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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

김현거사 2022. 3. 5. 07:33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

달빛 아래 보는 매화가 가장 아름답다. 그때 매화나무 줄기는 희미한 수묵화가 되고, 꽃잎은 화선지에 그린 그림이 된다. 실바람이라도 불면, 꽃잎은 달 아래 거니는 월궁항아의 얼굴이 되고, 청량한 향기는 말 못 할 사연을 지닌 여인의 체취가 된다. 매화는 그날 날씨와 시간에 따라 운치가 다르다. 같은 매화라도, 아침 이슬 맺힌 매화, 청명한 날 매화, 안개 낀 날 매화, 달 아래서 보는  매화가 다르다. 매화나무는 대개 오랜 풍상을 겪은 고매(古梅)일수록 귀하고, 노인처럼 바위 옆에 비스듬히 서 있는 매화일수록 귀하다. 매화는 산매(山梅), 강매(江梅), 원매(園梅), 반매(盤梅)가 있으나, 그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오랜 성곽이나 고찰에서 볼 수 있는, 허리가 굽고, 세월의 흔적으로 표피에 푸른 이끼가 무수한 태점(苔點)을 찍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나무이다. 찻잔 속 매화도 즐길만 하다. 깔끔한 청자 잔도 좋고, 투박한 이조 다완()도 좋다. 청자 잔은 매화를 고결하게 하고, 백자 잔은 매화를 애련하게 만든다. 매화차는 먼저 눈으로 젖은 매화꽃을 구경하고, 그 후에 코로 향기를 음미하는 것이 순서이다. 매화차 만드는 물은 바위 틈 석간수와 대숲 아래 샘물이 가장 좋다. 매화차 마시는 장소는 작은 연못가 초당이 좋고, 대나무가 몇 그루가 있으면 더 좋고, 고요한 산사의 풍경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면 더 말할 나위 없다.

매화의 멋을 알고나면, 누가 가장 매화를 사랑했던 사람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시를 썼고, 그림을 그렸고, 매화에 얽힌 고사를 남겼다. 신흠은 '매화는 한평생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잃지 않는다'라고 했고, 조희룡은 매화 벼루에 먹을 갈아 매화 병풍을 그렸고, 그 병풍 아래 누워 잠을 잤다. 맹호연(孟浩然)은 기암절벽에 눈 쌓인 봄, 나귀 타고 매화를 찾아나섰다. 답설심매(沓雪尋梅)의 고사가 그것이다. 북송(北宋)의 시인 임화정(林和靖)은 서호(西湖)의 북쪽 고산(孤山)의 매림(梅林) 속에 집을 짓고,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살았다.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매화를 사랑한 사람으로 퇴계 선생을 빼놓고 갈 수 없다. 선생은 48세에 부인과 아들을 잃고 홀로 단양군수로 부임했다고 한다. 거기서 관기 두향(杜香)을 만났는데, 두향은 당시 18세로 매화처럼 깨끗한 살결에 옥같은 자태를 지닌 빙기옥골(氷肌玉骨)이었을 것이다. 그 두향이가 선생에게 매화분재를 선물하자 두 분은 자연스레 같이 매화의 운치를 논했을 것이고, 뒤에 도담삼봉 옥순봉 같은 곳을 유람했을 것이다. 두향은 옥같은 흰 손으로 샘물을 길어와 차를 따랐을 것이고, 선생은 시를 읊었을 것이다. 

이렇게 상처한 49세 선생의 마음을 달래주던 소녀를 남겨두고 9개월 만에 선생이 풍기군수로 떠날 때의 아픔은 어떠했을까. 두향은 그때 선생에게 수석과 매화 분재 한 점을 선물했다고 한다. 선생은 그날 받은 매화를 공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69세에 고향 안동에 돌아와서 임종하실 때까지 21년간 곁에 두고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귀향하자 도산서원 앞마당 연못가에 매화를 심어놓고, 매화를 매형(梅兄)으로 호칭했다. 벼루는 매화가 그려진 벼루를 썼고, 걸상은 매화가 새겨진 걸상을 썼다고 한다. 노후에 병이 깊어지자, 매화에게 자기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민망하다며, 화분을 다른 방에 옮기라고 했고, 임종 시에도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란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또 선생은 매화 시첩(梅花詩帖)을 만들어 91수의 매화시를 남겼다. 두향이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매화시를 91수나 만들었을까. '누렇게 바랜 옛책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 한번 헤어진 후 두향이를 다시 만난 적은 없지만, 두향이는 선생의 가슴속 한송이 매화였다. 선생이 단양을 떠나자, 두향이는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살다가, 어느 날 부음을 접하자, 4일간 걸어서 안동의 상가를 방문하고 돌아와, 곡기를 끊고 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단양의 푸른 물가에 두향의 묘가 남아있다. 두향이는 매화의 혼이었던지 모른다. 나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매화를 사랑한 사람은 많지만, 두 분처럼 고결한 사랑을 나누다 간 사람은 듣지 못했다. 두 분이야말로 만고 청향(萬古淸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문인협회 한국문학인 202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