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에서 만난 사람
지금도 김하정의 '호반에서 만난 사람'이란 노랠 들으면, 50년 전 여름 상주 해수욕장과 희영이 음성이 생각난다. 그때 증이란 친구가 진주시 상봉동에서 기타 학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대학생이라 하늘에 뜨가는 흰구름만 봐도 맘이 설레던 때다. 그런데 마침 사범학교에 교생 실습 나온 여선생들이 학원에 들렸다. 그때사 하늘에 뜨가는 흰구름만 봐도 맘이 설레던 때다. 방학 중인 남자들은 여선생들과의 데이트를 은근히 기대했다. 서로 이야기가 잘 되어 노량에 가서 배를 전세 내어 남해 상주로 갔다. 모든 비용은 김영도 병원장이 부담해주셨다. 그분은 음악을 좋아했고 증이와 친했다.
이쪽은 해군사관학교 제복을 입은 발이, 고대생인 걸이와 나, 그리고 성증, 강호전이고, 그쪽도 숫자를 맞추었다. 처음 중앙로터리 버스 터미널에 그들이 나타났을 때, 나는 좀 실망했다. 젊은 때는 얼굴부터 본다. 얼굴도 옷차림도 평범한 것 같고, 몇은 평범 이하였던 것 같다. 명문대 대학생과 사관생도 저울 추가 그땐 좀 무겁던 시절이다. 좌우지간 노량에서 배를 타자 바다는 소금 냄새를 풍겼고 갯바람은 싱그럽게 뱃전을 때렸다. 그런데 선상에서 한 여선생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미모도 아니었고 날씬한 몸매도 아니었다. 그러나 통실통실한 몸매가 귀여웠고, 안경을 쓴 눈빛이 지적이었다. 내가 닦아가서 말을 걸자 상냥하게 대꾸해주었는데 둘 다 기존에 사귀는 사람이 없어 그랬던지 금방 친해졌다. 처음 해보는 낮선 이성과의 대화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깊어졌다. 청춘이란 그런 것인가. 두 사람은 배가 남해에 닿기도 전에 남다른 사이가 되고 말았다.
상주 해수욕장은 뒤에 금산이 높이 솟아있고, 울창한 송림 앞에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좌청룡 우백호로 산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고, 물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정면의 바다속 작은 섬은 아담했다. 우리는 먼저 파트너를 정한 후 탁구도 치고, 백사장에서 조개도 잡았다. 저녁을 먹고 한 사람씩 짝을 지어 백사장 이쪽저쪽으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흩어졌다. 날이 어둡자, 바다 위엔 달이 떴다. 나는 이희영 선생과 따뜻한 모래톱에 나란히 앉아, 푸른 파도 위로 끝없이 밀려오는 하얀 은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밀려오는 건 파도와 은파만이 아니었다. 감정도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닐 세다카의 '그대는 나의 모든 것(You Mean Everything To Me)'이란 노랠 불렀다. '당신은 내 외로운 기도에 대한 대답입니다(You are the answer to my lonely prayer). 당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입니다.(You are an angel from above). 당신이 놀라운 사랑으로 내게 오기 전까지는 나는 무척 외로웠습니다.(I was so lonely till you came to me With the wonder of your love). 희영이는 김하정의 '호반에서 만난 사람'을 불렀다. '파란 물이 잔잔한 호숫가의 어느 날. 사랑이 싹트면서 꿈이 시작되던 날. 처음 만난 그 순간 불타오른 사랑은, 슬픔과 괴로움을 나에게 안겨줬네' 희영이의 노래는 어떤 편이냐 하면, 부드러운 바이브렛이 김하정 같았다. 아니 김하정 보다 더 고왔다. 파도 때문에? 은파 때문에? 나는 희영이 노래 들으며 완전히 그에게 반해버렸다. 그 밤이 새기 전에 나는 내 청춘의 이력서를 그에게 다 털어놓았다. 상처 받은 첫사랑 이야기, 친구의 자살. 군 입대. 제대 후 남해와 욕지도를 2년간 헤매다가 세 가구가 사는 '풀이 섬'에서 동백꽃처럼 아름다운 처녀 만난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희영이도 자기 내력을 다 털어놓았다. 집이 거제도 장승포인 것, 아버지는 승마를 하셨다는 것, 어머니는 곰장어를 즐기는 분이라는 것, 집의 무화과나무 낮은 울타리. 그 너머 지심도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상대에게 모든 걸 완전히 다 털어놓았고, 상호의 신뢰가 깊어갔다.
나는 그에게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란 소설을 읽어봤느냐고 물어봤고, 그는 읽었다고 대답했다. 그도 나처럼 문학을 좋아했다. 그는 '첫사랑'의 여주인공 '아샤'처럼 예민하고 정열적이었다. 둘은 완전히 코드가 일치했다. 나는 그날 처음 영혼이 일치되는 처녀와 대화를 해보았다. 무언의 약속이 굳어진 밤이 지나자, 이튿날 해변의 보트 옆에서 사진을 찍을 때 희영이는 내 신발을 신고 찍었다. 큼직한 내 신발 안에 자기 작은 발을 담고 싶었던 것이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황홀한 여름은 처음이다.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올 때였다. 기차는 진주서 서울까지 12 시간이 걸린다. 그 12 시간 내내 눈앞에 희영이 얼굴만 보였다. 귀에 희영이 목소리만 들렸다.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질 않고 들리질 않았다. 나는 희영이란 열병에 걸린 환자였다. 서울에 오자마자 편지를 썼고, 희영이도 편지를 받자마자 답장을 보냈다. 둘은 서로 경쟁하듯 편지를 주고받았다. 불꽃이 진주와 서울 사이로 날라다녔다. 나는 매일 학교 우체함 근처를 맴돌고 공부는 뒷전이 되었다. 이러다간 문제가 생긴다 싶어 추석에 진주로 내려갔다. 당장 결혼 약속을 받아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버들잎이 노랗게 물든 신안동 강변에서 희영이는 어머니가 반대한다는 이야길 했다. 어머니는 군의관 청년과 결혼하지 않으면 모녀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나는 '우리가 우연히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사람일 수는 없다'라고 강변했다. 희영이 선택을 믿는다는 말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고, 그리고 어느 날 소포를 받았다. 그 속에는 그동안 내가 보낸 편지 뭉치가 들어있고, 메모 한 장이 붙어있었다. '낯선 도시 아스팔트 위에 외로이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현이 보낸 편지 모두 동봉합니다. 희영이와의 만남은 남해의 추억으로 접어주세요. 안녕!'
지금도 김하정의 '호반에서 만난 사람'이란 노랠 들으면, 50년 전 여름 상주 해수욕장과 희영이 음성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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