 뿌리는 정력 허실한 남자의 보약이고, 도시 주변이나 길옆, 더러운 물 흐르는 수채 주변에서 흔히 자라는 돼지풀이라고 부르는 소루쟁이는 모든 염증이나 암에 특효약이다. 발에 자주 밞히는 질경이는 차전자(車前子)라하여 이뇨에 좋고 혈압 내려주는 약이다. 산에 지천으로 깔린 흔한 산죽(山竹)도 당뇨에 특효약이다. 산 전체가 약초밭이라해도 과언 아니다.

 이런 하나하나를 동행한 최상무가 알으켜 준다. 그래 우리는 처음에 그를 사부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본초(本草)선생'이란 고상한 아호를 지어올렸다.

   이날 우리는 각자 한보따리씩 산죽 뿌리를 캤다. 산죽 중에서는 가장 약효가 강한 곳이 뿌리다. 보나마나 당뇨 고혈압 있는 집사람들에게 점수 딸 일 뻔하다. 

 최상무는 근처의 쑥을 베어다가 컨테이너 숙소 안에 끈으로 달아놓는다. 잠자면서 쑥향기 즐기고, 마르면 밤에 바위에 모여앉아 한담할 때, 모깃불 재료로 쓰려는 것이다. 

 되는 놈은 나무 하다가도 산삼 캔다. 근처에 자주달개비꽃이 많다. 보라빛 그 꽃을 숙소 앞에 심었다. 부처꽃도 많다. 줄기 위로 나란히 피어오르는 그 아름다운 꽃 이름을 나는 거기서 처음 알았다. 동자꽃도 여기저기 많다. 밤에는 뭔가 이름 모르는 새가 운다. 이런 산꽃 피고, 새가 우는 델 놔두고 꽉 막힌 창고칸 같은 호텔방 선호하는 사람들 뜻을 모르겠다. 

 두류동 계곡은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물이 비단이다. 골짝골짝마다 연분홍 진달래 피었다. 진달래가 마치 날더러 무릉도원에서 살자고 유혹하는 산골 새악씨 같다.

 그날 오후 우리는 간이 샤워장 하나 만들었다. 물줄기를 대나무 홈통에 잇고 간단히 해결했다. 산중에서의 목욕이다. 여기선 약수로 등목을 치니 얼마나 호사인가. 어찌나 차그운지 진저리가 다 쳐진다. 빤쓰까지 홀까당 벗어던지고 은밀한 곳까지 목욕시킨 후, 완전 나체가 되어 놀았다. 반석 위는 때죽꽃 한창이다. 하얀 꽃을 흔드는 맑은 바람은 저 아래 구절양장 구부러진 골짜기에서 불어온다. 바람은 우리 나체를 살랑살랑 쓰다듬고, 천왕봉으로 올라간다. 짹짹  새만 날아다니면서 우리 물건을 보고, 아무도 보는 이 없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이하여 푸른 산에 사는고(問君何事棲碧山), 웃으며 대답않으니, 마음은 절로 한가롭다.(笑而不答心自閑 )'. 이태백이처럼 우리도 웃어보았다.

 저녂엔 생강나무 잎으로 쌈 싸먹고, 줄기는 장작불 난로에 올려 차를 끓였다. 제피 부드러운 잎은 튀겨먹었다. 향긋한 제피 튀김에 삼천포 민어조기의 고소한 배합을 도시인들은 모를 것이다

 거제와 남해서 교편 잡은 적 있는 오태식 교장은 알짜배기 대구 고니 맛을 소개하고, 콩나물 넣고 쪄낸 대구뽈찜 이야기를 했다. 미조리 갈치회, 남해대교 좌측 동네 개불 맛, 금오산 전어마을 이야기를 했다. 그를 높이 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제 철에, 제 장소에 가서, 제 값에 음미한다는 점이다.

 해 지자 달이 솟아온다. 단소 불고, 시조창을 읊었다. 초생달 뜬 지리산 청천하늘 잔별도 많고, 거기서 내지르는 오교장의 시조창 일품이다. '산촌(山村)에 밤이 드니 먼딋 개 즈져온다. 시비(柴扉)를 열고 보니 하늘이 챠고 달이로다.'

 최상무는 단소로 '청성곡(淸聲曲)'을 분다. 단소 소리는 달빛 푸른 산마루에 백학이 날라가는 것 같다. 과연 명창 안숙선씨 남편답다. 그는 쌍골죽을 베어 대금 만드는 이야기를 했다. 5월 단오 경에 갈대 속에 있는 청을 벗겨 대금의 청을 만든다고 한다.

  나는 '두류동에 사는 친구에게'란 내 시조를 소개했다.

 

지리산 두류동에 초당을 엮었으니

앞에는 맑은 쏘가 뒤에는 천왕봉이

흰구름 장막을 치고 같이 살자 하더라

 

북창엔 대를 심고 남전엔 채소 심고 

때로는 호미 메고 약초 캐러 나서보니

삼신산 바로 여기다 불로초 밭이로다

 

아침엔 일어나서 청산에 눈을 씻고

밤 중엔 홀로 누워 물소리에 귀 씻으니

한가한 청풍명월이 친구하자 하더라.

 

산나물 된장국에 입맛을 들였으니

산가의 별미로는 이 밖에 더있는가

그 중에 두룹 도라지 향기 높다 하더라

 

두견화 피는 속에 봄철이 왔다 가면

머루 다래 절로 익는 가을 또한 찾아온다

철 따라 탁주 한 병은 그 멋인가 하노라 

  

 신선이 연꽃 모양의 등잔에 관솔불 밝히고, 파초잎 술잔에 죽력주(竹瀝酒) 마시는 경지가 이럴 것이다. 옥향로에 향을 피우고 하늘에 제사 지낸 밤이 이럴 것이다. 쑥불 피워놓고, 침술 이야기, 편백나무 생잎 깐 황토방에서 자는 이야기, 한약을 벼개 속에 넣고 자는, 신침법(神枕法) 이야기 나누었다. 

삼나무숲 그늘 아래 3백만원 주고 컨테이너 박스 하나 끌어다놓고, 이렇게 산채나물 맛 들이니, 산중 취미 꿈이 아니었다.

 밤 늦어 등불 끄니, 새벽 1시였다. 늦게까지 이야기하고 이튿날 새벽 5시 일어나 산 속 거니니, 천왕봉은 얼굴을 흰구름으로 씻었다. 사람이 배울 것은 저 맑은 얼굴이다. 물소리와 구름 속에 몇 천년 앉아있으면 저런 얼굴 될까 생각 해보았다. 

 두류동의 이틀 밤을 이렇게 보내고, 하산하여 덕산 약초 골목 들렀다. 야생 흰민들레와 꾸지뽕 뿌리를 조금 샀다. 하우스나 밭에서 재배한 것 아니라서 약성이 강하고 향긋하다

 경호강 따라 내려가니, 절벽에 함초롬히 이슬 젖은 두견화 보인다. 너무 고와서 차라리 슬프다. 간밤에 두견새는 아마 밤새 서편제 한마당 목청껒 토하다가 갔을 것이다.

 지리산은 온갖 영초와 꽃에 덮힌 산이다. 생초 쯤에서 였을까. 상경하는 차 속에서 준수한 지리산을 다시 돌아보았다. 내가 지금 뭐하러 공해에 덮힌 서울로 가고있나. 차를 돌리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고향의 시냇물

 

  고향 생각하면, 누구나 시인,  화가, 음악가가 된다. 고향은 마음 속 시요, 한 폭 산수화요, 한 소절 음악이다. 멀수록 그립고, 못갈수록 생각나는 곳이다.

  최근에 유화를 시작하면서 나는 첫 작품으로 고향 시냇물을 그려보았다. 서툰 솜씨지만, 서투르면 서투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일이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시냇물은 강이 되기 전의 작은 흐름이다. 강처럼 깊고 푸르지 않지만, 강의 원천이다. 우리 그리움의 출발점이며, 추억의 발원지다. 고향은 하늘빛마저 얼마나 그리운 곳인가. 바람조차 얼마나 시원한 곳인가. 그 하늘, 그 맑은 바람 아래, 시냇물은 흘러간다.  

  밤하늘의 반딧불, 별빛 어린 물, 이슬 맞은 박꽃이 눈에 보인다. 밤마다 울어대던 개구리 울음소리도 들린다.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도 들린다. 논두렁 밭두렁 종달새 소리 들리고, 소년이 불던 풀피리 소리 귀에 가날프게 귀에 울린다. 누렁이 황소 목에 매달려 딸랑딸랑 울리던 종소리 기억난다. 그곳은 소나기 피하려고 우리가 토란 잎을 우산처럼 받치고 뛰어다닌 곳이고, 덤벙덤벙 옷을 적시며 송사리 물방개 잡던 곳이다.

  그래 우선 내가 첫번째 그리기로 작정한 것은, 우리 할아버지 집 뒤에 있던 작은 시냇물이다. 그것은 어릴 때 함께  소꿉놀이 하고 놀던 여자애 같다.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안개 속의 산처럼 멀고 신비로워 진다. 가장 원초적인 추억이라 그럴까. 작은 그 시냇물이 내 심저에 존재하는 가장 그리운 시냇물 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앞에 신안리 들판과 남강이 보이는 누런 황토 산 위 커다란 정자나무 옆에 있었다. 감나무와 대밭이 집을 감싸고 있었고, 능선을 싱그러운 청보리밭에 덮혀 있었다. 

   시냇물은 퍼머넌트그린 청보리밭 꼬불꼬불한 길 내려간 우리 논 옆에 있었다. 논가에는 내가 나무에 올라가 입술 까매지도록 코발트그린 오디 따먹던 늙은 뽕나무가 있었다. 뽕나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코발트불루 하늘과 목화송이 같은 흰구름 몇 점 머리에 이고 있다.

  낮으막한 산 밑을 구부러져 흐르던 물에 산딸기와 크림슨핑크빛 망개나무 열매가 비치고 있다. 뻐꾸기 소리 들리던 시냇가다. 찔레꽃 향기 덮힌 시냇가다. 물속을 흘러내려오면서 동그랗게 다듬어진 조약돌은 예뻣다. 물결과 바람에 씻겨진 모래는 아깝도록 부드러웠다. 돌에 붙은 다슬기와 고동은 지천으로 많다.

 그 개울가에서 어느 여름날 황혼에 나는 싱싱한 피라미가 물 위로 점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른 새벽 젖은 모래밭에 찍힌 깜찍한 물새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했다. 

  아마 내 가장 원초적 유아기적 풍경이라, 그런 모양이다.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나이 들고 늙어갈수록 더욱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나는 이 시냇물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아를르의 교외 풍광을 그린 고흐처럼, 한번 강렬한 텃치의 인상적인 유화로 그릴려는 것이다.   

   두번째 시냇물은 우리 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던 시냇물이다. 강 건너 약수암이란 절이 있었다. 그 

 절 아래는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게 핀 산골짝에 그 시냇물이 있었다. 거기 징검다리가 있었고, 다리 옆에서 과수원집 어린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맨발이고, 소녀가 띄운 고무신은 징검다리에서 출발하여 넘실넘실 물결따라 흘러간다.

 하늘엔  새빨간 잠자리가 떼지어 날고 있었다. 소녀의 뺨은 꽃보다 부드럽다. 그 옆 종아리 반쯤 걷은 베잠방이 소년은 나였다. 

 나는 소녀와, 물에 흘러간 고무신과, 빨간 잠자리떼를, 한번 르노와르의 파스텔화처럼 그려보고 싶다. 르노아르의 '모자를 쓴 소녀'처럼, 소녀 얼굴을 그렇게 부드럽게 표현해보고 싶다. 

 세번째 대상으로 정한 시냇물은 지리산 밑 시냇물이다. 지리산 밑 덕산 산청 함양서 온 중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 맘에 새긴 소재이다.

 시냇물과 섶다리와 백도라지 핀 산밭을 그려보고 싶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이 거울같이 비치던 맑은 물을 그리고 싶다. 물 위에 뜨있던 흰구름과 물방아간을 그려보고 싶다. 초가지붕 위에 엎드린 늙은 감나무 하얀 서리에 덮힌 홍시를 그리고 싶다. 가능하면 그 옆에 이낀 낀 푸른 탑과 절간 처마에 매달려 고요한 소리 울리는 풍경(風磬)을 그려넣고 싶다. 이 모든 장면을 수채화 텃치로 깔끔하게 한번 묘사해보고 싶다. 

  두보는 이렇게 읊었다.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안아 흐르나니, 긴 여름 강촌에 일마다 그윽하다. 절로 가고 절로 오는 것은 처마의 제비요, 서로 친하게 나르는 것은 강 위의 갈매기로다. 늙은 아내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려 만들고,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만든다. 다병하여 오직 바라는 것은 약물일 뿐, 미천한 몸이 이 밖에 더 무엇을 구하겠는가.'

 강은 시의 소재인 것이다. 시냇물이 그림의 소재 되지말란 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내 어릴 때 본 순서대로 시냇물을 딱 세군데로 지정하여 착수한 것이다. 그것은 내 유아기와 소년시절에 뇌리에 박힌 원조 시냇물이다. 정다움과 추억이 믹싱된 믿음직한 친구다. 시냇물은 내 향수의 출발점이요, 그리움의 종착역이다.

  그 점에서, 내가 이 시냇물을 그리려고 작정한 것은 아무래도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고향의 작은 웅덩이  


 요즘은 동네마다 아파트마다 어린이 놀이터가 있지만, 옛날은 그렇지 않았다. 미끄럼틀, 그네 같은 것은 물론이고, 어린이 놀이터 시설 자체가 없었다. 당시는 미끄럼 타려면 뒷산 경사진 잔듸밭에 가서 미끄러지며 놀았고, 그네 타려면 동네 정자나무에 새끼줄 매고 탔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 때 우리 동네 놀이터는 두 군데다. 하나는 우리 할아버지 집 옆  정자나무 밑이요, 하나는 우리 작은 아버지 집 옆 작은 웅덩이다.

 우리 할아버지 집은 대밭과 감나무 과수원이 달린 동네 맨 위 전망좋은 곳에 있었다. 거기는 앞에 망진산과 남강이 보이고, 드넓은 들판 끝에 하동가는 신작로가 보였다. 옆에 수십년 된 큰 포구나무가 있어 어른들은 그 나무 밑에 쑥불 피워놓고, 멍석 위에서 장죽으로 담배 피우면서 한담을 즐겼다. 간혹 추수한 콩을 늘어놓고 도리깨질하던 거길, 사람들은 타작마당 혹은 잿마당이라 불렀다. 아이들은 저녁밥 먹고나면 매일 여기 와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쑥불 냄새 맡으며 잠들곤 했다.

  낮에 주로 노는 곳은 우리 작은 아버지 집 옆 작은 웅덩이다. 역마살이 있었던지, 일제 때 만주와 전라도를 한없이 떠돌던 작은 아들이 집에 돌아오자, 우리 할아버지는 서둘러 결혼시키고, 새 기와집 하나 지어 정착시켰다. 과수원 달린 여나믄 마지기 문전옥답 떼어주고, 대청마루에 당시 농촌에선 보기 힘든, 한가롭게 추를 흔들거리는 커다란 벽시계를 달아주었다. 

우리는 그 집을 '새 집'이라 불렀다. 그 '새 집' 논에 물을 대려고  만들어놓은 것이 그 웅덩이다. 우리가 '둠벙' 혹은 웅덩이로 부르던 그 곳은 골짝에서 탱자나무 울타리 밑을 흘러내려온 물을 가둬놓은 곳이다. 물이 깊어 주변에 항상 빨간 고추잠자리 떼가 날라다녔고, 물 속에는 붕어나 방개가 많았다.

 고추잠자리 붕어 방개는 당시 우리들의 살아있는 작난감이었다. 미끄럼틀과 그네는 없지만, 요즘처럼 로붓트니 자동차니 하는 그런 것은 없었지만, 당시 아이들은 생명이 깃든 움직이는 고급 작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작난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수벵이'다. 우리는 왕잠자리 수컷을 '수벵이'라 부르고, 암컷을 '또니'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왜 '수벵이'를 눈을 빛내면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지 모르겠다. 우리에겐 불가능한 공중을 날라다니는 재주를 가져 그랬을까. 먹지도 못하는 걸 잡은 것이 왜 그땐 자랑이었던지 모르겠다. 

 수벵이는 몸이 하늘빛이고, 또니는 호박색이다. 둘이 교미를 한 채 쌍발비행기처럼 허공에 날아다니기도 했다. 우리는 호박꽃을 따서 수놈의 날개와 엉덩이 부분을 노랗게 물들여, 가짜 '호박또니' 만들어, '수벵이'를 낚았다. 작대기 끝에 실로 '또니'를 매달아 공중에 빙빙 돌리면, 날아가던 수벵이가 암컷과 교미할려고 달라붙는다. 그러면 물 위로 살살 각도를 내리면서 끌어내려 손으로 덮쳐잡았다. 잡으면 손가락 사이에 날개를 접어 끼고 다녔다. 아마 그 까실까실한 날개 퍼덕이던 손맛 감촉과 스릴을 못잊는 때문이리라. 

'수벵이'와 '또니' 사촌이 많다. 해거름이면 빨간 고추잠자리 떼가 하늘을 덮었고, 햇빛 쨍쨍한 오후엔 몸통이 날렵하고 날개가 모시같은 물잠자리가 풀섶에 앉아 꼬리를 수면에 담갔다 올렸다 하면서 몸을 적셨다. 

 물속에도 작난감이 많다. 방개와 소금쟁이다. 거북선처럼 생긴 방개는 노처럼 생긴 뒷발로 헤엄쳐 다녔다. 아이들이 잡아서 땅에 뒤집어 놓으면 딱정벌레같이 두껍고 반질반질한 등으로 땅바닥에 뱅글뱅글 돈다. 그러다가 딱딱한 날개 밑에서 또하나 부드러운 날개를 펴고는 잠시 사이에 공중으로 획 날아갔다.

소금쟁이는 몸이 가늘고 긴데, 물 표면을 슬슬 미끄럼질 쳐가곤해서 신기했다. 잡으려면 금방 깊은 데로 도망가서 잡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물 속에 방개 소금쟁이만 있던가. 붕어, 송사리가 있고, 미꾸라지, 자라가 있다. 

  아이들은 붕어 새끼 잡으려고 바지를 걷어올리고, 고무신짝을 벗어들고 옷 젖는 것도 아랑곳 하지않고, 마름과 개구리밥 뜨있는 풀섶을 헤치고 다녔다. 몸이 납작하고 전신이 금빛 기와 비늘로 덮힌 붕어가 가장 아름다웠다. 버들피리나 송사리가 그 다음이었다.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미끌미끌 빠져나가는 미꾸리는 순서가 맨 뒤다. 풀밭에 또다른 검정 고무신 한 짝 놓아두고, 거기에 물을 붇고 자랑스런 포획물을 담아놓곤 했다.

간혹 물 밑 깊이 숨었던 메기나 장어, 자라가 잡힐 때도 있지만, 그건 어른들께 바치고 칭찬을 들었다. 

 얼룩무뉘 해병대 옷 입고 시도때도 없이 울던 초록 개구리도 있었다. 봄은 못에 가득한 까만 올챙이 떼로 시작된다. 보리타작 끝나 모 심는 여름은 개골개골 논 가득 개구리 울음으로 지나간다. 비 오면 웅덩이 근처는 개구리 합창 무대다. 아이들은 시끄럽다고 돌을 던지기도 하고, 닭 모이 한다고 잡아서 집에 가져가기도 했다.

 소낙비 오고나면 풀잎에 등이 녹색이고 배가 하얀 작은 청개구리가 나타난다. 피부가 보드럽고 이뻐서 아이들이 손바닥에 올려놓고 놀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웅덩이는 살아있는 놀이터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 물 속에 헤엄치는 것을, 아이들은 숨 죽이고 닥아가서는 손으로 잡았다. 아이들은 맨 손 사냥꾼 이었다. 사냥의 기술을 익혔다. 손으로 까실까실한 촉감, 매끄럽거나 딱딱한 촉감, 파닥파닥 바들바들 떠는 촉감을 익혔고, 곤충들과 물고기의 금빛, 초록 빛, 푸른 빛을 눈으로 익혔다. 입을 벌려 손가락을 물려고 하는 곤충도 만났고, 삼십육계 재빨리 도망치는 민첩한 곤충도 만났다.

 그곳은 아이들 공룡의 세계였다. 갑자기 스르르 물 위에 나타난 물뱀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고, 혀로 곤충을 잡아먹는 엄청나게 큰 거구의 뚜꺼비도 만났다. 목을 빼어 한번 물면 쇠젓가락도 끊는다는 자라도 만났다. 하늘을 무너트릴듯 뻔쩍뻔쩍 벼락 치면서 지나가는 번개불에 놀라기도 했다. 검은 구름이 뭉치다가 싸아아 나리는 소나기에 환호했고, 비 온 뒤 하늘에 뜨는 무지개에 감탄했다.

 아이들은 구름을 보고 비가 올지 않올지를 알았다. 라디오 없이 구름만 보고 날씨 알아맞춘 측우사였다. 아이들은 머리칼과 웃통이 훔뻑 젖어도 개의치 않았다. 한나절 놀고나면 다 말랐기 때문이다. 해가 쨍쨍하게 맑은 날  금방 비를 뿌리고 지나가는 비를 '호랑이 장가가는 비'라 불렀다. 

 뭉게구름은 하늘에 찬란했고, 황혼은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이 아름다운 대지에 저녁이 오면, 대밭가엔 저녂 밥 짓는 연기 하얗게 피어오른다. 이때 쯤 집집마다 어머니들이 차례로 둠벙이 내려다 뵈는 메뜽에 올라가서 아이들을 부른다. ‘개똥아! 밥 묵으러 오이라!’ 그러면 아이들은 허연 배 내놓고 뒤집어진 송사리와 살아있는 붕어를 살며시 웅덩이에 도로 넣어주고, 검정 고무신을 둠벙에 씻은 후, 신 신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작은 집 두 누이 이름은 인정이와 인자다. 그들은 반찬감으로 메뚜기를 잡았다. 아이들이 그 일을 거들었는데, 메뚜기를 풀줄기에 뀌거나, 유리병에 가득 채워 누이에게 주곤 했다. 그러면 그들은 집에 가서 그걸 튀겨 짭조름한 밥 반찬을 만들었다. 

 커다란 방아잽이 여치는 아이들의 좋은 작난감이다. 뒷다리를 잡으면, 덜렁덜렁 방아를 찧곤 했다. 사마귀에게는 왜 그런 일을 시켰던지 모르겠다. 앞발이 톱날같고 입으로 아무거나 무는 사마귀를 잡아, 손에 난 티눈을 뜯어먹게 했다.

 시끌벅쩍 노느라면 금방 배 고파진다. 이때 쯤 누이들이 김이 하얗게 오르는 삶은 고구마, 감자를 대바구니에 가득 담아 내왔다. 풋콩도 삶아왔고, 과수원 단감을 따주었다.

  어른들은 웅덩이 근처로 와서, 거름 할려고 근처에 무성한 풀을 베어 울덩이 둑에 말렸고, 그땐 싱싱한 풀냄새가 주변 가득했다. 가을 추수 끝나면 웅덩이 물을 빼고 미꾸라지 잡아서 추어탕을 끓였다.

 그러나 그 시절 웅덩이는 주로 아이들 놀이터요, 천국이다. 봄엔 둠벙가에 찔레꽃 하얗게 피고, 여름엔 소나기 지나가고, 겨울엔 쨍쨍 얼음이 얼었다. 아이들은 얼음판 위에 올라가서 시끌벅쩍 축제 벌렸다. 손수 만든 댓가지 스케이트 신나게 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웅덩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어린이 놀이터다. 거긴 하늘을 비행하는 잠자리, 물 속을 헤엄치는 붕어와 방개, 나락에서 톡톡 튀던 메뚜기가 있었다. 벼란간 천둥치며 소리내며 떨어져 얼굴 씻어주던 소나기가 있었다. 무지개가 있었다. 이런 놀이터는 아마 요즘 세상천지에 없을 것이다. 

  배운 것 없지만 인정 많던 두 누이, 그 누이들이 가져온 김이 모락모락나던 감자와 고구마가 그립다. 과수원서 따온 단감  맛도 그립다.

 누이 하나는 가난한 농사군에게 시집 갔고, 하나는 장사꾼에게 시집 갔다. 둘다 형편이 어려웠다. 그들은 내가 고향 내려가면 도회지 살던 내 손을 잡으며 그리 반가워할 수 없었다. 

 타관에 산지 이제 50년이 되었다. 세월이 깊어 갈수록, 그 시절 그 누이들이 그립다. 고향의 그 웅덩이 주변 모든 것이 그립다. 이제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리고 웅덩이 터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웅덩이는 비 온 뒤 잠시 나타나던 무지개 같다. 어디로 가버렸다.

 그런데도 기억 속에선 아직도, 그 웅덩이 속에 살아숨쉬던  곤충과 물고기들이 꼬물꼬물 살아 움직인다. 그 아름다운 황혼이 눈에 보이고, 그 개구리 울음소리 귀에 들리고, 그 찔레꽃 향기 코에 스민다. 소나기 지난 후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꿈결에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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