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월|

김현거사 2011. 1. 19. 11:06

3월|隨筆
김현거사 | 등급변경 | 조회 104 |추천 0 |2010.03.15. 10:55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310 

 3월은 봄인지 겨울인지 애매하다.방년 열다섯이 소녀인지 처녀인지 구별처럼 애매하다.졸졸 흐르는 양재천에 파란 풀이 돋아 봄인가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눈이 온다. 날씨 쌀쌀해서 두터운 옷 입고 나갔는데, 오후는 나른해서 옷이 귀찮아진다.그러나 3월이 봄이 확실한 것은, 쌀쌀한 북풍한설에 죽은듯이 움추렸던 시커먼 매화 가지에 하얀 꽃몽오리가 봉긋 봉긋 돋아나고, 목련봉오리가 어느새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3월이면 문득 고향의 봄이 그립다. 파란 신안동 그 넓은 보리밭가 여기저기서 쑥 캐던 아가씨들, 종달새 지지배배 우짖던 도동 버들 숲 맑은 풀피리 소리 생각난다. 첫사랑 소녀 칠암동 집에 피던 하얀 탱자꽃 생각난다.  

무슨 그럴만한 깊은 사연도 없이, 어영부영 어쩌다가 길잃은 철새처럼 육십 넘도록 고향으로 가지 못한 나그네 되었지만 봄만 오면 문득 고향이 그립다. 그럴 때면, 거기가 남강가 언덕처럼 맑은 바람이 부는 곳도 아니고, 신안동처럼 푸른 보리밭이 보이는 곳도 아니지만, 내가 찾아가는 곳이 딱 두군데 있다. 종로5가와 양재동 꽃시장이다.

 

 오래되고 운치 있는 곳이 종로5가 꽃시장이다. 종로는 성북동 혜화동에서 대대로 뿌리 내리고 살아온 서울 토백이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일반 하천에선 멸종되어 일급수에만 서식하는 열목어같이 휘귀한 그들이 길바닥 좌판에서 난초나 감나무 묘목을 사들고가는 모습 보면 여기가 조선 왕조 오백년 수도 한양이구나 싶다. 나는 이미 사라진 무성영화 시대 인물같은 그들의 모습 보는 것도 즐기고, 이리저리 봄꽃과 구근들과 꽃씨와 꽃삽과 물뿌리개 구경하고 돌아다니다가, 인근 광장시장에 들어가 시장바닥 좌판 목의자에 엉덩이 걸치고 앉아, 혼자 고향의 봄 그리워 막걸리 잔술과 순대 안주를 즐기기도 한다.유난히 배꽃처럼 곱던 분재 팔던 노점의 젊은 새댁이 지금 영국에 딸을 유학보낸 할머니가 되었으니, 내가 종로5가 꽃시장 출입한 것은 삼십년이 훌쩍 넘었다. 

 

 강남 양재동 꽃시장은 강북과 분위기가 좀 다르다. 새로 조성된 현대식 주차장에 차를 대면 입구에 전국에서 생산된 하훼를 도매하는 공판장이 있다. 내가 주로 찾아가는 곳은 그 옆의 대형 온실들이다. 거기는 꽃의 천국이다. 심비디움 호접난 덴파레 온시디움 김기아난 같은 화려한 서양난도 있고, 한란 소심 옥화 철골소심 보세 풍란 석곡같은 고고한 동양난도 있고, 눈 속에서 피는 설난도 있다. 소나무 소사나무 모과나무 동백나무 분재도 있고,관음죽 비로야자 고무나무 벤자민 소철같은 열대식물도 있다. 천리향 만리향 야래향 금목서 은목서 후리지아 페퍼민트 로즈마리 라벤다 구문초 사계장미처럼 향기 풍기는 식물도 있고, 제라늄 베고니아 바이올렡 시크라면 팬지 크로커스 무스커리같은 귀화식물도 있고, 마가목 낙상홍 만냥금 천냥금같은 빨간 열매 열리는 나무도 있고, 할미꽃 앵초 바위솔 노루귀 복수초 수선화 엉겅퀴같은 야생화도 있다. 다육식물 선인장도 있고, 수경재배한 히야신스 파피루스, 물속에서 자라는 부레옥잠 수련 연꽃도 있고, 공중 수분으로 자라는 탈란드시아도 있고, 벌레 잡는 파리지옥도 있고, 백두산 철쭉이라는 값 비싼 만병초도 있다. 좌우간 휘귀한 꽃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꽃뿐이 아니다.꽃 앞에 귀여운 아이 세우고 사진 찍는 젊은 부부도 있고, 상춘객 따라온 컹컹 사정없이 짖어대는 강아지도 있고, 조그만 화분 살려고 동행들과 서로 상의하는 수다스런 아주머니들도 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 향기가 있다.

 

 온실 밖은 묘목들 천지다. 두릅 엄나무 오가피 오미자 산수유 산사자 산초나무 차나무 헛개나무 산딸나무 옷나무 당귀같이 약 되는 나무도 있고, 캠벨포도 앵도 배 모과 사과 감나무같은 과일나무가 있고, 목단 왕벚나무 때죽나무 팥배나무 이팝나무 목백일홍 금송 반송 주목 미스김라일락같은 정원수도 있고, 튜립 다리아 그라디오라스 카사불랑카 하이트트렘펫같은 구근도 있다. 품종 개량한 슈퍼왕매실 슈퍼왕대추 울트라오디 왕호두 왕보리수 약용구아바 씨없는 대봉시 불루베리 비타민나무 묘목도 있다. 그리고 아직 싹은 나지않은 채로 비닐화분에 담긴, 금새우란 꿀풀 꽃향유 구절초 인동초 기린초 삼지구엽초 비비추 해오라비난초 상사화 산마늘 두메부추 감국 산수국 산작약 섬잔대 매발톱꽃 뀡의다리 해국 쑥부쟁이 가솔송 돌단풍 으아리 천남성 미니붓꽃 큰복주머니같은 야생화가 있다.

 

약초와 과일나무 야생화 천지를 오가면서 나는 아이쇼핑 나온 여인같은 충동구매 의욕에 들뜬다. 일반 오디보다 열배나 큰 열매 달리는 울트라오디 묘목을 살까. 알이 호두알만 하다는 왕대추 묘목을 살까, 벌 나비 붕붕 불러오는 꿀풀 꽃향유같은 향기로운 꽃을 살까, 구근 하나에 천원하는 그라디오라스를 여나믄개 살까. 곰취 산마늘 두메부추같은 야생 채소를 살까.진주 망진산에 흔하던 할미꽃을 살까. 작년처럼 소나무 분재 소재를 살까. 이리저리 다리가 아프도록 헤매다닌다.

올 삼월은 무엇을 뜰에 심을 것인가.정원에 작은 딸기밭이 있다. 그 옆에 곰취 더덕 산마늘 두메부추 곤달비 당귀같은 산야초밭을 한번 조성해보기로 맘 먹었다.(201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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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10.03.15. 15:39
식물 학자가 아니라 식물학 사전을 통 째로 삶아 먹어도 이렇게 줏어 섬기지는 못할 것이다. 항상 걱정이 이렇게 하고 머리가 무거워 어떻게 머리를 들고 길을 걸어 가는지 모르겠다. 읽다가 읽다가 무얼 읽었는지 다 잊어 버렸다.
 
 
아송 10.03.15. 17:14
여기 올려져 있는 화초며 나무 이름을 세어 보니 127. 아니 이건 아예 화초나 묘목을 사러 간 것이 아니라 몽땅 이름을 베껴 왔네요. 식물도감을 보는 것 같아 놀랐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필력 좋고 완연한 봄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좋습니다.
 
 
봉화 10.03.15. 20:10
저는요 읽다가 읽다가 덤성 덤성 건너 뛰면서 읽었거든요 아뭏던 대단합니다 거사님의머리속은 백과사전이 들어있나봐요 봉화
 
 
초영 10.03.15. 23:44
(손계숙) 봄, 봄, 봄의 찬가! ... 봄의 목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옵니다.
눈부신 봄빛과 함께 환하게 피어나는
화초며, 나무들이 봄의 전령으로 다가옵니다. 수려한 작품을 통해서
희망의 <봄>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네요. 감사드립니다. ^^*
 
 
월계 10.03.16. 18:00
김현거사의 나무사랑 꽃사랑은 수도권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할 것입니다.이걸 살까 저걸 살까 망서리다가도 역시 소나무 분재를 사야지요.너무 일편단심인가요.정태수.
 
 
농암 10.03.17. 11:05
갖가지 아름다운 꽃이나 특징있는 나무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해박한 지식의 원천은 다름아닌 어린 시절 진주의 3월달이군요.
그 시절 깊이 각인된 진한 향수가 오늘 날 거사님의 그 향기로운 삶의 원천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김현거사 10.03.17. 12:30
그렇습니다.분재나 꽃에 대한 애착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서 깊어진 것입니다.
 
 
마당골 10.03.21. 22:49
전에 서울 가는 길에 가끔 종로5가 도로변 묘목시장을 둘러보곤했는데 양재동도 가보고싶군요. 요즘은 그저 산골에서 인터넷으로 과수 몇종을 주문할 정도이니 김현거사가 부럽소.
 
 
이진표 10.03.25. 06:57
꽃, 나무, 약초들이 꾸미는 봄의 향연도 좋지만 남강의 3월이 더 좋습니다. 스러져가는 고향의 봄에 연초록을 입혀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일석 10.03.30. 13:24
3월 이라는 필력도 대단하지만 마치 댓글 경연대회장 같기도 하네요. 나 같은 사람은 댓글 다는데도 꽤 신경이 쓰이니... 글마다 '고향'을 다른 시각에서 자유자재로 조명하는 솜씨, 정말 감탄 그대로네요. 장바닥 좌판위에 엉덩이 깔고 앉아 혼자 고향의 봄 그린다는 대목....어쩐지 김현거사의 모습 그대로여서 더욱 정겹네요. <김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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