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나애심과 송민도/동방문학 2014년 4월호

김현거사 2014. 2. 12. 12:10

 

    

             나애심과 송민도 

 

 요즘 우리나라 젊은 가수들이 한류니 뭐니 하면서, 세계를 누빈다. 노년인 나로서는 젊은이들의 노래가 어느 수준인지 자세히는 모른다. 그러나 <K-POP>이니, <소녀시대>니, <비>니 하는 가수들이 중국을 위시한 동남아 베트남 태국 일본에선 인기 스타인 모양이다. 프랑스 영국 등 구라파, 미국과 브라질같은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그렇다고 한다. 그들이 파리나 런던 뉴욕 공항에 나타나면 금발의 백인 청춘들이 꺅꺅 기성을 지르며 아우성치는 뉴스가 나온다. 40여년 전 클립리쳐드 내한공연 때 생각난다. 그때 지금은 할머니가 된 동방예의지국의 여대생들이 챙피한 줄 모르고 팬티나 브라지어까지 벗어 던지고 야단법석 떨었다. 최근엔 싸이가  <강남스타일>이란 풀래시 한방으로 세계적인 홈런을 쳤다. 요즘엔 흉내 귀신인 일본에선 짝퉁 한류까지 생겼다고 한다. 음악 때문에 한국의 국가브랜드가 얼마나 올라갔는지는 불언가지(不言可知)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런 놀라운 끼를 숨기고 있었을까.  이쯤에서 우리 가요사 족보를 한번 뒤적거려볼 필요가 있다. 세계가 우리의 끼에 놀라는데, 우리만 서산 마애불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프랑스에 샹숑이 있고, 이태리에 칸쇼네가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 탱고가 있고, 우리나라엔 트롯트가 있다. 미국엔 휘트니휴스턴이 있고, 프랑스엔 이베트지로가 있다. 우리나라엔 나애심 송민도가 있다. 한류는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닐 터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젓가락 장단 두들기며 양은 주전자를 기울려 막걸리 따르며 부르던, 옛노래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한류의 원류이다. 

 나는 고향이 진주라서 '가요계의 황제' 남인수 노래를 좋아한다. 그의 <애수의 소야곡> <추억의 소야곡>이 내 노래방 십팔번이지만, 여가수로는 나애심과 송민도를 존경한다. 두 분 다 고급 허스키를 구사한 분이다. 나는 한 때 서양물이 들어 이베트지로와 에딧삐아프를 좋아하였다. <장미빛 인생>을 노래하는 에딧삐아프의 부드러운 바이브레이션에 한없이 반했고, <미라보 다리>을 노래한 이베트 지로의 샹숑에 넋을 잃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신토불이란 말처럼, 나애심과 송민도 팬이 되었다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한번 살펴보자.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여기 마지막 대목,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특별히 주목해보자. 나애심의 허스키 바이브레이션이 이 대목에 몽땅 들어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호가 저음 허스키라면, 나애심은 고음의 허스키다. 그 허스키가 뱃속 깊이 들이킨 숨을 비공과 그 가날픈 몸 전체를 통해서 소리로 떨려나온다. 음역은 끝간데 모를 고음으로 탁 터져 시원하면서도, 완벽한 바리브레이션을 구사한다. 우선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그 성량이 놀랍다. 성량이 부족한 가수가 혀 끝의 기교로 내는 소리 하고는 비교가 안된다. 그는 벨칸토처럼 대담하면서 허스키한 창법이다. 약간 쎅시한 느낌을 준다. 여인으로서 더없이 매력적 이다. 목 메인듯 애수가 가득 담긴 허스키, 이게 나애심의 매력이다. 이 매력이 가장 잘 들어난 곳이 <백치 아다다> <미사의 종> 이다. 이 나애심의 허스키가 나를 샹숑에서 토롯트로 귀환시킨 장본인이다. 나는 그를 한국의 에딧삐아프로 생각한다. 당시 영화계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듯 하다. 그의 허스키에 반한 것인지, 그의 미모에 끌려선지, 그를 주연으로 <백치 아다다> <구원의 애정>같은 영화를 제작한 일도 기억해둘만 하다. 

 

 

                    나애심

 

 

 송민도는 알토 허스키 보이스다. 현악기로 치면 첼로 같고, 관악기로는 크라리넷 비슷하다. 화려한 소프라노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음은 한지를 바른 창문 밖에서 듣는 아쟁 소리 같다. 그는 우리나라 가수 중 클래시컬 창법을 처음 시도한 사람으로 불린다. 송민도의 어머니는 이휘호여사와 이화학당 동기동창이고, 그 역시 이화학당 출신이다. 경기도 수원군에서 감리교 목회자의 딸로 출생한 그는 1947년 단발머리로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인 중앙방송국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하여 1기생으로 발탁되었다. 가성을 사용하지 않는 그의 고급스러운 창법은, 서구식 음으로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단계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데뷰곡은 <고향초>이고, <나의 탱고> <캬츄샤의 노래> <목슴을 걸어놓고> <여옥의 노래> 등이 있다.  그의 음성은 비단이 부드럽게 스쳐가는 것 같고, 떨림은 옥구슬이 산산히 깨어지는듯 하다. "초록바다 물결 위에 황혼이 오면, 사랑에 지고새는 서귀포라 슬품인가." <서귀포 사랑>의 첫구절에서, 바다위에 내리는 황혼같이 부드럽게 스러지는 그의 바이브렛에 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목석일 것이다. 듣는 사람을 물새로 만들어, 짭자롬한 소금냄새와 해조음을 만나게 한다. 애상적인 면에서 송민도 노래는 이베트지로 같다.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면', 그의 데뷰곡 <고향초>는 물새가 날고 동백이 피는 이미지 그대로다. 이 노래는 처음 송민도에 의해 발표되자, 장세정 주현미 이미자 홍민 등 후배가수들이 줄줄이 리바이벌 했다. '후루사토구사'란 제목으로  일본 노래로 번안되기도 하였다. 그의 <청실홍실>은 대한민국 드라마 주제가 1호이며, 그의 노래 <나 하나 사랑>은 영화화 되었고, <여옥의 노래>는 <산유화>의 주제곡이 되었다. 

 옛날에는 집에 있던 민화나 오래된 도자기를 골목에서 엿장수 엿과 바꿔 먹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비싼 골동품 대접을 받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동안 사람들은 우리 가요에 뽕짝이라고 비하하는 표현을 썼다. 대중가요라는 굴레를 씌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을 다시 재평가할 때가 되었지 싶다. 선별해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해야할 때가 된 것 이다. 아직 조춘(早春)처럼 철이 좀 이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에딧삐아프나 이베트지로처럼 나애심과 송민도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때가 된 것 같다.

 

               이화학당 시절 송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