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흔적

김현거사 2013. 4. 29. 10:39

  

 

     <흔적>

 

  밀짚모자를 쓴 소녀가 은초록 귀리밭에서 들꽃을 꺽고 있다. 옷깃의 흰 레이스가 바람에 나부낀다. 들판의 낮은 흰구름은 정답다. 파라솔을 든 여인이 보인다. 모자에는 꽃이 꽂혀있고, 목엔 진주목걸이가 걸려있다. 이런 수채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60년대에 <안개 낀 밤의 데이트> <부베의 연인> <금지된 장난>이란 곡이 있었다. 이런 기타 곡을 들으면, 금방 애잔한 추억의 오솔길로 빠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수채화를 좋아하는 사람, 옛곡을 못잊는 사람을 사랑한다. 고향 이야기, 학창시절, 군대 시절 이야기 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사람은 별같은 존재이다. 서로는 수십광년의 먼 거리로 떨어져 있다. 닥아가면, 저마다 가치관 다르고 취향이 다르다. 감성 다르고, 지성이 다르다. 인생관 다르고, 자연관 다르다. 서로는 수많은 강과 산으로 막혀있다. 같은 취향의 사람을 만나도, 거기에도 담이 있고, 벽이 있다. 성(性)이 담이요, 년령이 벽이다. 그래서 감정의 길이 막힌다.

 불가에 맹구우목(盲龜遇木), 침개상투(針芥相投)라는 말이 있다. ‘맹구우목’은 태평양 깊은 바다에는 눈이 퇴화되어 앞을 볼 수 없는 나이 오래된 거북이 이야기다. 이 거북이는 삼천년에 한번 수면위로 올라와서 코로 공기를 마시고 다시 바다 밑으로 들어간다. 그때 공교롭게 난파선에서 떨어져 나온 판자때기 하나가 있다. 거북이가 올라와 그  판자에 나있는 옹이구멍에 머리가 쏙 들어가는 그 확률을 말한다. ‘침개상투’라는 말은 지상에 있는 한알의 겨자에, 하늘에서 떨어진 침이 정통으로 맞아 겨자가 꿰일 수 있는 확률을 말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침이 겨자씨를 맞히기도 어렵겠거니와, 운이 좋아 맞힌다 해도, 둥근 겨자는 빗맞아 대개 튕겨 나간다. 그러므로 침봉이 겨자에 꿰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가설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만남이다. 쉽고 간단히 맺어진 인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인연은 이처럼 어렵다.

  정서의 만남 소중함을 알고, 인연의 어려움 안다해도, 현실은 여의치않다. 세상에는 수채화같은 여인, 음악같은 여인, 시같은 여인이 어딘가 있다. 그들이 내 곁이라고 언제 한번 스쳐가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단한번도 내가 이들에게 맘 놓고 다정한 표현을 보낸 적 있던가. 나는 이 세상의 대부분 무덤덤하고 몰취미한 사람들이 하는 그대로만 했었다. 밑바닥 뜨거운 용암을 감춘 휴화산 이었다. 딱 한번 어느 여인에게 그 흔적을 보인 적  있다. 어느 출판기념회에서다. 나는 초면인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동기들이 교수님 시를 다 좋아하는데, 여기서 만났으니, 대표로 우리 악수나 한번 합시다.'이것이 나의 변이었다. 안동 출신 그분은 역시 시인다웠다. 다정한 미소가 답이었다. 이것이 내가 범한 일생일대의 쾌거요, 범죄인 셈이다. 

  나이 들면서, 밤하늘 유성을 바라보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우선 영원한 우주 속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생각한다. 별과 사람은 동일한 운명이다. 수백년 전에 사멸한 별이 보낸 빛이 지금 내 곁을 스쳐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을지 모를, 소년 시절 내 마음의 흔적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유성마냥 슬프고 아름다운 존재인지 모른다. 슬픈 흔적을 서로 사랑해야할지 모른다. 적어도 유성처럼 아름다운 포물선은 남기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다. '산은 구름을 탓하지않고, 물은 굴곡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래 나는 결심을 굳혔다. 지금부터라도 이 세상 무덤덤한 사람들 노선에서 과감한 이탈을 감행하자고. 

 




Claude Ciari guitar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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