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풍경과 글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김현거사 2011. 4. 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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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08:52:58)
수정일
2009-12-31 (08:57:34)
글제목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
   

쌍계사에 가면 최치원의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가 있습니다.한번 천하문장 최치원의 문장 어떤가 직접 그 맛을 알고싶었으나,글 내용 해설이 없어,매양 탑을 받친 거북이 모습과 세월에 깨어진 탑만 보면서 겉만 보고 내용은 몰라 안타깝기만 하였다.

우연히 어떤 고사의 해설 만나 눈을 크게 뜨고 반갑게 그 글을 읽어보니,비석이 깨어져 몇자씩 자구가 깨어져나가 빠져있고 고사에 대한 자세한 주석도 없어 뜻이 애매한 곳도 있었지만,문장이 마치 흙속에 묻혔던 주옥처럼 그윽하고 깊은 광채가 있었다.문장이 좀 길지만,반가운 김에 난초처럼 향기롭고 높은 풍격의 최치원의 문장을 여기 소개합니다.

 

 

 

대개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은 국토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인도의 교를 믿어 불자가 되기도 하고, 중국의 글을 배워 유자가 되기도 한다. 반드시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몇 나라 말의 통역을 거치면서 학업에 종사하는데, 목숨은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로운 땅에 달려 있어, 빈 속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와, 처음은 어려웠지만 뒤에 많은 것을 얻는 것이다. 마치 옥을 캐는 사람이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탐색하는 사람이 여룡의 동굴의 깊음을 사양하지 않는 것과 같이 해야만 마침내 불타의 지혜로운 횃불로써 빛이 오승을 융합하고, 선유의 아름다운 반찬으로 맛있게 육경에 배불릴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투어 선에 들게 하고, 온 나라로 하여금 능히 인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런데 배우는 자가 혹 말하기를,

불타와 공자가 설립한 교는 두 개의 흐름과 상이한 체재로써,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듯 상호 모순된 채 한 귀퉁이만을 지키고 있다. 라고 한다.


시험삼아 이를 논해보리라.

시를 설명하는 사람은, 문으로써 사를 해치지 말고 사로서 지를 해치지 말라고 하였다.

예기에 이른 바와 같이 말이 어찌 한 갈래만이리오? 무릇 각각 해당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까닭에 노봉의 혜원은 논을 지어,

석가여래와 주공?공자는 불발은 비록 다르나, 귀착한 곳은 하나이다. 지극한 이치를 체득함에 있어서 양자에 겸응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물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심약은 이르기를, "공자는 그 단초를 개발하였고, 석가는 그 극치를 다하였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그 대체를 아는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며, 비로소 지극한 도를 함께 이야기할 만하다고 하겠다.

불이 심법을 말함에 이르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이름 짓고자 해도 이름 지을 수 없으며, 설명하고자 해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月]을 얻고 달을 가리킨 손가락은 잊게 된다 하더라도 마침내 바람을 잡아 묶는 것 같으며 그림자처럼 붙잡기 어렵다. 그러나 먼 곳에 오르자면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비유를 취한들 무슨 잘못이 있으리오?

또 공자가 뭄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않고자 하노라,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하였다. 이는 곧 정명이 문수에게 말없이 대함이요, 불타가 가섭에게 말없이 전함이니, 수고롭게 혀를 놀리지 않고도 능히 마음을 전하는데 들어맞는 것이다. 하늘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것[말]을 두고서 무엇을 좇아 나아가리오?


그런데 능히 멀리 현묘한 도를 전해 널리 우리나라를 빛냈던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 이분이시다.

선사의 법위는 혜소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그의 선조는 한족으로 산동 지방의 벼슬아치 집안이었다. 수나라 군대가 요동을 정벌하다가 많은 사람이 xx에서 죽게되자 그중에 뜻을 곱히고 우리 백성이 된 자들이 있었는데, 당나라 때에 이르러 사군이 통일됨에 (선사의 집안은) 지금의 전주 김마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름이 창원으로, 가정에 있으면서 출가의 수행을 하였다. 어머니 고씨가 일찍이 낮에 가수를 취하는데, 꿈에 한 범승이 이르기를, "저는 아미(방언에 '어미'를 이르는 말)의 자식이 되기를 원하옵니다"하고는, 이에 유리항아리에 의탁하더니, 오래지 않아 선사를 배게 되었다. 태어나면서 울지 않았으니, 이는 일찍부터 소리를 낮추고 말을 잘하지 않는 좋은 싹을 보인 것이다.

나중에 이를 갈 나이가 되자, 노는 데에도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을 삼고 꽃을 꺾어 공양을 삼았다. 간혹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해 그림자가 옮기도록 일찍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는 좋은 자질[선본]이 정녕 북천겁 이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 수 있으니, 발돋움을 해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땋은 머리 아이적부터 관을 쓴 어른이 되도록, 그 뜻이 부모님의 은혜 갚은데 간절해서 잠시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고, 또 한 뙈기의 땅도 없어 농사지을 방법이 없었다.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을 오직 노력 그것에 의지하였으니, 이에 생선을 판매하여 조석 봉양을 마련하는 직업으로 삼았다. 손은 그물을 엮는 데에 수고롭지 않고도 마음은 벌써 물고기를 얻는 일을 깨달아서, 능히 음식 지공의 자료를 풍성케 하여 진실로 효성을 다하는 옛 노래에 들어맞았다.

길러주신 은혜는 힘으로 갚아야 하지만, 오묘한 진리를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리오? 내 어찌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의 나이에 발자취를 묶어 두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원정 20년(804년)에, 세공사에게 나아가 뱃사람이 되기를 구하여 서쪽으로 가는 항해에 발을 붙였다. 여러 가지 비천(鄙賤)한 일에 능하였으며, 험로를 평지같이 보았다. 자비의 항로를 저의 고통의 바다를 건넜다. 피안[중국]에 도착함에 미쳐 우리 사신들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각 뜻이 있으니, 여기서부터 헤어질 것을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떠나가 창해에 이르러, 신감대사를 뵙고 몸을 던져 절을 반쯤하였을 때 대사가 반가운 듯, "어쩌다 이별한 지 오래지 않았는데, 기쁘게도 다시 서로 만났구려"하였다. 즉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게 함에, 그 자리에서 곧 인계를 받아, 마치 불길이 마른 쑥에 붙고 물살이 낮은 언덕으로 흫르는 듯 하였다. 승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누나!"하였다.

선사의 얼굴이 검었던 탓에, 무리들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사'라고 하였다. 이는 곧 현묘함을 찾고 묵묵함에 처하여 정말로 흑도인의 후신이라고 하겠으니, 어찌 읍중에 살던 얼굴 검은 자돌?이 능히 뭇ㅎ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일에 비교될 뿐이겠는가? 영원토록 붉은 수염의 불타 파란 눈의 달마와 더불어 색상으로 드러내 보일만한 것이다.

원화 5년(810), 숭산의 소림사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이는 곧 어머니의 지난날 꿈과 부절을 합친 듯이 완전히 들어맞았다. 이미 계율의 구슬을 빛내고 다시 학사에 돌아옴에,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서, 홍색이 서초보다 붉고 청색이 감초보다 푸르듯이 스승보다 더 뛰어났다. 그러나 비록 고인 물같이 맑은 마음을 가졌지만 조각 구름같이 떠 다니는 신세였다.

지난번에 신라의 승 도의가 먼저 중국 땅에 도를 찾아왔었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뜻에 맞았으니 서 남에서 벗을 얻은 것이었다. 서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면서 불타의 지견을 밝혀보다가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감에, 선사는 곧바로 장안의 종남산에 들어갔다. 만길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송실을 먹으면서, 망상을 잊고 만유의 진리를 관조하면서 고요히 3년을 지냈다. 그런 뒤에 자각봉에서 나와 서방으로 통하는 길에 이르러, 짚신을 삼아서 널리 베풀었다. 바쁘게 또 3년을 지냈다. 이에 고행은 이미 닦였으며 다른 지방도 또한 벌써 유람한 터였다.


비록 萬有 空임을 보았다고 하지만 어찌 근본을 잊으리오? 이에 태화 4년(830) 고국으로 돌아왔다.  선사께서 크게 깨우친 대승의 진리가 仁域[우리나라]을 비추자, 흥덕대왕께서 어필을 날려 맞이하며 위로하시면서, 도의선사가 지난번에 돌아왔는데 선사[上人]가 뒤이어 이르니 두 보살이 되었구려. 옛날에 흑의를 입은 두 호걸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 옷을 입은 두 영재를 보는도다. 하늘 가득한 자비로운 위엄에 온 나라가 기뻐 의지하니, 과인은 장차 마땅히 동쪽 계림의 영내로써 길상가득한 삶의 터를 이룩하리라.하였다.

처음에 상주의 노악산 장백사에서 기거함에, 명의 집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 같아'T다. 방장이 비록 넓었으나 물정이 저절로 좁게 여겨져서,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렀다. 두어 마리의 호랑이가 있어서 으르렁거리면서 앞길을 인도하였는데, 위험한 길은 피하고 평탄한 길로 가니 길잡아 주는 사람과 다름없었다. 따르던 사람들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가축이나 다름없이 여겼다. 이는 즉 보아외 삼장이 영산에서 하안거를 틀 때 맹호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여 산의 동굴로 깊숙히 들어가 석가모니의 입상을 본 것과 사적이 완연히 같다. 저 xxx가 졸고 있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려 불경소리를 듣게 한 것 또한 승사에 유일하게 아름다운 사적만이 아니다. 이에 화개골에 있는 옛날 삼법화상이 세웠던 절의 옛터에 당자를 다듬어 꾸미니 엄연히 화역[사원]이 되었다.

개성 3년(838)에 이르러, 위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그윽한 자비에 깊이 의탁하고자, xx를 내리고 재비를 두어 따로이 발원하는 것을 보기를 구하였다. 선사는 "선정을 부지런히 닦는 데 있거늘, 무엇 때문에 따로 발원하리오?"라고 말하였다. 사신이 왕에게 복명하자, 이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선사가 색 공 둘 다 해소되고 정혜[]가 함께 원융하였으므로, 사신을 보내 '혜소'라는 호를 하사했는데 성조의 묘휘인 '조'자를 피하여 조를 소로 바꾸었다.

이에 대황룡사에 적을 두게하고 서울로 오도록 불러'T다. 사신들이 오고가는 것이 고삐가 길에서 교차하듯 하였지만, 산처럼 우뚝 서서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화가 원위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해도, 대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그윽한 곳에 처해서 고상을 기른 것이 시대가 다르지만 똑같은 취지이다.

수년을 거처함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벼 삼[]처럼 열을 이루어 거의 송곳조차 꽂을 땅이 없었다.

드디어 기이한 곳을 두루 찾아보다가 남영의 기슭 땅을 얻으니, 상괘하여 거처하기에 매우 알맞앗다. 선방을 지음에, 뒤로는 노을진 못부리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구름 덮힌 위수를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해주는 것은 강 건너의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스럽게 해주는 것은 돌틈에 솟구쳐 나는 듯한 물줄기였다. 봄날 시냇가에 핀 꽃, 여름 산길에 우거진 소나무, 가을밤 계곡에 뜬 달, 겨울 산마루를 덮은 눈같은 것은 사철에 형태를 바꾸고, 만상이 빛을 나누며, 온갖 자연의 소리가 화음을 이루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을 유람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모두 놀라 바라보며 말하기를,

혜원의 동림사가 우리 땅[해표]에 옮겨 온 듯, 연화세계를 평범한 상상으로 비겨볼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있는 별천지라는 말은 믿을 만하다. 라고 하였다.

대나무를 걸쳐서 물길을 끌어다가 계단을 둘러 사방에 흐르게 하고는, 비로소 '옥천'으로 사호를 삼았다. 법통을 손꼽아 본 즉 선사는 혜능[조계]의 현손이었다. 이에 육조의 영당을 세우고 흰 담장을 채색으로 장식해서, 중생을 인도하고 깨우치는 데 널리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법화경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해'라고 한 까닭에 여러 상에 색을 섞어서 그렸던 것이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녘에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공이니, 나는 장차 떠나리라. '한 마음[一心]'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을 세워 내 형체를 간직치 말고, 명을 지어 내 행적을 기록치 말도록 하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 앉은 채로 돌아가시니, 속세의 나이로는 77이요, 승이 된지 41년 만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솜털구름 한 점 없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홀련히 일어나고, 범 이리가 울부짖고 삼나무와 향나무가 변하여 시들었다. 잠시 후에, 자주 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있었는데,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누구할 것 없이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이로 보면, 양사에 실려 있는 바 시중 xx이 일찍이 승에게 청하여 어머니의 병을 위해 복을 빌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 것은 성신이 감동하고 명귀가 감응한 것이므로, 어찌 속이는 말이라고 하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들은 소식을 전해서 조문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울었다. 하늘과 사람이 애통해 하고 추모하고 있음을 단연코 알만하다.

관곽과 수도를 미리 준비해서 갖추도록 했었으므로, 제자 법랑 등이 울부짖어며 시신을 받들어 하루를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무덤으로 장사를 치렀으니, 그의 유명을 따른 것이다.

선사는 성품이 소박함을 흐트리지 아니하고 말씀은 기교를 부리지 아니하였으며, 헌 솜옷이나 삼베옷을 따뜻이 여겨 입었고 싸라기를 달게 여겨 먹었다. 상수리와 콩을 섞은 밥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를 넘지 않았다. 귀인 달인이 때때로 찾아왔지만, 일찍이 찬을 달리하지 않았다. 문인들이 먹기에 힘들다하여 바치기를 어려워하면, 곧 "마음이 있어서 여기에 온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하였으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늙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을 대접하는데 한결같이 하였다. 매양 왕사가 역마를 타고 명을 전하면서 멀리 법력을 기원하면 곧,무릇 왕토에 살며서 불일을 머리 위에 인 자로, 어느 누가 호념에 마음을 기울여 임금을 위해 복을 모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또 하필이면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외람되게도 멀리 윤음을 전하십니까? 역마를 타고 온 사람이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 없으니, 아! 염려할 일이로다.


혹 호향을 선물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질그릇에 화롯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없고, 마음을 정성되게 할 뿐이로다"하고, 또 한약을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땔나무로 돌솥에 불을 지펴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습속에 따르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평소에 범창을 잘하였는데, 그 소리가 금 옥과 같았다. 곡조를 빗겨서 소리를 날리면 상쾌하고 슬프고 완곡하기도 하여, 능히 천상계의 모든 신불[제천]로 하여금 기쁘게 하고, 길이 먼 지방에까지 흘러 전해짐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당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어산의 묘음을 익히고자 하는 자들이 다투어 코를 막고 배웠듯이, 옥천사의 진감선사가 남긴 소리를 본받고자 한다. 이 어찌 성문으로써 그들을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의 열반은 문성대왕조에 해당하는데, 임금이 마음에 측은하여 장차 망xx은 익호를 은총을 표하려다가, 선사의 유언을 듣고 나서는 부끄러워 그만 두었다. 36년이 지난 뒤, 문인들이 강산이 변할까 염려하여 불법을 흠모하는 제자들에게 불후의 인연을 청해옴에, 내공봉일길간 양진방과 숭문대의 정순일이 두 마음 굳게 합쳐 비명을 세길 것을 건의하였다. 헌강대왕이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참된 종지를 우러러하여 '진감선사'라고 추일하고, 대공영탑에 전자를 샛길 것을 허락하여 영원히 영예로 마치게 하였다.

 

아름다워라! 태양은 양곡에서 솟아나와 으슥한 곳에도 비추지 않음이 없고, 해안에 향을 묻으니 오래될수록 더욱 향기롭구나!

 

어떤 이가 말하길, 선사께서 명을 짓지도 탑을 세우지도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뒷날 제자들에 이르러 스승의 뜻을 확실하게 받들지 못하니, 그러기를 임금에게 구한 것인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신 것인가? 결국 흰 구슬[白珪]에 흠집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한다.


슬프다! 비난하는 자 또한 틀렸도다. 이름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이름이 빛나는 것은, 대개 정력의 남은 결과다. 그 재처럼 없어지고 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어찌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때에 하여 명성이 대천세계에 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겠는가?

그런데 龜趺가 아직 비석을 등에 이기도 전에 왕이 갑자기 승천하였다. 금상이 잇따라 즉위하여, 원?호 가 서로 응답하듯 부탁한 일에 뜻이 맞아 좋은 일이 그대로 따랐다.

이웃 산의 절 중에 옥천사라고 부르는 것이 있어, 이름이 중복되어 뭇사람들의 귀에 혼란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에 나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라야 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 절이 위치한 곳을 살피게 하니, 절의 문이 두 줄기 위수에 임해 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쌍계사'라고 이름을 지어 하사하시었다.  그리고 거듭 이 하신에게 명하시기를, "선사께서는 행적으로 이름이 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벼슬에 나왔으니, 마땅히 명을 짓도록 하라"하셨다. 나 치원은 배수하면서,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물러나 생각해보니, 지난날 중국에서 이름을 얻어 장 구 사이에서 살진 것을 씹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해보지는 못했으니 오직 깊숙히 우물 안의 깨어진 벽돌 사이에서 뛰어노는 개구리같아 부끄럽다. 하물며 불법의 진리는 문자를 떠난 지라, 말을 붙일 만한 곳이 없다. 굳이 혹 말한다해도, 북을 向해야 할 수레가 남쪽의 x정(?)으로 가는 격이다. 다만 국왕의 외호와 문인들의 대원으로, 문자가 아니면 여러 사람들 눈에 밝힐 수 없어서, 드디어 감히 명을 짓고 쓰는 두 가지 일에 종사하여 날다람쥐처럼 없는 재주나마 힘써본다. 비록 돌은 믿을 만하여 가히 부끄럽고 가히 두려우나, 道란 억지로 이름한 것이니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르리오? 붓자루를 멈추고 붓끝을 감추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거듭 앞서 말한 뜻을 펼쳐, 삼가 명을 엮는다.


입다물고 고요히 명상하며, 불타에게 마음을 돌린다네.

근본이 보살에 익숙했으매, 오직 한 평생 불법만을 넓혀왔네.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었고, 멀리 고래 물결 건넜도다.

가서 비인을 전해 받고, 와서는 斯羅[신라}를 교화시켰다네.

깊숙한 곳 찾아가 승경을 골라서,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다오.

물달을 보고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 샘물에 흥을 부쳤지요.

산은 성품에 더불어 고요하고, 속은 범패와 함께 응답하네.

외경에 부딪쳐 막힘에 없었으니, 機心을 없앤 것 이로써 증명되지요.

도로써 다섯 임금 협찬했고, 위엄으로 많은 요괴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 드리우고, 드러나게 아름다운 부름 거절했네.

바닷물이 저절로 물결쳐 움직이나, 산이 어찌 동요하리오.

사념이 없고 심려가 없으셔, 다듬지도 않고 아로새기지도 아니했지요.

음식에 두 가지 반찬 없었고, 복장은 반드시 갖추는 일 없으셨지요.

비바람 그믐밤같은 속에도, 시종이 일치했다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계의 기둥 별안간 무너졌도다.

洞준은 처량하고, 煙蘿는 초췌해졌네.

사람은 갔으나 道는 남아서, 끝끝내 잊을 수 없으리.

上士가 소원을 개진하니, 대왕께서 은혜를 베푸셨네.

燈은 해역에 널리 전하고, 탑은 돌로서 높이 솟았네.

수천겁의 세월이 흘러도, 松門에 길이 빛나리라.

光啓三年(887) 七月 日에 세움 僧 奐榮 글자를 刻함.


 

2009.12.31(15:10:56) 수정 삭제
이 긴 문장을 올렸구먼
이 비는 국보이거늘 뭇 사람들이
욕심을 낼만 한 것이지
유 두류산(최석기 번역)에 원문과
번역문이 모두 있거늘

2009.12.31(22:19:06) 수정 삭제
어려운글 읽는다고 혼났다 ㅎㅎㅎㅎ

2010.01.01(07:42:41) 수정 삭제
영숙아!솔직해서 조타.나도 좀 어렵더라.그러나 천하문장 최치원의 글 직접 읽어보니,(나도 글을 쓰지만)
정말 명문장이라는 말이 실감가더라.최치원 이 글은 아예 외워삐라.그러면
자네가 최근 관심 가지고 시작하고 있는 글쓰는 걸 어케 하는지 감이 올끼네.

2010.01.01(16:55:50) 수정 삭제
쌍계사... 무척 좋아하는 절인데. 혜소선사비가 있어서인가 보다.
비명인 전자는 최치원이 직접 쎴고....
어려운 내용, 또한 희방사전설... 잘 소개해주어 도운이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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