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사람마다 아름다운 미소를 가졌다. 라일락처럼 수선화처럼 향기롭거나 청순한 미소를 가졌다. 만약 우리가 산야를 쏘다니며 야생화를 수집하는 사람처럼 깊은 관심 가지고 주변을 살핀다면, 삭막한 거리에서 낙화처럼 수없이 흩어지는 아름다운 미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외출시마다 그 미소를, 소녀가 꽃잎이나 단풍잎을 책갈피에 끼우듯이, 마음의 갈피에 채집해오는 버릇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미소는 머리에 앙징스런 리번을 단 너댓살 짜리 어린 아이의 미소다. 소매 끝에 금박이 달린 노랑 색동저고리에 초록색 치마 받쳐입은 스스로가 인형같은 소녀라면 더욱 그렇다. 그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인형을 안고 별처럼 빤짝이는 눈동자로 인형을 쳐다볼 때 떠올리는 귀여운 미소처럼 이쁜 것이 없다. 그 모습은 지상에 하강한 천사를 연상케 한다. 나는 아기를 동행한 보호자도 꼭 살펴본다. 학처럼 가날픈 몸매에 세월의 향기를 담은 은은한 노부인의 동행이 가장 아름답다. 나는 노부인이 손녀와 눈을 맞출 때 떠올리는 자애스런 미소를 항상 주목한다. 그 모습은 매화처럼 향기롭고 그윽하다.
나는 훈풍에 나부끼는 실국화를 연상시키는 젊은 여성의 미소를 사랑한다. 까만 마스카라한 긴 머리 아가씨가 연인과 도심의 페이브먼트 위를 걸어가며 띄우는 보조개를 좋아한다. 하얀 치아를 들어내며 가녀린 눈에 떠올리는 애교있는 눈웃음을 좋아한다. 버들피리처럼 우리 곁을 재빨리 스치고 지나가면서 핸드폰으로 어디 누군가와 즐거운 통화를 하는지 하늘을 향해 웃는 어린 소녀의 미소를 사랑한다. 그들의 미소는 남쪽 바닷가 싱싱한 유채꽃을 연상시킨다. 스카프도 모자도 제복도 아름다운 스츄어디스들이 늘씬한 각선미 선보이며 공항 라운지를 일렬로 또박또박 걸어가면서 띄우는 미소도 좋아한다. 그것은 세련된 라이락 향기를 생각나게 한다. 나는 전철에서 마즌편 의자에 앉아 졸던 초라한 차림새의 새댁이, 문득 자애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건너편 노인의 시선에 당황해서 던지는 수줍은 미소도 사랑한다. 그것은 고향언덕의 복숭아꽃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비구니스님 눈가에 번지는 고요한 미소도 사랑한다. 그것은 호수에 밀리는 물무늬를 연상케 하고, 백목련(白木蓮)처럼 향기롭다.
'A certain smile'이라는 음악을 들으면, 미소는 외롭고 고독하고 영원히 잊지못할 애상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소가 산허리에 감긴 안개처럼 보일듯 말듯 가리어 더욱 신비로운 것은 청상(靑孀)의 미소다. 하얗게 스러지는 달빛처럼 애잔한 미소는 초라한 양노원의 휴게실에 모인 노인들 미소다.
간혹 남성도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경우가 있다. 뜨거운 백사장에서 구리빛 건강한 몸을 뽑내며 걸어가는 청년의 미소. 칠척 장신의 근골 튼튼한 배구선수가 강스파이크를 성공시키고 동료들을 향해 돌아설 때의 미소. 파 쓰리 숕홀에서 7번 아이언으로 버디를 잡은 골퍼가 입가에 띄우는 회심의 미소. 평상에 앉아 막걸리 잔을 입으로 가져갈 때 농부의 미소. 파이프 올갠 소리 성스러운 대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시는 주교님의 미소 모두 아름답다.
어쨌던 미소는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관심의 대상이었다. 서양에서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유명하다. 그것을 83퍼센트의 기쁨과 17퍼센트의 슬픔이 균형을 이뤘다고 한 이론가가 분석한 적 있다. 불교에는 염화시중의 미소가 있고,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요,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미묘한 향이로다.' 란 게송이 있다.
현대에 와서 미소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아름답게 미소 짓는 법을 진지하게 가르키는 곳은 스츄어디스 교육기관이다. 알고보면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미소는 얼굴에 있는 감정을 담아내는 80여개의 표정근들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표정을 연출하여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근육들은 사용여부에 따라 퇴화하고 발전한다고 한다. 스츄어디스들은 입술을 둘러싼 구륜근을 사용하여 입을 다문채로 볼이 쏙 들어갈 정도로 오므리는 연습을 한다. 광대뼈에서 입술 가장자리를 잇는 대협골근을 사용하여 입을 다문채로 입술을 뒤쪽 위로 끌어올리는 연습을 한다. 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안륜근을 사용하여 눈꼬리에 부드러운 주름이 잡히는 연습을 하고, '아이우에오'와 '위스키'란 발음을 반복하여 입가의 근육을 풀고, 입술꼬리를 올리고 미소짓는 법을 연습한다.
웃음은 신의 선물이라는 말도 있고, 인간만 웃을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는 설도 있지만, 웃음은 암세포와 싸우는 백혈구의 생명력을 튼튼하게 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의 양을 줄인다고 한다. 인디아나주 볼메모리얼 병원에서는 15초 웃으면 이틀 더 산다고 발표했고, 그 경제적 가치가 200만원 상당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어쨌던 미소는 사람을 더욱 은은하게 만들고. 지성적으로 만들고, 품위있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타고난 외모를 '예쁘고 밉다'라고 표현하지만, 타고난 외모를 하드웨어라면, 미소는 노력여하에 따라 개발 가능한 소프트웨어 이다.
요즘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을 아파트 엘리베이터같은 데서 만나면 어른에게 '배꼽인사'란 걸 하는 것을 본다. 앙징스런 작은 두손을 배꼽 근처에 모으고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절한다. 이런 어린이를 보면, 나는 껴안아주고싶도록 이쁘다는 생각을 한다. 세살 때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한다. 나는 이 참에 어린이들에게 미소교육을 병행하였으면 싶다. 어쩌면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미소를 배우는 일이 인생에 더 유용한 일일지 모른다. 처음부터 남들이 영원히 잊지못할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배운다면, 아이들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다들 어릴 때부터 수선화 라이락 백목련같은 미소를 배웠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얼마나 꽃 만발한 화원처럼 더 밝고 향기로울 것인가. (문학시대 201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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