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중

정태수 총장님 글

김현거사 2012. 5. 27. 22:30

 

추억 여행 (1)    <문안>

                                                                                                                                정 태 수


 이번에 과학시조집 “어디서 내가 왔나”를 출간한 후 고향을 다녀왔다. 꾸부렁 자지 제 발등에 오줌눈다는말이 있으니, 시조의 격조는 논할 수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손자를 생각하여, 우주의 시작부터 생명의 탄생과 인류의 현재까지 전과정을 시조로 나름대로 소개한 것에 뜻을 두어본다. 팔순 초반에 힘들게 옥동자 본 셈이라, 산후 조리로 반년은 빈둥빈둥 쉬었다. 그러나 물을 건느면 지팡이는 버리는 법,  어느날 불현듯 훌훌 털고 고향길을 찾아나섰다.  내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리워 한 곳, 유년의 기억이 머물어 있는 고향이다. 5월 19일, 휘발유 가득 채우고 집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몸 실으니, 때는 늙은 날의 이 한가한 때가 자유로운 시간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나절 만에 진주 인근에 도착하였으니, 고향은 생각보다 가깝고 빨랐다.

 

  우람한 지리산 바라보며 가다가 산청에서 대평 길 따라 진양호로 진입하니 넓은 호수 하나가 나를 반긴다. 잘 정돈된 호반을 돌아 옛 '너우니' 뱃가에 도착하여 진양호 조망하니, 물 속의 섬이 임진란 이후 인조(仁祖) 때에 내 10대조가 서울에서 낙남(落南)하여 정착한 집성촌 까꼬실이다. 진주시 귀곡동(貴谷洞)으로 불리는 까꼬실은 옛날 이름 ‘가곡(佳谷)’에서 변형되어 까꼬실로 불렸다기도 하고, 마을 뒤 대평면에서 흘러온 황학산 줄기가 칼코리 닮았다고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까꼬실은 다 같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하동을 돌아오는 덕천강과 산청을 돌아오는 경호강이 만나서 산과 들을 이루는 명당자리 3각주 이다. 두 강이 합류하는 남강 상류 로터리다. 지금은 댐을 막아 명승지 진양호가 생겼지만 본래 쌍갈래 물길이 만나는 합류점이라 산과 강과 들을 겸비한 좋은 땅이었다. 남강은 여기서 아래로 흘러 신안동 들판을 적신 후, 진주성을 감돌아, 금산 대곡 의령 지수로 산태극 수태극 S자로 되풀이 구비 돌면서 낙동강에 합류, 현해탄으로 들어간다.
수몰되기 전 까꼬실은 부촌이었다. 조금 과장되기는 했지만, 까꼬실 논 한 마지기 하고 진주시내에 있는 집하고 안 바꾼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토지는 넓고 비옥했고, 무·배추·고구마·감자·수박의 명산지였다. 특히 인근 녹두섬의 고구마가 유명했다. 또, 떼 지어 다니는 은어 황어·등 물고기도 유명했다. 길이가 1㎞를 넘었던 '너우니'의 은빛 모래톱은 여름철 진주 시민의 물놀이 장소였다. 넉넉한 삶의 터전이었기에 1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았고, 천석꾼이 배출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된다는 속담대로다. 한때 300가구 천여명 살던 동네가 지금 눈에 보이는 건 푸른 호수다. 이젠 겨우 다섯 가구만 육지 속의 섬 아닌 섬에 남아서 두릅과 노나무·엄나무·오갈피 등을 키우고 산다고 한다.

  넓고 푸른 호수물에 잠긴 동네 앞에서, 내 맘 속에 아롱거리는 것은 주마등같이 떠오르는 가슴 벅찬 과거의 역사이다.  문관이신 11대조 충의공(忠毅公)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선생은 임진왜란 그해 9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정병을 거느리고 북도(北道)에 침공했을 때, 의병대장이 되어 길주 장평 쌍포 단천 백탑포 등에서 6대첩을 거두어 왜병 천여명을 베어 관북지역을 수복하셨다. 임란후 선생은 이때의 공으로 길주목사가 되셨고, 안변부사·공주목사 등을 거쳐 1600년 용양위부호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셨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전주부윤이 되셨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다시 기용되셨으나 병으로 사임하셨다. 그해 10월에 지은 시의 내용으로 인해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고문을 받다가 돌아가셨으나, 그후 경성 창렬사(彰烈祠), 부령 청암사(靑巖祠)에 제향되셨고, 뒤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셨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선생은 말년의 억울한 시화(詩禍)사건으로 물고를 당하면서 자제들에게 진주로 내려가 벼슬을 잊고 농사짓고 살라는 유명을 남기셨다. 그에 따라 3숙질이 서울에서 급히 남행하여 진주 인근의 귀곡 용암 산청 세 곳에 자리잡고 산 것이 우리 집안 400년의 근대사다.  내 근선조들의 세거지는 한골 분딧골 등 여러 동네가 있었고, 그중 우리는 9대에 걸쳐 '새미골'에 살았다. 우리 집 조부손 3대는 서당 훈장이셨던 조부님의 직장 따라 금산 월아산 아래로 옮겨 월아동(달음동)에 살았었다.  이후 10대가 흐르고 11대손인 내가 나타나고 다시 서울로 도로 올라와 살고 있으니, 지금의 내 삶은 객지살이인가, 환고향살이인가?   한편 1969년에 진양호와 댐이 생기면서 까꼬실에 남아있던 일족 모두는 너우니 물가에 망향비 하나 세워놓고 솔권하여 떠나니, 지금은 거의 빈 섬이나 다름없다. 종가만 이반성 집성촌으로 옮기고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문인 학자 등 재자가인 다 흩어지고, 푸른 물결만 출렁이는 섬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모든 것이 꿈인양 허전하였다. 우리 씨족의 긴 유랑의 역사를 떠올려 보았다. 20만년 전 아프리카 동부의 킬리만자로산과 빅토리아호 근처에 살던 현생인류의 첫 조상은 시나이반도를 거쳐,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 사얀산맥을 지나, 바이칼호 후룬·브이르호 요동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 족보상으로 보면 한반도의 해주와 개성, 서울에서 살았다. 그 긴 유랑 끝에 진주 까꼬실까지 왔는데, 다시 우리 조부님이 금산 월아산 아래 달음동으로 옮기신 것이다. 까꼬실은 물 속에 잠긴 우리 씨족 20만년사의 종점이었다.

  남강조차 무심할 수 없었다. 이 강변에서 내가 나고 자라고 초중등 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첫 취직을 했으니, 남강의 아래 위에 군데 군데 점철되어 있는 것이 내가 살아온 흔적이다. 나는 그 후 남강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가 서울로 옮겼다. 그러나 끝내 남강을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하여, 만년인 지금도 남강문우회에 참여, 고향 문사들과 만난다. 천리길을 찾아와 뱃길 왕복시간이 맞지 않아 아쉬웠다. 도선을 타고 건느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하얀 물새 나르는 진양호 속 까꼬실 옛터를 바라보느라니 인생무상이란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백년을 다 살아야 삼만육천일이라 했던가. 망부석인양 물 속에 잠겨버린 까꼬실을 말 없이 바라보다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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