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동의 이틀 밤
김창현
두류동에 사는 친구 집은 빈 농가를 빌린 것인데, 금 간 벽 황토 바르고, 찢어진 창문 한지 발랐더니, 방이 인물 훤하다. 폐교에서 구한 난로 가져다놓았더니, 산에 지천으로 많은 게 소나무 아닌가. 관솔 타는 향 좋고, 고구마 익는 냄새 근사하다. 집이 초라하니 별이 지붕 위에 아예 수를 놓는다. 공해 없는 곳은 꽃빛이 곱다. 꽃이 그럴진대 사람은 어떨까? 이것이 틈만 나면 내가 지리산을 찾는 이유다.
밤에 명상에 잠겨 보았다. 어둠 속의 산은 고요한 선방(禪房)이다. 바위는 묵언의 참선객 이다. 바람소리 물소리는 범패(梵唄)다. 흔들리는 풀과 나무는 바라춤 무용수다. 지나가는 달과 별은 나그네다. 산이 입선(入禪)의 경지 보여준다. 청산 바라보면 나무잎은 살랑살랑 흔들리고 구름은 흘러간다. '꽃 피고 새 우는 경지' 읊은 고승의 선시(禪詩) 같다. 이것이 틈만 나면 내가 지리산 찾는 이유다.
새벽에 일어나니, 찔레꽃 만발했는데 어디선가 산비둘기 울고 있다. 우리는 아침 상을 바위 위에 채렸다. 천왕봉 빤히 올려다 보이는 그 넓적 바위는 위가 평평하여 칠팔명 앉을 수 있다. 원래 신령한 방장산에선 풀뿌리 나무뿌리를 캐어먹어야 제격이다. 식탁에, 깻잎, 당귀잎, 고구마, 감자, 방울도마도, 야쿠르트와 꿀이 올랐다. 아카시아꿀은 부드럽고 향기롭다. 당귀는 향이 그리 화사할 수 없다. 삼채전도 지져먹었다. 삼채는 히말리야 1400 이상 고지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인삼보다 게르마늄 성분이 많고, 마늘보다 천연 식이유황(MSM) 성분 여섯 배 많다. 잘게 썰어넣은 흑돼지 고기 고소하고, 감자는 사근사근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우리는 이를 선식(仙食)이라 불렀다.
식사 후, 서울서 가져간 꾸지뽕과 가죽나무 묘목 심었다. 꾸지뽕은 당뇨에 특효이고, 가죽 자반은 경상도 사람이라면 죽고못사는 귀한 먹거리다. 남명선생은 두류산 양단수에 도화 뜬 맑은 물을 읊었다. 작년에 심은 복숭아나무는 이제 복숭아가 달렸다. 산 속에 선도(仙桃)가 익어갈 생각만 해도 즐겁다.
같은 약초도 지리산서 자라면 약효가 강하다. 그래 허준과 유의태 선생이 산청에서 살았을 것이다. 몸통에 주름 잡힌 3년근 인삼을 심었다. 금년에 꽃 피고, 빨간 열매 맺힐 것이다. 열매는 새가 먹고 마음 내키는대로 날아다니다 배설할 것이다. 새야 어딘들 못날아 가랴. 지리산 이쪽저쪽에 애기삼 번질 생각만해도 기쁘다.
이 날 우리는 산 속 여기저기서 약초를 캤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자주빛 엉컹퀴 뿌리는 정력 허실한 남자의 보약이고, 도시 주변이나 길 옆, 더러운 물 흐르는 수채 주변에서 흔히 자라는 돼지풀이라 부르는 소루쟁이는 염증이나 암에 특효약이다. 발에 자주 밞히는 질경이는 이뇨에 좋고 혈압 내려주는 약이다. 산에 지천인 산죽(山竹)은 당뇨 특효약이다.
되는 놈은 나무 하다가도 산삼 캔다. 근처에 자주달개비꽃이 많다. 보라빛 그 꽃을 컨테이너 근처에 심었다. 두류동 계곡은 골짝골짝마다 진달래 붉다. 꽃이 날더러 무릉도원에서 살자고 유혹하는 산골의 새악씨 같다. 이런 낙원 외면하고, 꽉 막힌 창고칸 같은 호텔방 선호하는 사람들 뜻을 나는 모르겠다.
오후에 샤워장 하나 만들었다. 대나무 홈통으로 물줄기를 끌어왔다. 약수로 등목을 치다가, 빤쓰까지 홀까당 벗고 은밀한 곳을 세상 구경 다 시켜주었다. 바람은 저 아래 구절양장 구부러진 골짜기에서 불어온다. 우리 나체를 살랑살랑 쓰다듬고, 천왕봉으로 올라간다. 짹짹! 새만 날아다니면서 우리 물건을 볼 뿐, 아무도 보는 이 없다.
저녂엔 생강나무 잎으로 쌈 싸먹고, 줄기는 난로 장작불에 올려 차를 끓였다. 제피 부드러운 잎은 튀겨먹었다. 향긋한 제피 튀김에 삼천포 민어조기의 고소한 배합을 속인들은 모를 것이다. 거제와 남해 두 섬에서 교편 잡았던 오태식 교장은 거제의 알짜배기 대구 고니와, 대구뽈찜 이야기, 남해 갈치 회와 개불 맛, 금오산 밑 동네 전어 이야길 청산유수 읊는다. 그를 높이 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제 철에, 제 장소에 가서, 제 값에 음미한 점이다.
해 지자 달 솟아온다. 단소 꺼내고, 시조 창 듣는다.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거기 내지르는 오교장 창 일품이다. '산촌(山村)에 밤이 드니 먼딋 개 즈져온다. 시비(柴扉)를 열고 보니 하늘이 챠고 달이로다.' 최상무는 '청성곡(淸聲曲)'을 분다. 단소 소리 푸른 산마루에 백학이 날라가는 것 같다. 국창 안숙선씨 남편답다.
다음날 새벽에 산 속 거니니, 천왕봉은 얼굴을 흰구름으로 씻고있다. 사람이 배울 것은 저 맑은 얼굴이다. 물소리와 구름 속에 몇 천년을 앉아있으면 저런 얼굴이 될까.
두류동에서 이틀 밤 이렇게 보내고, 하산하여 경호강 따라 내려가니, 함초롬히 이슬 젖은 절벽에 두견화가 보인다. 꽃빛이 하도 고와 차라리 슬프다. 간밤 두견새는 밤새도록 서편제 토하다 갔을 것이다.
지리산은 온갖 영초에 덮힌 산이다. 생초 쯤에서 였을까. 상경하는 차 속에서 안개 덮힌 산을 되돌아보았다. 내가 지금 뭐하러 공해에 덮힌 서울로 가고있나. 차를 돌리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김창현
손전화; 010-2323-3523
1944년
고려대학교 졸업
문학시대 2007 가을호 수필로 등단
저서; 한 잎 조각배에 실은 것은(소소리). 나는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한국문학방송). 재미있는 고전 여행(김영사) 등
*원고료는 회비로 처리 바랍니다.
'잡지 기고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애심과 송민도/동방문학 4월호 (0) | 2014.08.02 |
---|---|
계수나무 꽃향기 가득한 계림 여행/동방문학 6월호 (0) | 2014.08.02 |
손자와의 저녂 산책/동방문학 2014년 8월호 (0) | 2014.08.01 |
미소/ 문학시대 2010년 3월호 (0) | 2014.05.10 |
나애심과 송민도/동방문학 2014년 4월호 (0) | 2014.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