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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의 외출

김현거사 2013. 12. 26. 17:37

 

       눈 오는 날의 외출

 

 

 모처럼 서울 나들이 나갔다가 폭설을 만났다. 날씨가 포근해서 후드 없는 옷을 입고 나갔는데, 거기가 대관령이라고 착각을 했는지 하늘이 작심한듯 폭설을 퍼붓는다. 강남구청역 지하철 입구 앞이 온통 눈세상이다. 하늘은 분분히 나리는 눈으로 완전히 보이지않고, 평소 매연을 덮어써 몰골 사납던 가로수는 하얀 코트로 갈아입었다. 어느새 우아한 미인이 되어 팔을 벌이고 남자 유혹한다. 멀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둘이 가보자고 한다. 이럴 때는 일상적인 일은 무조건 뒤로 미뤄야 한다. 즉시 같이 어딘가로 내빼야 한다.

 

 거기서 한 불록 떨어진 곳에 청담공원이 있다. 거긴 우리 고교 동기생들이 매 토요일 족구를 하는 곳이다. 약수터가 있고, 숲길이 있고, 항시 앉아서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벤치가 있다. 칠순도 이런 때는 잠시 주책스러워야 한다. 우선 좌판에서 따끈한 캔커피 한잔 뽑는다. 포켙 속에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 확인한다. 석양에 말 한필에 의지하여 떠나는 서부의 건맨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허리는 쌍권총이요, 입가는 씨가레트 아니던가. 눈 오는 공원을 거니는 노인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담배다. 흡연자를 보면 공연히 눈을 흘기는 부인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19 세기 세느강변에서 긴 장죽 끝에 담배를 꽂아 즐기던 마담들보다 덜 요염하고 매력적이라고 탓한 적 없다. 흑요석같이 매혹적 눈빛도 아니고, 재치 해학에 찬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고 탓한 적 없다. 그들도 아름다운 설경 속을 혼자 거니는 이쪽에게 가당찮은 편견을 보내지 말았으면 싶을 뿐이다.

 

 눈 속에 먼 추억 떠오른다. 첫눈 내리면 꼭 신촌 로타리로 달려와서 포장마차로 불러달라고 요청한 소녀가 있었다. 그는 서울 올라온지 3개월된 진짜 풋내기 이대 신입생 이었다. 고향이 광주였던걸로 기억된다. 잊을 수 없는 장소는 중앙청 앞의 설매(雪梅)대방 이다. 그와 나는 그 다방 구석에 죽치고 앉아서 그야말로 밤 늦도록 인생의 허무와 죽음을 이야기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순진한 둘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우리가 세상 어느 누구보다 심각한 줄 알았다. 데이트 끝나고 세검정에 있던 그의 집까지 눈을 맞으며 걸은 적 있다. 누구나 젊은 시절은 러브스토리 주인공이다. 감미로운 음악 주인공이다. 그러나 눈 오는 공원에 한 젊잖은 노부인이 나타나 추억 속 노인의 손을 잡는 그런 러브스토리는 없다. 음악도 없다. 이 무슨 애달픈 이야기인가. 눈보라 속에 감미로운 추억만 흩날릴 뿐이다. 20분 청담공원을 산책한 겨울나그네는 혼자 양재역에서 광역버스로 수지로 돌아갔다. 지하철은 무료지만, 땅 속은 '용수고속도로'의 설경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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