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꽃 길|

김현거사 2011. 1. 19. 10:59
꽃 길|隨筆
김현거사 | 등급변경 | 조회 48 |추천 0 |2010.06.06. 08:59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341 

<꽃 길> 

  

 언제나 봄이 올까. 3월 초부터 기다리다가  양재동 꽃시장 봄꽃 소식 들리면,  맨 먼저 달려가 꽃과 꽃 사는 사람 구경하는 일처럼 기쁜 일도 없다. 행복한 얼굴로 꽃 들고 가는 여인처럼  아름다운 여인도 없다. 닥아가서 말이라도 걸고싶다. 꽃을 사들고 가는 청초한 할머닐 만나면, 속으로 반가워서 시선을 떼지못하다가, 끝내  '안녕하세요?' 인사 건네고 , 몇마디 말을 나눠야 직성이 풀린다. 정원을 잘 가꾸어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도 알려진  타샤튜더 할머니처럼, 대개 꽃 좋아하는 은발의 할머니는 온화하고 다정하기 마련이다.

 

 소년 때부터 꽃과 가까이 지냈다. 한평생을 그랬기에, 간혹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인연 맺은 꽃이 무얼까 유년기까지 서성거려 보기도 한다. 문득 꽃과 더불어 생각나는 잊혀지지않는 사람도 있음을 알게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그들은 꽃의 이미지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만난 꽃은 봉선화일 것이다. 우리집은 넓은 정원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고, 백여수 닭 키우던 닭장이 있었다. 그리고 꽃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이 계셨다. 닭똥 거름으로 힘 받은 우리집 봉선화는 키가 어린애 가슴팍에 닿았고, 노랗고 붉은 채송화는 여름 내내 향연을 벌였다. 우물에 물 뜨러 온 동네 아낙들은 엄청나게 큰 우리집 봉선화를 입 모아 칭송하였고, 수없이 달린 꽃을 마음대로 따가서 손톱에 꽃물 들였다. 철없이 '울 밑에선 봉선화야' 노래 하던 시절,  모광화(母光華)란  불명(佛名) 가지셨던 어머님 생각나게 해주는 꽃이 봉선화다. 이웃에게 베풀기 좋아하시던 어머님이다. 봉선화를 보면 항시 어머님이 떠오른다.

 

 두번째 생각나는 꽃은 찔레꽃이다. 할아버지가 사셨던 야산 찔레꽃은 마치 소복한 여인처럼 서럽게 서럽게 피곤 했다. 찔레는 작은 하얀 꽃과  노란 꽃술이 향기롭고 생명력이 강해 황토밭에도 잘 자랐다. 뻐꾸기 울음 속에 보리타작 끝나고 나락이 익어갈 때면, 참새떼가 이논 저논 몰려다닌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새를 보라고 내보낸다. 아이들은  벼이삭에 툭툭 튀는 며뚜기도 잡고, 손으로 논바닥 뒤져 미꾸라지와 고동을 잡았다. 허기져 찔레꽃  새순을 꺽어먹든 일, 소쿠리에  담아온 삶은 감자 먹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 감자 가져오던 눈이 큰  시골 여동생은 지금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진주의 한 병원장 부인이 되어있다.

 

 봄언덕에 지나간 한줄기 바람이었을까. 강물에 비친 한가닥 달빛이었을까.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잠시 떴다가 사라진 무지개일 것이다. 소녀가 살던 진주 칠암동 대밭은 푸르고, 소녀집 담장 탱자꽃은 별보다 청초하고 향기로왔다. 봄바람 불고, 버들잎 푸른 남강에 은어가 올라오고, 대밭 속에 칡꽃 피고, 산마다 골짝마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면, 누군들 가슴 설레지 않았으랴. 소녀네 울은 유난히 하얗던 탱자꽃이 끝없이 청순한 향기를 풍겼다. 유난히 얌전하던 소녀는 지금도 밤에 자기 집 주변을 맴돌며 세레나데 부르던 소년의 이름을 모를 것이다. 지금도 칠암동에는 첫사랑처럼 순결한 탱자꽃이 피고있을 것이다.

 

  '고향꽃은 소박하고 순결한데,서울꽃은 세련되고 우아하다.' 대에  입학하여 본관 게시판 옆의 보라빛 라일락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였다. 라일락은 서울 여학생들마냥 세련되고 향기로운 꽃이었다. 그윽한 라이락 향기 풍기던 벤치는,거기서 헬만헷세의 책 읽던 학생의 멋이었다. 허리 구부정하고 얼굴에 주름이 많고, 조수로 딸을 데리고 다니던 늙은 사진사가 있었다. 졸업 후 과 동문인 아내와 결혼하자, 우리가 맨처음 한 일은 모교로 가서 그 사진사에게 사진을 찍은 일이다. 영감님의 낡은 카메라로 찍은 그 사진은 아직도  향기로운 라일락 꽃 아래  다정히 선 우리의 젊은 시절을 보여준다.

 

 섬으로 돌아다닌 시절이 있었다. 제대 후 원고지 몇 권 들고 찾아간 곳은 남해 미조리 였다. 민박집 돌담엔 주홍 바탕에 검은 반점 찍힌 키가 큰 나리꽃이 피었다. 홀로 산책하던 바닷가 풀밭엔 보라빛 작은 제비꽃이 애처럽게 피었다. 그때 책갈피에 끼운 그 제비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를 따라다니던 금순이란 주인집 애도 잊을 수 없다.


 선비 꽃도 많이 알게 되었다. 불교신문 시절 쌍계사 백운(白雲)스님에게 춘난 키우는 법을 배웠고, 조계종 중앙포교사 김어수(金魚水) 노시인에게 돌에 붙인 멋스러운 풍란을 배웠다. 원고 청탁간  동승동 이희승 선생댁 입구 보라빛 오동꽃에서 고결한 향기를 처음 알았고, 사당동 예술인촌 서정주 선생댁 파초에서 선생이 즐겨 입던 한복의 시원함을 느꼈다. 일석(一石)은 젊은 기자에게 담배와 자장면 권하시던 다정한 분이었고, 미당(未堂)은 목탁을 두드려 사모님께 차 내오시게하던 풍류객 이었다.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했고,주렴계는 연꽃을 사랑했고,소동파는 대나무를 사랑했고, 퇴계선생은 매화를 연인 두향이처럼 사랑했고,영랑은 모란을 사랑했다.

아내는 장미를 사랑했다. 우리집은 항상 뜰에 백장미 노랑 분홍장미를 키웠다. 우리는 심비디움 호접난 덴파레 같은 서양난도 키우고, 풍란 한란 철골소심같은 동양난도 키웠다. 소나무 동백나무같은 분재도 키웠고, 관음죽 비로야자 고무나무같은 열대식물도 키웠다. 천리향 만리향 야래향 라벤다처럼 허브 식물도 키웠고, 제라늄 바이올렡 시크라면 팬지 무스커리같은 귀화식물도 키웠다.

 

 그러나 이 모든 꽃은 타향의 꽃이었다. 언젠가부터 마음 속엔 고향꽃만 애달프게 떠오른다. 날이 갈수록 봉숭아 찔레꽃 탱자꽃은 더욱 크로즈업 되고, 타향 꽃은 페이드아웃 됨을 느낀다. 타향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 후, 결국 마음 속엔 고향 친구가 남는다. 그때가 환갑 이후일 것이다. 

 봄이 깊어가면, 꽃은 시나브로 낙화 되어 떨어진다. 나는 떨어지는 꽃잎 보며 추억의 <꽃 길>을

홀로 산책하곤 한다. 비단보다 고운 <꽃 길> 밟으며 문득 소년이 된다. 고향으로 간다. 세월 속에 흘러간 사람, 그리운 사람이 꽃으로 나타난다. 꽃마다 사연이 담겨있다. 이제 꽃은 나에게 말 없는 말 건네는 벗이다. 사람은  멀리서 들리는 음악처럼, 달빛 속 실루엩처럼, 희미하다. 그립지만 말이 없다. 그러나 얼마나 슬프고 감사한 일인가. 사람은 가도, 봄마다 그가 생각나는 꽃은 다시 핀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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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10.06.07. 07:20
이건 수필이 아니라 한편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줄장미 처럼 엮어서 종내는 봉숭아쏯 찔레꽃 탱자꽃 냄새를 풍기게하는 신기에 가까운 필치에 감탄을 보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찔레꽃 향기가 지금 온 방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추억의 꽃길 저도 걸어봅니다 봉화
 
 
이영성 10.06.07. 09:49
사람은 가도 그가 생각나는 꽃은 다시피는것에 감사해야한다는 말씀 가슴에 새기려네.
 
 
이진표 10.06.07. 11:09
꽃은 모두 좋지만 고향 꽃길의 꽃은 더 좋네요. 거사님의 꽃 사랑은 유별합니다. 부럽습니다.
 
 
천성산 10.06.07. 20:17
시간이 흘러도 김현거사님의 글솜씨는 그대로 변함이 없나 봅니다. 내 언제인가 학창시절 " 꽃지는 마을에 서러운 전설이 진다" 는 풋내나는 시를 쓴적이 있는데 이 글 읽으면서 내가 그 시절의 꽃길을 걷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보았습니다.
 
 
웅석 10.06.11. 17:16
"곷길"을 읽으면서 수필글이 좋은 글임을 새삼 느낍니다. 잘 읽었습니다. 진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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