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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김현거사 2012. 11. 3. 04:53

 

 

  이 글은 전 문교부 차관 장희채씨가, 진사 제자들과 만들어준 아버님 자서전에 쓴 아버님의 모습을 정리해서 옮긴 것입니다. 그 중에 나온 진주 옛어른들, 靑潭  李康雨  鄭裁華 朴源孝 鄭命壽 설창수 南仁樹 李在鎬, 여류성악가 黃必蓮 金美影, 그 밖에 李時雨 崔泳俊 등 알만한 진주의 어른 함자가 들어있다.

 

 아버지는 진주 중안국민학교를 다녔다. 다섯살 위고 결혼까지 했던 靑潭스님이 반장이고, 아버님은 부반장이었다. 李康雨씨가 서울서 독립선언문을 가져와 만세 행진을 시작하자, 청년단, 학생단, 유림단, 농민단, 기생단, 심지어 걸인단까지 참가했고, 청담이 독립만세로 경찰에 잡혀있을 때, 아버님은 경찰서 마당에서 밤을 새웠다.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계실 때, 아버님이 상경하시면 우리를 조계사에 데려갔다. 스님은 우리 형제를 귀여워해서 자주 찾아오라며 용돈도 주시곤 했다.

 

만세운동으로 애국심이 고조되자, 진주 유지들이 지역 인재양성을 위해, 돈을 모아 장학생을 일본에 보내기로 했는데, 그 두 명 중 한명이 아버님이다. 나중에 兵使 쯤은 할 것이라고, 별명이 김병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鄭裁華씨의 장학금을 누가 상해로 빼돌리는 바람에 이 계획은 좌절되었고, 대신 국민학교 동창인 진양군 나동면 삼계리 부호, 朴源孝씨가 학비를 쪼개 쓰자며 아버님을 동경으로 초청했다.

 

아버님은 동경대학 문학예술과에 적을 두고 이광수가 주재하던, “조선문단‘과 황석우가 주관하던 ”조선시단“에 투고를 해서 글을 실었다. 동경생활 3년째 되던해, 상해 임정 요인의 자금모집에 참여한 박원효씨가 징역 3년형을 받자, 혼자서 공사판에서도 일하고, 장사도 해보면서 공부를 계속하다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해서 비봉루의 隱樵 鄭命壽씨 사랑방에서 세월을 보냈다.

 

문학을 좋아하셔서, 개천예술제를 주관하던 설창수시인과 교류하고, 한국 최초로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번역한 숙대 불문과 박남수시인은 문산중학교 교사로 데리고 있었다.

 

임란 때 성을 지키다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彰烈詞의 重修記 비문을 쓰셨고, 이반성면의 인조대왕이 은신하셨던 聖殿庵 현판 글도 쓰셨고, 촉석루 옆 6.25전승비와 순국선열 및 전몰군경 충혼탑 정면에 새겨져 있는,

 

“여기 충혼으로 모셔진 임들이여.

나라와 겨레 위해 그 목슴 바치셨네.

忠義 烈士 얼이 맺힌 옛 성터에,

그대들 탑이 되어 높으시구나.

고이 잠드시라.靑史에 빛나리.”

 

獻辭文도 학도병으로 큰아들을 잃은 아버님이 쓴 글이다

 

해방 후, 진주극장에서 열린 시민대회 건국준비위원회 의장을 하셨다. ‘건준’은 경찰서와 시청을 일본인에게서 인수받고, 치안을 유지했다.

 

음악인 南仁樹 李在鎬씨, 여류성악가 黃必蓮 金美影씨와 친했다. 해방 후 남인수를 진주로 초대하여 연 음악회는 아버님이 사회를 보셨다.

 

정치보다는 후학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1930년 창원군 鎭田에서 첫 교편을 잡은 이래, 진주사범, 안의중학교장, 문산중고장 ,진양군 교육감을 지내시며, 1960년까지 30년을 지역 교육계에 헌신했다.

 

해방 후 진주사범에서 교편을 잡으실 때 “화랑 전기”란 저술로, 화랑의  명칭, 화랑도의 업적, 특히 쇠퇴 부분의 화랑과 風月, 香徒, 男巫, 사당, 男寺堂, 화냥년(花郞女), 굿중패(乞粒), 廣大, 香徒軍(喪頭軍) 등 명칭의 변화를 고려사나 이조실록 등에서 추적하여 자세히 남겼다. 국립도서관에 가보면, 그 당시 화랑에 대한 저술 남긴 분은 사학자 단재 신채효와 아버님 두 분이다.

 

신안동 지주였던 아버님은 제자들을 아꼈고, 가난한 제자는 학비도 도와주셨다. 외교관 김창남, 언론인 김경래, 시인 박남수, 교육계 정태수 정희채 정구현 선생이 아버님이 아낀 제자다. 재벌 구자경씨와 대사 차관 편집국장 사장 장군 등 제자들이 종로 2가 음식점에 모여 아버님 자서전 출판 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책의 분량은 작았으나 회고록 속에, 사시 출제위원과 서울시립대 총장을 역임한 제자 정희채씨는 이렇게 적고있다.

 

“1945년 10월 이승만 박사의 지방 순회 때 일 이다. 진주는 청년단, 부녀단, 공무원, 진주사범, 진주농고, 진주고, 진주여고, 인근 군민까지 전부 길에 나가 환영했다.

그러다 진사와 진농의 행열이 서로 얽혀 싸움이 벌어졌다. 진농 학생 천여명이 진사로 몰려왔다. 진주사범 교장은 교기를 앞세우고, 전 교직원과 학생을 데리고 진농에 와서 사죄하라는 것 이었다.

 

해방 후, 시대는 좌우익 싸움에 백주에 테러가 자행되고, 사람 목슴이 파리 목슴과도 같던, 극도의 치안부재 시대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피차 수백명의 사상자가 예상되었다. 쌍방은 대창과 칼, 삽,쇠스랑 등으로 무장하고 벼르고 있었다.

 

진사 학생들은 그런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일전을 하고 죽자고 결정했다. 강당에 모여, 손에 붕대를 감고, 죽창을 다듬었다. 사태가 험악하자, 若山 金性奉 선생님이 나섰다. 제자들 생명이 중요하니, 세번이나 진사에 쳐들어와 굴욕적 사죄를 요구하는 진농에, 당신이 목슴을 걸고 화의사절로 가겠다는 것 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나서자,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가서 죽겠다며, 학생 대표도 나섰다. 朴槿(전 대사), 姜甲秀, 鄭九鉉(교육자)과 나 였다.

 

진농에 도착하니, 진농학생들은 젊은 혈기에 전원이 손에 무기를 들고, 운동장에 집합하여, 총공격을 기다리는 살벌한 분위기 였다. 선생님은 태연자약 조회대 단상에 오르셨다. 적의에 가득한 눈들이 선생님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하시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못마땅하면, 당장 밟아죽이겠다는 것 이다. 이때 선생님의 현하 웅변이 터져 나온 것 이다.

 

‘친애하는 진농의 건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여 있는가? 여러 피끓는 젊음이, 정작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왜놈들은 현해탄 너머로 사라져 버렸는데, 그 불구대천의 적은 고스라니 노쳐버리고, 이제 그대들은, 내동포 내형제를 때려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이것이 광주 학생의거같은 목슴을 걸고 싸워야 할 의로운 일입니까? 목슴을 걸고 조국 해방을 맞고, 그 첫번째 일이 겨우 이것 입니까. 이것이 사내로서 꼭 하지 않으면 않될 일입니까? 진사 학생들도 약세지만, 결사대를 조직해 죽기로 작정하고 명예를 지킬려고 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의 스승으로서, 나는 이 더러운 꼴을 내눈에 담지않고, 심혈을 기울러 키운 내 제자의 목슴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빌다가 죽기 위해서, 이자리에 왔읍니다. 싸움의 주원인은, 시장이 대열의 순서를 정해준 것을 어기고, 진농이 진사의 후미대열을 끊은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이 꼴을 보고는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할말을 다 했읍니다.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지성 입니다. 자 이 김성봉이를 때려 죽이고, 스승의 시체를 넘어 진주 사범을 공격하시오.‘

 

선생님은 팔장을 낀채 단 위에 서 있었다. 미쳐 날띄던 천여명 학생이 숨을 죽였다. 폭풍 전야의 그 무시무시한 고요였다.

그 때 진농 학생 대표는 생각 깊은 사람 이었다. 간단한 숙의가 끝나자, 학생들을 조회대형으로 정렬 시켰다.

‘일동!선생님에게 경례’

힘차게 외쳤다.  

‘선생님! 우리들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우려 했읍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물러서겠읍니다. 선생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훌륭하신 김성봉 스승님께 만세 삼창으로 진농의 의기도 보여드립시다! 만세! 만세! 만세!’

진농 교정 안은 봇물처럼 터진 만세 삼창 소리로 뒤덮혔다. 선생님은 단 위에서 울고 계셨다. 그 후 진농 대표가 오히려 진주사범에 사과하러 가서, 그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아버님은 해방 후 무정부주의운동에 심취해서 안의에서 친구분과 학교를 운영하셨다. 사범학교 동문인 李時雨씨가 안의중학 재단을 끌고 있었다. 그는 동경에서 大杉榮을 사숙했고, 독서와 사색의 생활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와 무정부주의 이상향을 실현하려한 것이다. 그는 망명정부 요인 柳林씨를 모시고, 安義 龍秋寺에서 아나키스트 전국대회를 연 인물이기도 했다. 친구 崔泳俊씨와 세번이나 찾아와 이상촌의 꿈을 펼치며, 교장을 맡아달라고 했던 것 이다.

 

고색창연한 光風樓 뒤 옛날 객사 고건물이 학교였다. 아버님은 취임해서 덕유산과 지리산 산곡의 청아한 수석위로 구르는 물소리와 산새소리를 들으며, 임야개간, 약초 재배, 축산으로 이상촌 건설에 힘썼다. 예술제, 체육대회, 부녀강습회, 웅변대회 등 행사도 열었다.

그러다 金智會가 이르킨 여순반란 잔당 일부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에 잠입하였다.그들은 안의 거창 함양에 출몰, 약탈 방화 살인을 감행했다. 낮에는 국군이 통치하고 밤이면 공비가 동네를 통치했다. 뺄갱이가 ANARCHIST를 용서할리 없다. 친우 이시우씨가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아버님은 이상촌 건설 꿈을 일장춘몽으로 돌리고 철수하셨다.

 

아버님은 그 뒤 문산 중학 건립에 교장으로 참여하셨고, 진양고등학교까지 설립하셨으나, 재단이사장 박명재씨와 의견이 달라 학교를 떠나 진양군 교육감에 당선 되셨다.

 

아버님은 단정한 외모에 다정다감한 편이시나 성품은 대쪽같고 진주 일대 제자들에게 영향력이 컸다. 5.16을 ‘군사반란’이라고 혹평하시다가 구속되어 교육감에서 물러나신 후, 말년까지 중앙정보부가 따라다녔다.

 

우리 집안은 아버님 영향으로 진주서 교장 세분, 교사 삼십명 쯤을 배출됐다. 가히 진주 교육계의 대부라고 부를만 했다.

 

 

 

 얼마 전 형님이 아버님 일생을 글로 정리했다. 그 중에 진주 옛어른들,靑潭 李康雨  鄭裁華 朴源孝 鄭命壽 설창수 南仁樹 李在鎬,여류성악가 黃必蓮 金美影,그 밖에 李時雨 崔泳俊 어른 함자가 들어있다. 내가 알기로, 청담은 박정 부친 박생광 화백 친구였고, 비봉루의 정명수씨는 전춘식 처가집 어른이고, 작곡가 이재호씨는 정우섭 집안 어른인데, 혹시 다른 분도 동창 집안 어른이 계시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 대분이 서부경남 내노라하는 집안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그 분이 누구 동기 집 어른 아닐까 짚이는 분도 있다. 당사자는 읽고 연락하여 우정을 새롭게 해주기 바란다.

 

 

 

 아버지는 진주 중안국민학교를 다녔다. 다섯살 위고 결혼까지 했던 靑潭스님이 반장이고, 아버님은 부반장이었다. 李康雨씨가 서울서 독립선언문을 가져와 만세 행진을 시작하자, 청년단, 학생단, 유림단, 농민단, 기생단, 심지어 걸인단까지 참가했고, 청담이 독립만세로 경찰에 잡혀있을 때, 아버님은 경찰서 마당에서 밤을 새웠다.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계실 때, 아버님이 상경하시면 우리를 조계사에 데려갔고, 스님은 우리 형제를 귀여워해주시곤 했다.

 

 

만세운동으로 애국심이 고조되자, 진주 유지들이 지역 인재양성을 위해, 돈을 모아 장학생을 일본에 보내기로 했는데, 그 두 명 중 한명이 아버님이다. 나중에 兵使 쯤은 할 것이라고, 별명이 김병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鄭裁華씨의 장학금을 누가 상해로 빼돌리는 바람에 이 계획은 좌절되었고, 대신 국민학교 동창인 진양군 나동면 삼계리 부호, 朴源孝씨가 학비를 쪼개 쓰자며 아버님을 동경으로 초청했다.

 

 

아버님은 동경대학 문학예술과에 적을 두고 이광수가 주재하던, “조선문단‘과 황석우가 주관하던 ”조선시단“에 투고를 해서 글을 실었다. 동경생활 3년째 되던해, 상해 임정 요인의 자금모집에 참여한 박원효씨가 징역 3년형을 받자, 혼자서 공사판에서도 일하고, 장사도 해보면서 공부를 계속하다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해서 隱樵 鄭命壽씨 사랑에서 세월을 보냈다.

 

 

문학을 좋아하셔서, 개천예술제를 주관하던 설창수시인과 교류하고, 한국 최초로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번역한 숙대 불문과 박남수시인은 문산중학교 교사로 데리고 있었다.

 

 

임란 때 성을 지키다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彰烈詞의 重修記 비문을 쓰셨고, 이반성면의 인조대왕이 은신하셨던 聖殿庵 현판 글도 쓰셨고, 촉석루 옆 6.25전승비와 순국선열 및 전몰군경 충혼탑 정면에 새겨져 있는,

 

 

“여기 충혼으로 모셔진 임들이여.

나라와 겨레 위해 그 목슴 바치셨네.

忠義 烈士 얼이 맺힌 옛 성터에,

그대들 탑이 되어 높으시구나.

고이 잠드시라.靑史에 빛나리.”

 

 

獻辭文도 학도병으로 큰아들을 잃은 아버님이 쓴 글이다

 

 

해방 후, 진주극장에서 열린 시민대회 건국준비위원회 의장을 하셨다. ‘건준’은 경찰서와 시청을 일본인에게서 인수받고, 치안을 유지했다.

 

음악인 南仁樹 李在鎬씨, 여류성악가 黃必蓮 金美影씨와 친했다. 해방 후 남인수를 진주로 초대하여 연 음악회는 아버님이 사회를 보셨다.

 

 

정치보다는 후학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1930년 창원군 鎭田에서 첫 교편을 잡은 이래, 진주사범, 안의중학교장, 문산중고장 ,진양군 교육감을 지내시며, 1960년까지 30년을 지역 교육계에 헌신했다.

 

 

해방 후 진주사범에서 교편을 잡으실 때 “화랑 전기”란 저술로, 화랑의  명칭, 화랑도의 업적, 특히 쇠퇴 부분의 화랑과 風月, 香徒, 男巫, 사당, 男寺堂, 화냥년(花郞女), 굿중패(乞粒), 廣大, 香徒軍(喪頭軍) 등 명칭의 변화를 고려사나 이조실록 등에서 추적하여 자세히 남겼다. 국립도서관에 가보면, 그 당시 화랑에 대한 저술 남긴 분은 사학자 단재 신채효와 아버님 두 분이다.

 

 

신안동 지주였던 아버님은 제자들을 아꼈고, 가난한 제자는 학비도 도와주셨다. 외교관 김창남, 언론인 김경래, 시인 박남수, 교육계 정태수 정희채 정구현 선생이 아버님이 아낀 제자다. 재벌 구자경씨와 대사 차관 편집국장 사장 장군 등 제자들이 종로 2가 음식점에 모여 아버님 자서전 출판 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책의 분량은 작았으나 회고록 속에, 사시 출제위원과 서울시립대 총장을 역임한 제자 정희채씨는 이렇게 적고있다.

 

 

“1945년 10월 이승만 박사의 지방 순회 때 일 이다. 진주는 청년단, 부녀단, 공무원, 진주사범, 진주농고, 진주고, 진주여고, 인근 군민까지 전부 길에 나가 환영했다.

 

그러다 진사와 진농의 행열이 서로 얽혀 싸움이 벌어졌다. 진농 학생 천여명이 진사로 몰려왔다. 진주사범 교장은 교기를 앞세우고, 전 교직원과 학생을 데리고 진농에 와서 사죄하라는 것 이었다.

 

 

해방 후, 시대는 좌우익 싸움에 백주에 테러가 자행되고, 사람 목슴이 파리 목슴과도 같던, 극도의 치안부재 시대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피차 수백명의 사상자가 예상되었다. 쌍방은 대창과 칼, 삽,쇠스랑 등으로 무장하고 벼르고 있었다.

 

진사 학생들은 그런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일전을 하고 죽자고 결정했다. 강당에 모여, 손에 붕대를 감고, 죽창을 다듬었다. 사태가 험악하자, 若山 金性奉 선생님이 나섰다. 제자들 생명이 중요하니, 세번이나 진사에 쳐들어와 굴욕적 사죄를 요구하는 진농에, 당신이 목슴을 걸고 화의사절로 가겠다는 것 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나서자,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가서 죽겠다며, 학생 대표도 나섰다. 朴槿(전 대사), 姜甲秀, 鄭九鉉(교육자)과 나 였다.

 

 

진농에 도착하니, 진농학생들은 젊은 혈기에 전원이 손에 무기를 들고, 운동장에 집합하여, 총공격을 기다리는 살벌한 분위기 였다. 선생님은 태연자약 조회대 단상에 오르셨다. 적의에 가득한 눈들이 선생님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하시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못마땅하면, 당장 밟아죽이겠다는 것 이다. 이때 선생님의 현하 웅변이 터져 나온 것 이다.

 

 

‘친애하는 진농의 건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여 있는가? 여러 피끓는 젊음이, 정작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왜놈들은 현해탄 너머로 사라져 버렸는데, 그 불구대천의 적은 고스라니 노쳐버리고, 이제 그대들은, 내동포 내형제를 때려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이것이 광주 학생의거같은 목슴을 걸고 싸워야 할 의로운 일입니까? 목슴을 걸고 조국 해방을 맞고, 그 첫번째 일이 겨우 이것 입니까. 이것이 사내로서 꼭 하지 않으면 않될 일입니까? 진사 학생들도 약세지만, 결사대를 조직해 죽기로 작정하고 명예를 지킬려고 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의 스승으로서, 나는 이 더러운 꼴을 내눈에 담지않고, 심혈을 기울러 키운 내 제자의 목슴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빌다가 죽기 위해서, 이자리에 왔읍니다. 싸움의 주원인은, 시장이 대열의 순서를 정해준 것을 어기고, 진농이 진사의 후미대열을 끊은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이 꼴을 보고는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할말을 다 했읍니다.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지성 입니다. 자 이 김성봉이를 때려 죽이고, 스승의 시체를 넘어 진주 사범을 공격하시오.‘

 

 

선생님은 팔장을 낀채 단 위에 서 있었다. 미쳐 날띄던 천여명 학생이 숨을 죽였다. 폭풍 전야의 그 무시무시한 고요였다.

 

그 때 진농 학생 대표는 생각 깊은 사람 이었다. 간단한 숙의가 끝나자, 학생들을 조회대형으로 정렬 시켰다.

‘일동!선생님에게 경례’

힘차게 외쳤다.  

‘선생님! 우리들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우려 했읍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물러서겠읍니다. 선생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훌륭하신 김성봉 스승님께 만세 삼창으로 진농의 의기도 보여드립시다! 만세! 만세! 만세!’

진농 교정 안은 봇물처럼 터진 만세 삼창 소리로 뒤덮혔다. 선생님은 단 위에서 울고 계셨다. 그 후 진농 대표가 오히려 진주사범에 사과하러 가서, 그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아버님은 해방 후 무정부주의운동에 심취해서 안의에서 친구분과 학교를 운영하셨다. 사범학교 동문인 李時雨씨가 안의중학 재단을 끌고 있었다. 그는 동경에서 大杉榮을 사숙했고, 독서와 사색의 생활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와 무정부주의 이상향을 실현하려한 것이다. 그는 망명정부 요인 柳林씨를 모시고, 安義 龍秋寺에서 아나키스트 전국대회를 연 인물이기도 했다. 친구 崔泳俊씨와 세번이나 찾아와 이상촌의 꿈을 펼치며, 교장을 맡아달라고 했던 것 이다.

 

 

고색창연한 光風樓 뒤 옛날 객사 고건물이 학교였다. 아버님은 취임해서 덕유산과 지리산 산곡의 청아한 수석위로 구르는 물소리와 산새소리를 들으며, 임야개간, 약초 재배, 축산으로 이상촌 건설에 힘썼다. 예술제, 체육대회, 부녀강습회, 웅변대회 등 행사도 열었다.

 

그러다 金智會가 이르킨 여순반란 잔당 일부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에 잠입하였다.그들은 안의 거창 함양에 출몰, 약탈 방화 살인을 감행했다. 낮에는 국군이 통치하고 밤이면 공비가 동네를 통치했다. 뺄갱이가 ANARCHIST를 용서할리 없다. 친우 이시우씨가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아버님은 이상촌 건설 꿈을 일장춘몽으로 돌리고 철수하셨다.

 

 

아버님은 그 뒤 문산 중학 건립에 교장으로 참여하셨고, 진양고등학교까지 설립하셨으나, 재단이사장 박명재씨와 의견이 달라 학교를 떠나 진양군 교육감에 당선 되셨다.

 

 

아버님은 단정한 외모에 다정다감한 편이시나 성품은 대쪽같고 진주 일대 제자들에게 영향력이 컸다. 5.16을 ‘군사반란’이라고 혹평하시다가 구속되어 교육감에서 물러나신 후, 말년까지 중앙정보부가 따라다녔다.

 

 

우리 집안은 아버님 영향으로 진주서 교장 세분, 교사 삼십명 쯤 배출됐다. 제자들 말고도 교육감을 지내셨으므로 서부경남 교육계 원로 대부분이 아버님과 친면이 있고,가히 이 분야 대부라고 부를만 했다.

영향력 때문에 국회의원이 맨 먼저 신년 인사를 오곤 했다.

 

 

아버님은 진주서 결혼주례를 가장 많이 섰다. 주례 사진만도 앨범 4권이 넘었다. 그러나 인심처럼 허황한게 없다. 현재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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