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의 저녁산책
'저녁 먹고 할아버지 하고 산책 갈래?' 그러면 손자는 '네!' 큰소리로 대답한다. 빨리 밥을 먹기 시작한다.' 밥 천천히 먹고, 양말 신고, 할아버지한테 와서 가자고 해라.' 그러고 조금 있으면 손자가 나타난다. 서재 문을 연다.' 할아버지 나 준비 됐는데요. '오케이!'
아파트 정문을 지나면 건널목 밑이 바로 냇가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자 손잡고 냇가 산책하면 천사의 손이라도 잡은듯 싶다. 그 하나로 행복하다. 마음이 즐거우니 눈에 들어오는 풍경 모두 아름답다. 갯버들은 초여름 산들바람에 나부낀다. 둑에는 하얀 마가렛과 노란 금계국이 피어있다. 마가렛꽃은 언제 보아도 깔끔하다. 금계국은 외래종이지만 코스모스 같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줄곤 핀다. 바람은 풀잎을 흔들고, 꽃잎을 흔든다. 얼굴을 스치고, 물 위를 스친다. 황혼이 되면 냇물은 더 아름답다. 노을이 물 위에 비친 모습이 낭만적이다. 하늘의 구름은 붉게 물들었다. 냇물 속 물결 역시 붉게 물들었다. 황혼은 무언가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나는 그 풍경 속 냇물 옆을 걸어간다. 징검다리 굸직한 돌에 부딪쳐 튀는 하얀 물거품도 아름답다. 돌 아래로 센 물살을 이루며 흐르는 옥같이 푸른 물결도 아름답다. 물속이 다 비친다. 거울처럼 투명한 물밑의 모래밭은 파도처럼 무뉘가 새겨져있다. 물에 젖은 자갈은 더 예쁘다. 수석을 채집하러 다니던 남한강이 생각난다. 어릴 때는 이렇게 맑은 물에서 피래미와 고동을 잡았다. 물에 바지가랑이 젖는 것 쯤은 아랑곳 하지않았다.
냇물은 황혼의 노래를 부른다. 어딘가로 떠나는 나그네의 노랠 부른다. 물 위로 가벼운 바람이 지나간다. 하루 중 가장 낭만적인 시간이 바로 이 시간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 황혼의 시간 속을 손자 손 잡고 산책하노라면 아버님 생각도 난다. 문산중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시던 아버님이다. 항상 나의 손을 잡고 '사들'이라는 들판을 거닐곤 하셨다. 시를 좋아하시던 아버님이다. 춘원이 발행하던 책에 시를 싣곤 하셨던 아버님이다. 그 들판의 맑은 냇물과 흰구름을 나는 지금도 그리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름이다. 나는 줄무뉘 친칠라와 하얀 토끼를 길렀다. 토끼가 좋아하던 크로바나 토끼풀은 그 산책길에 참 많았다. 황혼의 산책길은 회고의 길이다. 아버님을 생각하는 길이다. 고향을 느끼는 길이다. 어린 시절 뜯던 토끼풀 찾아보는 길이다. 칠십을 앞 두고 흘러간 세월 생각하는 길이다.
중간에 내가 잠시 앉곤하는 벤치가 있다. 나는 거기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롤라스케이트나 자전거 타고 내 앞으로 쌩 하고 지나가는 날렵한 어린 소녀 보기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소녀는 물속의 버들피리처럼 생기차다. 어린 소년이나 소녀는 모두 왕자나 공주다. 귀엽다. 품위가 있다. 활기가 있다. 어린이가 내 옆을 지나갈 때 나는 나직히 'I dream of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란 노랠 불러본다. '유모차에 간난아이를 태우고 지나가는 젊은 새댁도 한참 쳐다본다. 그 시절 저처럼 아름답던 아내를 생각해본다. 털이 숭숭한 건장한 다리를 내놓은 하얀 반바지 차림의 청년이나, 조용히 걸어가는 은발의 노부부 모습도 유심히 쳐다본다. 주인 따라나온 여러 강아지 모습도 자세히 쳐다본다. 하얀 털빛이나 영롱한 눈빛,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유심히 본다. 저 자신도 귀여운 것이 어린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이 강아지가 귀여워서 곁에 닥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강아지를 쓰다듬으려 멈칫거리다 움찔하고 놀라며 재빨리 엄마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 그런다. 다 강아지에 관심을 보인다. 간혹 강아지 만나면 멀리 달아나는 겁쟁이 소녀도 있다. 유난한 그런 소녀를 볼 때마다 나는 미소 짓는다.
산책길에 나선 모든 사람이 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시선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내오는 부인도 있다. 그런 분은 어딘가 기품이 있다. 새침 떨며 쌀쌀맞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르노아르의 그림처럼 조용히 걸어가는 노부인도 있다. 운동하는 걸음걸이로 바삐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탄력있는 젊은 육체를 부럽게 바라본다.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을 미소로 바라본다.
벤치에서 다리가 보인다. 다리 위엔 가로등이 있다. 낙엽송 울타리 심은 아파트가 보인다. 낙엽송은 키가 삼층 높이 이다. 어둠 덮히면 가로등은 불을 밝힌다. 아파트 창문도 불을 켠다. 물 위엔 그 등불들이 비친다. 다리 위에 별이 뜬다. 달도 뜬다. 어둠 속 가로등 옆 하얀 줄장미는 더욱 향기 풍긴다. 나는 달빛 풍경을 좋아한다. 별빛 아래 시간을 사랑한다.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제품이 81개에 달한다고 한다. 반도체 LCD 가전제품 휴대전화 조선 심지어 오토바이 낚싯대 같은 제품도 있다. 30년 뒤에는 우리나라 GDP가 세계 2위로 된다고 한다. 나는 세계 속에 약진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을 사랑한다. 그 젊은이들 뒤를 이을 어린 내 손자의 장래를 더욱 기대한다.
어린 손자는 에너지가 넘친다. 할아버지 옆에 가만히 있질 못한다. 저만치 달려나갔다간 다시 뛰어 할아버지한테 돌아오곤 한다. 그리곤 다시 앞으로 뛰어나간다. 간혹 예쁜 강아지를 보면 날 보며, '0h my God' 영어로 감탄한다. 악센트가 완연 서양사람 악센트다. 얼마 전에 미국서 돌아온 손자다. 미국 유치원에는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파란 금발머리 소녀가 있었단다. 반에서 모든 것이 1등인 손자에게 시집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천진한 금발 소녀는 우리 아이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몹시도 섭섭해 하더란다. '너도 그애가 좋더냐'고 물어보니 가만이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태평양 너머 줄리엩이 될지 모른다. 미래는 이들의 것이다. '공부 잘해서 나중에 미국 가서 그 애와 만나라'고 말해 두었다.
세상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용인의 도심 속을 흐르는 냇물엔 산책길과 아스콘 깐 자전거 도로가 나있다. 멋진 나무의자가 놓여있고, 나무다리가 있고, 나무로 만든 산책길도 있다. 헬스기구도 놓여있다. 곳곳에 꽃도 피어있다. 물가엔 갈대도 심어져 있다. 수양버들도 자란다. 분당천엔 팔뚝만한 잉어가 물 속에 헤엄치는 곳도 있다. 양재천엔 수달이 나타난 곳도 있다. 세상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그 속에 손자의 미래는 펼쳐질 것이다. 그런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요즘 매일 일과인 손자와의 저녁 산책은 한없이 즐겁다.
Photo borrowed from http://blog.aladi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