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마지막 직업

김현거사 2013. 6. 23. 21:12

        

        

             마지막 직업 

 

  살면서 세가지 직업을 가졌다. 신문기자, 기업인, 교수 이다. 기자는 '사회의 목탁'이 되고싶어서, 기업인은 '목에 풀칠' 할려고 선택한 직업이다. 대학교수는 우연한 계기로 얻은 '행운직'이다. 동양 고전을 소개한 책을 냈는데, 그걸 읽은 어느 강원도 소재 대학 학장이 초빙한 것이다. 미련하고 우둔한 사람이 살아온 궤적치고는 대견하다 싶다. 그런데, 밤송이 우엉송이 다 밟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후에, 마른 쑥 모기불처럼 내면으로 모락모락 소리 없이 타들어가는 또 하나 꿈이 있다. 산촌에 들어가서 사는 꿈이다. 

 나는 애초부터 철이 덜 든 사람이다. 20대 초반에 부모님 애간장을 무척 썩였다. 군대 제대하자, 대학교 복학을 팽개치고, 욕지도로 갔다. 욕지도 옆에는 초도(草島)란 섬이 있다. 그곳이 나에게는 유토피아처럼 보였다. 거기 푸른 파도가 있고, 젖어 보석처럼 빤짝이는 몽돌밭이 있다. 땅에 붉은 카펱을 펼치듯 동백꽃 떨어지는 숲이 있다. 나는 그 속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싶었다. 오직 영문 성경 한권과 원고지만 있으면 된다 생각했다. 숲속에 춘난만 있으면 된다 싶었다. 바다 속에 소라와 미역만 있으면 된다 싶었다. 섬은 나의 성당이었다. 나는 수도원의 성자처럼, 자연과 신(神)을 섬기는 생활을 꿈꾸었던 것이다.  

  젊을 적 그 기질 어디 가겠는가. 한 잎 조각배 저어 세상의 모진 풍파 속을 정처없이 떠돌다가 은퇴한 지금도, 그 뿌리는 남아있다. 철 없는 사람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이 모양이다. 이번에는 걸핏하면 지리산으로 이사 가자는 말로 아내를 긴장시킨다. 우선 초야에 묻히려는 심정을 노래한다. '평생 도시에서, 부귀영화는 아닐망정, 하고싶은 일은 다 해보고 살지 않았는가. 노후는 초야로 돌아가 조용히 살자. 때를 아는 것이 군자의 처신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도 있다’고 한다.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고, 상황버섯 산삼같은 귀한 약재가 많고, 산마늘 곰취 고사리 등이 자란다. 봄이면 고로쇠 수액이 나오고, 가을이면 곶감이 흔하다. 산이 후덕하여, 입산하면 사람이 굶어죽지 않고 스스로 살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채우려고 바둥바둥 애쓰는 삶을 살지 않았느냐. 이제부터는 마음 비우고 산에 들어가, 돈 걱정, 세상 걱정 잊고, 편안히 살자.'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최근 인터넷에서 지리산 밑의 아담한 한옥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건평 25평에, 별채 황토찜질방 다섯평이고, 산 밑에 호수가 있다. 내부는 목조였고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눈이 번쩍 띄었다. 우선 황토방부터 맘에 쑥 들었다. 원적외선 나오는 뜨껀뜨껀한 황토방 찜질로 노폐물을 훔뻑 땀으로 빼는 일 보다 건강에 좋은 일 있는가. 먼저 향긋한 장작불 냄새와 군밤 군고구마부터 생각났다. 위치가 중산리(中山里)니, 집 자체가 이미 산속이다. 공기는 말해 볼 것도 없다. 흔히 사람들은 호사스런 집이나 외제차를 좋아하지만, 뭘 모르는 이야기다. 정작 천만금 가치를 지닌 것은, 공기와 물이다. 그 좋은 공기와 산삼 썩은 물, 무진장한 곳이 지리산 밖에 더 있는가. 원래 꽃이 아름답게 피려면 공기가 맑아야 한다. 서울꽃과 산꽃은 꽃빛부터 다르다. 향기도 차이가 난다. 시원한 봄바람에 연분홍꽃 흐드러지게 피운 산벚나무가 가지를 뒤채며 흔드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그 싱그러운 공기를 시중의 향수와 비교하겠는가. 꽃이 그럴진대 사람은 어떻겠는가. 첩첩 산이 보이는 밑에 그림자 드리운 작은 호수가 있다. 산과 호수는 아침 저녁 엷은 안개로 비단 스카프 둘러 멋을 부린다. 이 속을 학처럼 한가로히 거닐고 싶다. 밤이면 별들은 지붕 위에 은구슬을 뿌린다. 달은 하얀 창호지에 대나무 그림자를 그리다 지운다. 이 속에서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다. 바람도 산바람은 다르다. 솔바람은 향기롭기 그지없고, 풍경소리는 은은하기 그지없다. 물도 산 물은 다르다. 개울가 새벽 물소리는 주변을 더 고요하게 만든다. 천지를 참선에 들게 한다. 이때  홀로 우는 놈은 풀섶의 벌레다. 찬 물 세수 후, 하루 30분이라도 명상에 잠기고 싶다. 전기불이 환하여 밤에도 달빛이 뵈지 않는 도시를 떠나자. 산속에 살면, 아마 수명이 20년 더 연장될 것이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하지 않던가. 도(道) 역시 자연을 본받는다고 한다.' 산속의 정취와 노자의 사상까지 거론하며 인간 최종 귀의처가 자연임을 역설한 건 아마 골백번 넘을 것이다. 그러나 꽃 친구하고, 달 친구하고, 자연을 느끼며 살자는 이런 취지는, 한마디로 무슨 산까마귀 꺅꺅 우는 소리 그리 요란한가 싶은 모양이다. 자기 위하는 척, 무공해 텃밭이나, 수도세 내지 않고 펑펑 맘대로 쓸 산삼 썩은 물의 실리를 내세워도 마이동풍이다.

 오호라! 구룡소 용이 아무리 여의주를 어룬들 무엇 하랴. 떡도 못얻어 먹는 제사에 무르팍 벗어지도록 절만 한 셈이다. 우리 집 보살님은 여전히 염화시중의 미소를 띄울 줄 모른다. 마지막 직업으로 수필가가 된 남편이, 도연명처럼 전원으로 돌아갈 기회를 전혀 주지 않을 낌새다. 그래 이제 나는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지리산(智異山)이 원래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온 산이다. 문수보살님께 소원성취 기도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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