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클래식이여 안녕! /문학시대 2013년 여름호 특집/수필문학 2013년 년간대표선집

김현거사 2013. 6. 5. 14:46

      

      클래식이여 안녕! 

  편력이라고 할 것도 없지마는, 나의 음악은 트롯트에서 시작되어 트롯트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내고향 진주는 쏘렌토같은 곳이다. 남강에 나가면, <추억의 소야곡>, <애수의 소야곡> 남인수 모창을 항상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서장대에서 쎅스폰으로 불어제끼는 이봉조의 <밤안개>, <떠날 때는 말없이>를 들을 수 있었다. '가요계의 황제'와 '섹스폰의 대가' 두 분 고향이라서 그런지, 진주 사람들은 특히 가요를 좋아한다. 샹레모가 칸소네와 샹숑의 본고장이라면, 콩클대회에 구름처럼 사람이 모이던 진주는 트릇트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사유로 내가 처음 접한 노래는 당연히 트롯트다. 엔간한 가요는 바가지 장단 칠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 앞에서 한번도 트롯트를 부른 적 없다. 원어로 <하이눈>, <돌아오지 않는 강>, <모정>만 불렀다. 당시 국산 영화는 체류탄 영화, 국산 가요는 '뽕짝'이라고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촌사람이 서울 와서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웬수같은 클래식을 만난 것이다. 당시 종로 2가에 <디 세네>와 <뉴월드>라는 음악실이 있어, 미식축구 선배들과 들락거렸는데, 처음 <다이아나>니 <알디라>니 하는 곡들은 제법 알만한 것이었다. 요한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슈벨트의 <보리수>, 이바노비치의 <도나우의 잔물결>,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같은 곡도 마찬가지였다. 감이 오는 곡이었다. 아! 음악실에서 영원히 이런 곡만 틀어주었다면, 그 후에 어떤 촌사람이 겪은 그 고독한 마음의 행로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항상 불거지기 마련이다. 어느날 모차르트와 바그너, 쇼팽을 만난 것이다. 도대채 모차르트의 <협주곡 21번 2악장>,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 쇼팽의 <발라드 제1번>,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6번 제1악장> 같은 곡들은 왜 생겨나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악장은 무엇이고, 서곡은 무엇인가. 무슨 놈의 노래가 가사도 없고, 가수도 없는가. 넘버는 왜 달고 나올까. 도무지 답답하고 사연을 알 수 없었다. 이런 곡들은 한마듸로 딱 질색이었다. 친하고 싶어서 미소를 보내며 접근해도 쌀쌀맞게 돌아서는 친구 같았다. 수치심을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서울 친구들은 달랐다. 그들은 클래식만 나오면 물 만난 고기 였다. 꼬리를 치며 좋아했다. 눈을 지긋이 감고, 무슨 악단장이라도 되는양, 두 손을 허공에 휘두르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클래식만 나오면 유식하고, 나는 클래식만 나오면 무식하였다. 나는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같은 서양악기 삐꺽거리는 소리까지 싫었다. 속으로 사래를 치고 멀미를 하는 판인데, 그들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마냥 즐거워 하였다. 그래 어느 날 나는 모종의 결심을 하였다. 클래식 강좌에 출석한 것 이다. 딱 서너 달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나의 인내심은 폭발하고 말았다. 도대채 클래식이란 놈의 정체가 무엇인가. 연립3차방정식인가. 그건 아무리 난해하고 여려워도 오래 골머리 쓰며 생각하면 어렴픗이 해법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안까님 쓰면 쓸수록 멀어지는 야속한 놈이었다. 애써 이름을 다 외워놓아도, 감동은 낙동강 오리알이다. 재수 없는 놈은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더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 그래 결심하였던 것이다. '에라 이딴 놈의 콩나물 대가리 모른다고 내 인생에 무슨 탈이라도 나느냐?' 나는 클래식에 대한 적의에 불 타서, 과감히 선을 긋고 싹 무시하고 돌아서기로 한 것이다.  

 

 그 후 나는 깨달았다. 원래 나는 산자수명한 고장에서 자랐다. 맑고 고운 자연의 음향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청아한 개울 물소리, 숲속의 새소리, 쓰르라미 소리, 오동잎에 듣는 빗소리를 비롯해서, 소나기 소리, 폭풍우 소리, 얼음 쨍쨍 갈라지는 소리를 잘 기억하고 있다. 이런 소리야말로 가장 완벽한 자연 음향이다. 원음과 인공음의 차이였다. 그에 비하면 서양악기 소리는 불완전하고 조잡한 깽깽이소리 였다. 그걸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실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차라리 우리 악기가 원음에 가깝다. 해금이나 피리 소리가 그러하다. 범도 제 굴에 들어온 토끼는 안 잡아먹는다는데, 제 것 귀한줄 모르고 딴 동네 노래만 미친 년 널 뛰듯 궁둥이 덜썩거려서야 되겠는가. 개미 구멍으로 큰 방축 무너지듯 클래식에 대한 환상은 이렇게 무너졌다. 그제사 구름 지나가면 해를 보듯이 실상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서양식 분장을 하고, 아랫배를 부풀리고 서양식 발성으로 '축배의 노래'나 '싼타루치아'를 불러도 우리가 파바로티나 마리아칼라스 이던가. 오페라 한답시고 맞지 않는 분장을 한 우리의 옷, 우리의 얼굴, 우리의 몸동작은 그리 어색할 수 없다. 항상 눈에 거슬리고 민망하다. 챙피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무리 같은 척, 자연스러운 척 해도, 부자연스런 것은 부자연스런 것이다.    

 

 이렇게 클래식과 홀가분히 이별하고 행복하게 지내다가, 뒤에 나는 또하나 가당치도 않은 벽에 부닥쳤다. 랩이니 소울이니 하는 것들 이다. 나이 들어 부하들과 회식 중에 만난 이 역시 감정도 박자도 가사도 내키는 구석이라곤 쥐뿔도 없었다. 알레르기 대상이었다. 강 건너 등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행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슬그머니 젊은이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변절은 또하나 이마에 냇천자 긋게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문제는 반드시 답이 있는 법. 어느날 나는 논어에서 명쾌한 깨침을 얻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구절이다. 한 세대란 30년을 일컳는다. 30년 지나면 지금 세대도 구세대이다. 모든 세대는 공존의 가치가 있고, 옛 것 보존한다고 탈 나는 법은 없다. 자기 세대를 버릴 이유는 하처에도 없었다. 김치는 김치고, 빠다는 빠다다. 동서양의 차별 그 자체가 언어도단이던 것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含含) 하다며 좋아한다. 그 후부터 나는 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애수의 소야곡>, <해운대 엘레지>, <장미빛 스카프> 같은 곡 이다. 그 얼마나 고고한 선택이며 지조인가. 그러다 다행히 뿌리에 서광이 비치는 때가 왔다. <소녀시대>니, <비>니 하는 가수들이 나타나서 동서양을 휩쓸어버리자 원이 풀린 것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들의 선배는 누구인가. 뿌리는 어디인가. 근원적 뿌리가 트롯트인 것은 아무도 부인 못할 것이다. 과연 용기있는 자는 성공을 얻는 법이다. 드디어 광명천지가 온 것이다. 그 후 나는 자랑스럽게 내 노래방 십팔번을 트롯트로 고정시켰다. 맘 놓고 <클래식이여 안녕!> 클래식과는 작별인사를 고해 버렸다.  

  

 

김창현

남강문학회 부회장

청다문학회 회장

 

등단지 문학시대

문학시대 2013년 여름호에 게재  

 

*2013 연간대표수필선집 5권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