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 홀로 계신 박용수 선배님 모시고 소요산 거닐다 왔다.
박선배는 1950년대 가난한 진주 문인들의 물주였다. 이 분 영일(?) 사진관 수입 상당수가
파성선생 술값으로 나갔다는 후문 들었다.
남강문우회서 1950년대 문인 쿠세가 남아있는 두 분 있다. 박선배와 이유식 교수다.
박선배는 이 날 모처럼 찾아온 후배인 봉화 일러무삼 김거사 멕인다고 우족탕과 맥주,
눈에 보이는 건 다 시킬려고 한다. 돈도 내려고 고함치고 야단치는 걸 말린다고 혼났다.
이유식 교수는 술 더 사주겠다며 사람을 한정없이 기약없이 잡는 바람에 후배들이 무서워(?) 한다.
잘 묵고 소요산 입구 들어서니 산세가 경기도의 금강산 답다.
입구에 커다란 플라타너스 다섯그루가 있다.그걸 보면서 구박사가 한가닥 푼다.
플라타너스란 이름이 풀라톤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거닐며 강의 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철학 전공인 나도 생각나는게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 이야기다. 프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 제자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을 데리고 프라타너스 그늘을 소요하면서 철학을 강의하고 문답하였다고 <소요학파>라 부른다.
그 소요학파의 프라타너스 나무가 하필 <소요산> 입구에 저리 커다랗게 서있는가 싶었다.
우연의 일치치고 묘하다.
잘 포장된 진입로에 단풍나무가 많았다. 그늘에 쉴 나무의자도 많다. 40년 전 불교신문 야유회로 여기 와 본 후 처음이다. 당시 나와 신문을 만들던 선원빈거사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후배 김형균이 남겨준 책 <불교 언론의 선구자 선원빈>만 남았다. 교계에 지금도 <선원빈 기자상>이 남아있다. 당시 자재암 주지스님의 융숭한 대접 받던 기억 살아난다. 당시는 주지스님과 천연암굴 안에 나한전 그리고 나한전 옆으로 옥류폭포, 원효샘물들을 구경하였으나, 이제는 옛 일. 좌골신경통으로 산문 앞 마지막 술집에 앉아 산보 종료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에도 <알라 푸가쵸브>의 노래 <백만송이 장미> 들었다. 그 주점 여인은 이젠 세속의 욕심만 더덕더덕 묻은 중년이다. 그도 젊어 한 때 이런 외국 원곡 좋아했나 싶어 인생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백만송이 장미 원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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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 자재암은 공주들의 절인가 싶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이야기도 그렇고 황진이 이야기도 그렇다.개성 서화담과 황진이도 여기서 데이트 했다. 진주서 온 봉화공주 그 이야기 듣고 가만 있을 것인가. 독사진 한장 찍어달래서, 나중에 누구한테 맞아죽을 각오하고 꽃 앞에서 한장 찍어드렸다.
성격이 천진난만한 것은 마치 다음 사진의 아이 같았다.
자재암은 양사언 김시습도 여길 찾아와서 소요했다하여 소요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혹시 앞으로 남강문우회 모 공주와 문인들도 자주 여기 와서 소요하며 거닐었다고 소요산이라고 한다고 바뀔지는, 내사 어찌 뒷 일까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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