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장미뿌리를 깍으면서

김현거사 2011. 1. 19. 10:56

장미뿌리를 깍으면서|隨筆
김현거사 | 등급변경 | 조회 37 |추천 0 |2010.06.16. 11:15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349 

장미뿌리를 깍으면서

 

 미인박명이랄까.봄철마다 창 밖에서 하얀 향기 던지던 미인이 떠나버렸다.가장 아끼던 백장미가 이유도 모르게 죽었다.간혹 식탁에서 차 마실 때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러시아 국민가수 알라푸카체프의 노래처럼 '백만송이 장미'는 선물 못해도,아침마다 이렇게 싱싱하고 향기로운 장미꽃을 선물하는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소?초보들이나 장미꽃 사들고 오지.' 어쨌던 장미를 키우는 일은 우아한 일이다.창 밖 덤불에서 백장미 향기 풍겨오는 식탁 위 크리스탈 잔에 한송이 싱싱한 백장미를 꽂아보라. 마시는 차는 더 향기롭고,빵 하나 우유 한 잔의 조촐한 식사도 더 격이 있다.앞마당 뒷마당에 장미꽃피면 친구 부르는 일도 장미 키우는 보람이다.

 간혹 가위로 장미를 꺽다가 손가락을 찔리기도 한다. 그때면 스위스 론강(江) 근처 한 고성(古城)에서 장미 키우며 시작(詩作)에 몰두하던 릴케 생각한다.그는 장미가시에 찔려 죽었다. 그의 비석에는  유언장에 미리 써놓은 장미를 읊은 시가 새겨졌다고 한다.릴케의 죽음은 이태백의 그것처럼 낭만적이다.이태백은 채석강의 달을 건지려다 빠져죽었다.두사람 다 시인답다. 

 모든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이 있는 것.가버린 장미를 어떻게 하겠는가.애석한 마음으로 삽으로 장미 뿌리 캐내고,그 자리에 옥잠화를 심었다.그런데 땅 속에 생각지 못한 보물이 있었다.장미 뿌리는 귀한 것이다.장미 뿌리로 만든 파이프는 애연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물건이다.

  나는 젊은 기자 시절 '하루방' 잎담배를 파이프에 담고, 편집국 안을 겁도없이 다녔다.명동에 가면 라이타와 파이프 파는 노점이 있었다.신사는 상아 빨뿌리나 파이프를 물어야 더 멋 있는 법이다.라이타는 찌포라이타, 파이프는 장미뿌리 파이프가 가장 갖고싶던 물건이었다.장미파이프란 얼마나 멋떨어진 신사용 고급 액서세리 였던가.나는 명동에서 장미파이프를 몇번이나 손으로 만지락거리며 미끄러운 감촉을 느껴보고,입에 물어보고,장사꾼에게 가격을 묻곤 했던가.그러나 그것은 위낙 고가였다.그래 나는 한숨을 쉬며, 어느 항구의 목로주점 마도로스가 쓰던 것인지,동두천 미군부대 어느 누가 쓰던 것인지, 평범한 나무로 만든 족보 없는 싸구려 파이프를 사와서 애용한 것이다.

 임어당이나 보들레르가  어느 날 자기 정원에서 나처럼 멋진 장미 뿌리를 발견했다면 어쨌을가.틀림없이 기겁을 하며 반가워했을 것이다.헤밍웨이나 꽁초 오상순 시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모든 존경할만한 작가들은 당연히 담배를 피웠고,장미뿌리 파이프의 가치를  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장미 뿌리를 다듬기 시작했다.흙 속에 묻혔던  뿌리 모양은 충분히 기괴하였다.퉁퉁한 둥치는 오래된 향로 같았고, 이리저리 얽힌 잔뿌리는 문어 다리처럼 꼬였다.피부가 발가스름한 것,뿌리에서 향기가 나는 점도 끝없는 상상을 자극하였다.도대채 이 뿌리 어느 구석에 그처럼 아름다운 흰빛과 순결한 향기를 감췄던 것일까.뿌리를 이리저리 뒤척여보았다.지하에서 그처럼 향기로운 시심을  품었다가 꽃을 피우는 점은 마치 시인 같기도 했다.이런저런 생각하며 굵은 철사로 뿌리 사이의 흙을 하나하나 털어내는 작업 자체가 무쌍의 즐거움이었다.고고학자가 땅 속에 묻혔던 오래된 유물 조심스레 만지는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이었다. 

 나는  설악산에 가면 기묘한 나무 뿌리나 죽은 소나무 옹이로 만든 기념품 가게 앞을 오래 서성거린다.거기에선 풍우에 씻겨진 세월과 나무가 간직한 산의 비밀 향기가 풍겨온다.한번은 지리산 청학동 목계마을 '다오실'이란 찻집에서 산 속에서 목각을 하며 사는 한 기인을 만났다.물소리 들리는 그의 찻집엔 지리산의 갖가지 나무들이 생긴 모양 그대로 찻숫깔로 변해진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작품들은 나무의 자연적 멋을 재현했고, 재치를 보여주었고,이름 모를 예술가의 자연을 다루는 안목을 표현했다.지리산 골짝골짝 돌아다니며 기묘한 나무 가지를 수집하여 목각을 만든 오랜 생활을 보여주었다.

 나는 한참 무아의 경지에 들어 장미 뿌리 껍질 벗기고, 뿌리 사이의 흙을 제거하여 구부러진 뿌리의 곡선을 완벽히 들어낸 후에사, 내가 난관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장미뿌리라고 모두 파이프 되란 법 없다.크기도 너무 크고 모양도 파이프 모양이 아니었다.나는 '다오실' 주인이 아니었다.파이프도 어렵고 향로도 어렵고,완전히 진퇴양난이었다. 나의 상상력과 예술적 창의력은 딱 막히고 말았던 것이다.그렇다고 이리 귀한 걸 얻어놓고 어쩌란 말인가.매사엔 임자가 있는 법이다.언제 한번 청학동에 가서 목각선생한테 자문을 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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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10.06.16. 15:34
장미뿌리로 만든 멋진 파이프를 물고있는 거사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어쩌지요 애석한 생각에 어디가서 근사한 장미뿌리를 캐어다가 선물하고 싶은데 거사님 좋은날이있을겁니다 기다리셔요 봉화
 
 
정목일 10.06.16. 17:20
김현 거사의 호방함과 운취와 멋이 풍기는 좋은 수필이다. 향기롭다.
장미 뿌리로 만든 파이브라? 밤배를 피지 않지만, 풍류객의 필수품 같아 보인다.
 
 
이진표 10.06.16. 21:11
장미꽃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 장미뿌리에 맺혔습니다. 귀한 걸 구해 놓고 어쩔 줄 모르는 거사님, 뿌리를 그냥 뿌리로 보이지 않는 심안,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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