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동으로 돌렸다>
바람이 남으로 불면 남으로, 동으로 불면 동으로 가야지. 내년이면 두보의 '곡강(曲江)'이라는 시에 나오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다. 그래 년말에 친구 몇과 지리산에 가 하루밤 물소리 바람소리 들으려고 했다가, 전날 밤 뉴스가 남쪽엔 폭설이고 지리산은 입산통제라는 바람에 코스를 변경했다. 두류동에 사는 친구는 우리 간다고 난로에 땔 통나무와 구울 고구마까지 준비해놓았다가 허탕쳤다. '아무리 눈이 많아도 원지까지는 고속도로라 괜찮고, 덕산까지도 그렇고, 중산리는 제설차가 눈을 치울끼고...' 오라고 이렇게 세번 전화해준 그 고마운 말만 마음에 새겼다. 이 나이에 서울서 눈길 운전하고 천리길 가긴 무리다. 차를 동으로 돌렸다. 양평 기갑 부대 지휘관을 지낸 이장군이 그곳 인사참모한테 전화를 거니, 전 육군 소장 전화 받은 중령은 친절하다. 부대 내에 숙소 정해주고 근처에 돌아볼 곳까지 소개한다. 그가 알려준 양수리 세미원(洗美苑)에 가니, 전화 받았다며, 입장료도 받지않고, 장 모라는 40대 여류화가 한 분이 기다리다가 친절히 안내까지 해준다. 여기 건물 내부의 돌에 새긴 주렴계의 <애련설(愛蓮設)>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내 특별히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진흙 속에 살되 물들지 않고(子獨愛蓮之出於 泥而不染), 맑은 물에 씻었으되 요염하지 않고(濯淸漣而不妖), 속은 비웠고, 겉은 곧으며(中通外直), 속류들과 무리지어 가지 치지 없고(不蔓不枝),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香遠益淸), 홀로 선 모습이 꼿꼿하고 깨끗하여(亭亭淸植), 가히 멀리서 바라볼만하고(可遠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것이다(而不可褻玩焉)>.
대학시절에 이 글에 느낀바가 많아 외고 다녔다. 소치(小癡)의 연꽃 그림도 보고, 많은 연꽃 민화들도 보았다. 올 여름에 남강문우회 정태수 총장님 김한석 시장님 봉화 선배님과 여기 와서 연꽃만 보고 간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수석과 정원 격이 높아 세미원이 누구 작품이냐 물어보니, 전 적십자 총재 서영훈씨 작품이라 한다.
첫단추는 그윽한 연꽃 향기로 제대로 끼웠다. 그 다음에 간 곳은 미각집이다. 옥천 냉면 원조집을 찾아갔다. 원래 원조집이란 큰길가 자리좋은데 있는 놈은 다 가짜고, 골목 안에 숨어있는 놈이 진짜다. 내가 5년간 속초에 강의 다니느라 일주일에 한번씩 이 앞을 지나쳤다. 그때 먹은 맛있다고 느꼈던 옥천 냉면이 다 가짜였다. 그만치 이집 냉면은 차원이 다르다. 역시 이 지역 부대장 출신이 안내하니 다르다. 가져온 수육과 냉면을 보니, 외견상으로는 너무나 평범하였다. 그건 평범이 아니라 초라였다. 그러나 입으로 확인하니, 아이고 이걸 어떻게 필설로 표현하나. 완전 예술이다.
덩달아 시킨 막걸리도 일품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서울장수막걸리를 비롯하여, 덕산 생쌀막걸리, 부안 참뽕막걸리, 금산 토종 인삼막걸리, 일동 더덕 막걸리, 포천 조껍데기 막걸리, 제주감귤 막걸리, 양양 송이 동동주, 국순당 복분자 막걸리, 충주 사과 막걸리, 전주 검은콩 막걸리와 모주, 가평잣 막걸리, 문경 오미자 막걸리, 단양육쪽 흑마늘 막걸리, 녹차 막걸리, 울금 막걸리, 자색고구마 막걸리, 이화주 등 입맛 당기는 것이 많은데, 이곳 지평막걸리도 대단하다. 맛이 담담하면서도 슬며시 운치가 있다. 이날 밤, 우리는 또하나 지방 특색이 있는 막걸리도 만났다. 용문사 은행나무 구경하고 내려와 어떤 깨끗한 산채집에서 저녂을 먹으며 만난, 봉평 허생원 메밀막걸리다. 이름에서 벌써, 은근히 허생원과 물방아간 처녀의 순결한 로맨스 장면이 떠오르는, 그 막걸리도 순한 맛이 인상 깊었다.
하루에 지방 명주 두개 만났으니, 이게 복이다. 저녁에 부대 숙소에서 목욕하고 자리에 눕자, 잠이 그리 달 수 없다. 첫날부터 발동 제대로 걸린다. (12월 28일)
<차를 동으로 돌렸다> (2)
아침 7시30분에 핸드폰에 메시지가 하나 뜬다. '선배님! 권금성 케이불카 오후 2시로 예약했습니다.' 어제밤 통화한 장교수다. 년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설악산이다. 그래 권금성 올라가는 케이불카를 4시간 전에 예매한 것이다. '땡큐. 여기서 아침 묵고 금방 가겠소.'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설악산도 마찬가지다. 구경은 다 식후다.
또하나 원조집 들렀다. 신내리 양평해장국집 이다. 이장군 안내로 가보니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는 말, 이 집 두고 하는 말이다. 김치와 깍두기, 식기는 평범하다. 그런데, 선지와 양(羘)과 내장이 많은 국물을 숟갈로 뜨는 순간, 아하 이게 바로 평범 속 비범이구나 싶다. 이래서 서울과 경기도 일원 유명 해장국집들이 걸핏하면 <양평해장국> 이름 도용해서 간판을 다는구나 싶다. 어쩐지 주차장이 넓은게 수상하더니만, 이름값 제대로 한다. 보통 사람들이야 양식집 가서 나이프로 스테이크 자르고 비싼 값 치르길 즐긴다. 그러나 고수야 그래서 쓰나? 단돈 8천원 짜리 흐름한 집에서 회심의 미소를 띄울 줄 알아야 한다. 역시 물건이었다. '고맙다'. 새삼 세 사람이 데려온 사람에게 인사했다. 냉면, 해장국, 두군데 명품 맛보고, 그 식당들 명함을 한장씩 주머니에 넣었으니, 이번 여행, 이걸로도 본전 뽑았다.
다음은 설악산 음미할 차례다. 오욕칠정으로 혼탁한 맘 씻어주는 곳이 산이다. 그런데 대상 산이 남한에서 가장 미인인 설악산이라, 그 또한 은근히 좋다. 산이 지금 백설로 온몸을 분단장 했을 것이다. 그리고 편안히 케이불카 타고 올라가는 우리에게, 옷 벗은 나신을 보여줄 것이다.
척산온천서 장교수 만나, 신흥사 들리니, 절의 풍경소리 은은하다. 입구의 수백년된 전나무들과 우람한 사천왕은, '먼저 속세의 허접쓰레기같은 오만일랑 여기에 벗어두고 가소.' 위병소 헌병처럼 우릴 검문한다. 경내서 바라보니, 저멀리 절지붕 너머 은백의 산봉우리들은 구름 띠를 둘러, 아래 속세와 위 선계를 구분해놓았다. 돌확의 석간수는 한모금 마시니 오장이 다 시원하다.
신흥사 녹차 한잔 마시고, 케이불카 탑승하니, 금방 구름 위로 올라간다. 그 위의 소나무와 바위는 아랫 것들과 품격이 다르다. 풍상에 굽은 소나무는 더욱 푸르고, 기암절벽 위 구름은 더욱 희고, 바람은 더욱 맑다. 여기 올라온 사람들 눈빛도 다르다. 아이들 눈빛은 원래 그렀지만, 여기선 더 천사처럼 착해보인다. 평소 풍진에 찌든 어른들 표정도 여기선 잠시 더 환하다. 서로 스치면 미소도 보낼줄 안다. 잠시 속세를 잊고, 우리 네 노인도 산상의 선인이 되었다.
사진 좌측부터 이정수 장군. 최상호 상무. 이종규 장군. 본인
사람은 간혹 목욕탕에 가서 몸만 씻을게 아니라, 이렇게 명산을 찾아와 마음도 씻어야 한다. 옷만 세탁해서 입고다닐께 아니라, 마음도 더 자주 세탁해서 지니고 다녀야 한다. (12월29일)
<차를 동으로 돌렸다> (3)
구름 위에서 놀았으니, 다음은 산중 음식을 찾을 차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산채다운 산채 만드는 요리연구가가 있다. 점봉산 산채집이다. 여기서 먹는 것은 밥이 아니라, 약이다. 조미료는 표고가루, 당귀가루, 구운 소금과 오가피 끓인 물이다. 식전 차는 솔잎과 칡으로 만든 효소차다. 산나물은 계절 따라 다르지만, 곰취, 도둑취, 단풍취, 더덕취, 차전취, 고려엉컹퀴취(곤드레), 불로초(산마늘), 얼레지, 석이버섯, 흐르레기(목이버섯), 송이버섯, 능이버섯, 표고버섯, 곰버섯, 떡다리(영지버섯), 운지버섯이다. 처음 온 사람은 이것만으로도 눈을 크게 뜬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산도라지, 산더덕, 산당귀, 천궁, 만삼, 둥굴레, 삼지구엽초(음양곽), 어성초, 황기, 갈근이 나오고, 그 밖에 복분자, 오디, 으름, 다래, 돌배, 개복숭아, 산사과, 옻나무, 엄나무(해동피), 꾸지뽕나무, 마가목, 느릅나무(유근피), 겨우살이, 민들레, 인동초, 인진쑥, 개똥쑥, 고사리, 고비가 나온다. 산냄새 가득한 귀한 것들이다. 밑반찬은, 산마늘 장아찌, 표고, 당귀, 산도라지, 산다래 열매 장아찌다. 1인당 가격은 1만5천원이지만, 강원도 산중에서 산나물이 가장 많은 점봉산 골짝골짝에 숨어있는 것을 전문가가 채취하여 비법을 발휘한 것이다. 산나물 맛 진수를 알고 싶으면, 이 값은 비싸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이 집 10년 더된 단골이다. 처음 점봉산 밑에서 만난 이래, 용대리, 척산온천, 그리고 지금 동우대 옆으로, 이사 간 곳 마다 찾아다녔다. 그동안 많은 지인도 데려왔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동우대 학생이던 아들이 군대 다녀와서 사장 노릇 하고 있다. 이곳이 이번 맛기행의 하이라이트다. 아는 집에 좋은 친구들 데려와서 그런지, 반주로 한 아바이막걸리가 그렇게 시원하고 달콤할 수 없었다.
속초 와서 산 보고, 바다가 빠질 수 없다. 식사 후, 다섯 사람은 속초시 북쪽에 있는 <나폴리아>로 갔다. 이 카페는 그 앞의 넓은 반석과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파도가 볼만한 곳이다. '장교수! 아직도 여기가 속초 카페 중에서 제일 운치 있지?' '네! 그렇다고 봐야지요.' 속초는 풍광이 좋은 곳이라, 간데 마다 카페가 있다. 눈 내리는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가 역시 일품이다. 달 밝으면 달 밝다고, 눈 내리면 눈 내린다고, 여기 와서 '슬로진'마시던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정총장님 말씀대로 인생은 일수불퇴(一手不退)일 것이다. 또 누구 말대로 낙장불입(落張不入)일 것이다. 동기 정목일 수필가 말대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귀중한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은 다시 얻기 어렵다는 생각 반드시 해야 한다. 이날 밤은 청초호가 보이는 숙소에서, 시름 많은 인생, 저 밤바다 불빛처럼 쓸쓸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튿날 돌아오는 길은 여주 목아박물관에 둘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목아(木芽) 박찬수씨는 생초 출신이다. 나보다 년배가 아래지만, 내가 고향의 여러 예술가 중에서 특히 그의 예술에 감탄한 분이다. '목아'란 '그의 손을 거치면 나무에 움이 돋는다'는 뜻을 지닌 그의 아호다. 그는 자귀와 조각칼의 천재이다. 아쉽게도 출타중이어 만나지 못했지만, 다행이 아드님이 박물관에 살고 있었다. 고향 어르신들이라고, 관람시간이 지났는데도, 전기불을 켜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작품집도 하나씩 선물해주었다. 이번 여행은 여기서 끝났다. 연꽃박물관에서 시작하여, 목아박물관에서 끝난, 멋진 예술기행이었다.
공자님 초상. 나무로 조각한 후 동으로 주형한 것이라 한다.
천진무구함은 바로 도인들의 꿈꾸는 최종경지다.
이 작품은 이번에 같이 간 최상호 상무 집에도 있다고 한다.
목아선생이 최상무 부인 안숙선 명창에게 선물한 것이다.
난생 처음 주장자 짚고 법상에 앉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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