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자책· 수필

가장 사랑할만한 꽃

김현거사 2013. 2. 5. 10:30
     가장 사랑할만한 꽃

 

  

  어릴 때 우리집은 마당이 넓었다. 봉선화 채송화 백일홍 맨드라미 분꽃 과꽃 접시꽃 초롱꽃 나팔꽃 국화 코스모스 달리아 칸나 등 좋다는 꽃은 다 피었다. 지금은 하이비스커스니 시크라멘이니 외래종이 판을 치지만, 사람도 어릴 때 친구가 그렇듯, 꽃도 옛꽃이 반가운 법이다. 그러다 어느 날 40년 단골 꽃집이 있을 정도로 꽃집 들락거려으니, 이젠 나도 남들처럼 평생 가장 사랑한 꽃이 무엇인가 한번 정해보자는 생각이 든다. 

  주렴계는 애련설(愛蓮說)을 썼으니, 연꽃을 가장 사랑하였다. '동쪽 울타리 국화를 꺽으며 남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採菊東籬下悠然見南山)' 했으니,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하였다. 대원군은 바위 사이 핀 난초를 많이 그렸으니 난초를 사랑하였고, 두향(杜香)이를 그리며 매화시첩에 91 수의 매화시를 남긴 퇴계는 매화를 사랑하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영랑은 모란이 생각난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가 가는 길에 뿌리오리다' 소월은 진달래가 생각난다.

  살면서 이들 시인묵객 영향을 받았다. 주렴계의 연꽃을 찾아 광릉 봉선사, 양수리, 함양 상림에서 백련 홍련 촬영에 열 올리고, 연잎밥 먹고, 연꽃차를 음미하기도 했다. 도연명이 사랑한 국화는, 눈을 밝게 해준다는 국화차도 마시고, 야생 감국(甘菊)을 구해와 석부작 만들고, 가을이면 자색 주황빛 대륜국화를 사와서 감상한 후 뿌리를 뜰에 심곤 했다. 대원군이 사랑한 난초도 그렇다. 화개동천에 사는 한 시인의 집 뒤 집채만한 바위 틈에 춘난이 핀다. 춘분이면 난 향기가 바위 전체를 맴돈다고 한다. 하도 부러워 춘난에 대한 시도 썼고, 창호지에 그림자를 비치고 묵난을 쳐보기도 했다. 퇴계선생의 매화는 매년 친구 부부와 섬진강으로, 통도사로, 선암사로 년중 행사마냥 매화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모란 역시 집을 몇번 옮겼어도 꼭 심었다. 근 30 년 키우다보니, 모란에 대한 수필도 썼다. 소월의 진달래꽃은 누구나 뒷동산에서 따먹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경동시장에서 그 꽃을 사와 두견주 담고, 화전을 부쳐먹기도 했다. 

  간혹 꽃을 여인과 비교해보기도 했다. 꽃도 아름답지만 여인도 아름답다. 세상에 가장 사랑할만한 것은 부귀가 아니라, 꽃과 여인이다. 친척, 동기, 직장 동료 등 스쳐간 여인을 꽃과 비교해본 적 있다. 흔히 여인을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고 해어화(解語花)라 부른다. 연꽃은 신비하지만 물 속에 있다. 근접 어려운 비구니 같다. 국화는 향이 그윽하되, 만나는 철이 늦다. 년상의 여인 같다. 난은 청고하되 조심스럽다. 소년 때 좋아한 여선생님 같다. 매화는 애련하고 차급다. 요절한 사촌 누이같다. 모란은 화려하되 금방 시든다. 떠난 여인 같다. 두견화는 곱되 작은 꽃이다. 어릴 때 소꼽친구 같다.

 내 친구 중에 중산리에 땅을 가진 사람이 있다. 지리산에 갈 때마다 그 땅에 무슨 나무를 심을까 고심하였다. 내가 가장 낭만적이고 애상적이라고 생각되는 꽃을 기념으로 심고 싶어서다. 그러다 결정내린 나무가 복숭아나무다. 하필 매난국죽 다 버리고 복숭아 나무인가. 전자가 이미 인구에 회자된 세련되고 지성적인 꽃인데 비해, 복숭아꽃은 무심히 어릴 때 곱다고 느낀 순수한 꽃이기 때문이다. 산꿩이 울고 보리가 익는 철, 동구 앞에 선 비 젖은 복숭아꽃을 본 적 있는가. 안타깝도록 은은하고 고운 용태 이다. 촌색씨마냥 수줍고 화사한 그 모습 자체가 신비이다. 꽃도 그렇지만, 복숭아나무는 또 하나 장점을 가졌다. 꽃 지면 열매를 맺는다. 바로 선도(仙桃) 이다. 천상의 서왕모가 반도원에 심었던 불로장수의 과일 이다. 선도가 주렁주렁 열리는 도원 자체가 한 편의 시다. 그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노래를 부르며, 작년에 복숭아 묘목 열그루를 심었다.

 심으면서 생각해보니, 도연명이 '도화원기 (桃花源記)'에서, 한 어부가 복숭아꽃 떨어져 흐르는 시냇물 따라가니 별천지가 있었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친구 사는 곳이 도화원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태백은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그대에게 묻노니 왜 푸른 산에 사느냐(問余何事棲碧山). 대답없이 웃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구나(笑而不答心自閑). 복숭아꽃 물에 떠 묘연히 흘러가니(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 인간세상이 아닌가 하노라(別有天地非人間).' 하였다. 복숭아꽃 떨어져 흐르는 물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다. 나 역시 '산중문답'처럼 웃으며 대답않고 마음 절로 한가로워지고 싶었다. 이 정도면 복숭아꽃을 선택한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여시도 늙으면 고향 땅을 보고 운다고 한다. 지금 누가 나에게 평생에 접한 꽃 중에서 가장 낭만적, 애상적인 꽃이 무엇이냐고 물어달라. 두말 없이 나는 복숭아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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