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자책· 수필

매화송

김현거사 2013. 9. 13. 06:40

        

            매화송

 

 달빛 아래 보는 매화처럼 아름다운 건 없다. 화선지에 그린듯 하얀 꽃잎이 밤하늘 푸른 허공에 점점이 점 찍은 모습처럼 청초한 건 없다. 실바람에 꽃잎이 흔들리면 달빛 아래 사쁜사쁜 거니는 월궁 항아의 하얀 옷깃을 보는듯 하다. 꽃은 피어나는 방향에 따라 정면인 것, 후면인 것, 옆으로 보이는 것, 아래로 향한 것, 반개(半開)한 것 만개(滿開)한 것이 뒤섞여야 더 생동감 있다. 매화는 시간에 따라 운치와 감흥이 다르다. 아침에 보는 매화와 밤에 보는 매화, 청명한 날 매화와 안개 낀 날 매화, 눈 오는 날 보는 매화가 다 다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매화는 월하(月下)의 매화다. 이때 줄기는 달빛 아래 희미한 수묵화가 되고, 얼음같은 살결과 구슬같이 맑은 얼굴은 달빛 아래 더 선명히 보인다. 후각을 자극하는 숨막히도록 청량한 향기는 말못할 사연 지닌 여인의 체취처럼 신비롭다.

 

 찻잔 속의 매화도 아름답다. 깔끔한 백자 잔도 좋고, 투박한 이조 다완도 좋다. 작은 찻잔은 꽃잎을 더 자세히 보이게한다. 찻물에 적셔진 꽃잎은 마음을 젖게 만든다. 꽃에는 반드시 꽃받침이 있기 마련이다. 홍매는 붉고, 청매는 녹색이다. 여인이 화장을 바꾸듯 매화는 꽃받침 따라 격조를 바꾼다. 매화차 만드는 물은 깊은 산 속 샘물이 제격이다. 가능하면 옥같은 흰 손으로 차를 따르는 여인이 있으면 운치가 더 있다. 가난한 선비도 좋고 화가도 좋다. 가난한 선비는 청빈을 말할 것이고, 화가는 꽃빛의 자세한 변화를 표현할 것이다. 매화차 마시는 장소는  앞에 작은 연못이 있으면 좋다. 연못 옆에 초당이 있고, 초당 옆에 대나무가 몇그루 있으면 더욱 좋다. 문득 옆에서 누가 부드러운 해금을 타거나. 고요한 산사의 풍경 소리가 울려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매화는 오랜 풍상을 겪은 고매(古梅)일수록 귀하다. 고승처럼 허리 구부정하게 땅으로 누운 매화일수록 격조 높다. 매화는 어린 것 보다 늙은 것을 귀히 여긴다. 살찐 것 보다 여윈 것을 귀히 여긴다. 줄기는 기괴하게 굽어져야 귀한 법이고, 가지는 섬세하면서 힘 있어, 늙은 것과 어린 것, 드리운 것과 치뻗은 것, 성긴 것과 빽빽한 것, 강(剛)과 유(柔)가 조화를 이뤄야 귀하다. 세월의 흔적으로 표피에 푸른 이끼가 무수한 태점(苔點)을 찍고 바위 옆에 비스듬이 선 매화 등걸은, 산속에 사는 선풍도골의 선비처럼 반갑다. 매화는 산매(山梅), 강매(江梅), 원매(園梅), 화분에 얹은 반매(盤梅)가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매화는 오래된 성터나 고가나 고찰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늙은 매화다.

 

 매화에 대해서는 수많은 시인묵객이 매화시를 썼고,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매화 그리는 법을 논했다. 나는 그 중 절창은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시라 생각한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가면서 항상 가락을 잃지않고(桐千年老恒藏曲), 화는 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않고(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月到千虧餘本質), 버들은 백번을 꺽여도 새가지가 올라온다(柳經百別又新枝)'

 

이처럼 매화향이 핍절하게 느껴지는 시는 없다.

 

  일생 동안 가장 매화를 사랑하고 자기자신이 매화처럼 고결하게 산 선비는 퇴계 선생이라 생각한다. 선생은 48세에 부인과 아들을 잃고 홀로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18세의 관기 두향(杜香)을 만났다. 두향은 매화같이 깨끗한 살결에 옥같은 자태를 지닌 빙기옥골(氷肌玉骨)이었을 것이다. 시문과 가야금에 능하고 특히 매화를 사랑했다고 한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9개월 후 풍기군수로 떠나가는 선생이 한없이 야속했을 것이다. 소녀는 매화보다 향기로운 눈에 이슬 머금었을 것이다. 한 수의 시를 읊고, 수석 두 점과 매화 분재 한 점을 선물했다고 한다. 선생은 이 매화를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거쳐 69세에 고향 안동에 돌아와 임종할 때까지 21년간 곁에 두고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노후에 병환이 깊어지자, 매화에게 자기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민망하다며, 화분을 다른 방에 옮기라고 했고, 임종시에도 '매화에 물을 주라'란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두향이 준 매화를 항상 곁에 두고,  매화시첩(梅花詩帖)에 91수의 매화시를 남겼다.

 

'뜰 가운데 거니는데 달은 날 따라오고, 매화 둘레 몇 번이나 서성여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향기는 옷깃 가득, 그림자는 몸에 가득'

 선생은 한밤 중에 매화가 피어나자 뜰에 내려서서 달빛 아래 매화 나무 둘레를 맴돌며 옷이고 몸이고 달빛과 매화 향기에 흠뻑 젖었던 모양이다. 인편으로 소식 물어오는 두향에겐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누렇게 바랜 예 책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선생이 떠난 뒤, 두향은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다가, 부음을 접하자,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방문하고 돌아와, 곡기를 끊고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매화처럼 향기로운 두향의 처신이었다. 아마 두향은 매화의 혼이었던지 모른다. 인생이 한 편의 시라면,두 분처럼 향기로운 매화시를 남긴 시인도 없다. 가히 만고청향(萬古淸香)이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매화를 보면서, 동서고금을 통해서 이처럼 매화에 얽힌 그윽한 사랑을 꽃 피운 선비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퇴계선생을 매화처럼 생각하면서 매화를 바라본다.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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