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천리길
모 건설회사 다닐 때 한계령 장수대에서 만난 여인을 잊을 수 없다. 그 분은 서울대 영문과 출신으로 미모에다 거침없고 화려한 말솜씨를 가진 분이었다. 장수대란 곳이 설악산 국립공원 안이라 여간해서 건축허가 나지 않는 곳이다. 거기 허가 내고 건물 짓는다면 보통 사람은 아니라 짐작 했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나보다 년상이기는 했지만 공사 수주차 내가 마련한 자리에서 여자분이 먼저 술을 청하던 그 뱃장이다. 호젓한 산속에서 미모의 여인이 술 마시자는데 세상 어느 남자가 속으로 싫어하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나도 술은 제법한다. 첫 잔 ‘간빠이!’하면서 은근히 이거 뽕도 따고 임도 보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초면에 흔히 그러듯 서로 고향을 묻다가 내고향이 진주란 데서 이야기가 급물결을 탔다.
'김상무 고향이 진주라고 했오?’
그 분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진주라 천리길, 그 진주라 했오?’
진주라는 지명을 두번 반복하며 깊은 사연 있는 듯 날 바라보는 품이 뭔가 사연이 있긴 단단히 있는듯 했다.
‘진주라면 내가 사연 깊은 곳이요. 김상무 오늘 당신 나하고 끝까지 마실 수 있겠소? ’
이렇게 의외로 시동을 거는 지라, 나도 장군에 멍군하는 식으로 응수하였다.
'선배님 실례지만 저도 절세미인과 마주앉는 이런 자리는 절대 피하는 성질이 아닙니다. 먼저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보따리가 풀어졌다. 그분은 대학 졸업하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때 일본에 파견되어 그곳 정재계 인물의 동태를 살피는 요원이었다고 한다. 영어 일어에 능통한 데다 미인에다 뱃장 좋아 중앙정보부 요원 중 A급이었다 한다. 그래 하늘 높고 땅 넓은 줄 모르고 미국이다 일본이다 설치고 다니며 세월 보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주변을 살펴보니, 똑똑하던 문리대 동기들이 전부 장가 들었고,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보니 진주 출신 한 동기만 남았더라고 한다. 부랴부랴 열 몇시간 기차 타고 진주에 가서 술도가집 그 친구를 만나 남강 백사장을 거닐며 결혼 했냐고 물어보니,
‘일주일만 먼저 오지. 바로 며칠 전에 약혼했다.’
하더란 것이다. 하도 아깝고 억장 무너져 밤새 촉석루 달빛 아래 거닐다 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서! 나 그래서 진주 소리만 들어도 가슴 아파. 김상무 나 이해하지? 오늘 밤 당신하고 한번 만취해 봅시다.’
술도 몇순배 돌았겠다. 이럴 땐 남자가 무드 좀 잡을 줄 알아야한다.
'선배님 제가 40년 전 진주 유행가 한곡조 불러드릴까요? ’
나는 '진주는 천리길'이란 노랠 불렀다. 이 노래는 원래 '은주의 노래'란 제목으로 이재호 선생이 작곡하고 손인호가 부른 노래다. 그후 '진주는 천리길'이란 이름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진주의 고급 요정 ‘신미관’에 대학생 딸이 있는데, 부잣집 아들과 사귀고 있었다. 그 딸을 사모하는 청년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는 고등고시 준비하는 고학생이었다. 딸은 부잣집 아들을 선택해 함께 서울로 떠났으나, 이들의 화려한 생활은 잠깐 뿐, 남자는 여자를 배신하고 떠나버린다. 여자는 자살을 시도하나 미수에 그치고 낙담에 빠져있던 중 친구의 소개로 요정 ‘등선각’의 기생이 된다.
어느 날 고등고시에 합격한 청년이 찾아와 모든 것을 용서한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그때 유명한 신파조 대사 '저는 화류계 여자, 기생의 자격밖에 없어요.'가 등장한다. 후일 진주로 다시 내려온 딸이 그 청년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가 다른 여자와 막 결혼식을 마치고 공회당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눈물 짓는다. 이 장면에서 영화 주제가 ‘은주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반겨줄 님이라서 찾아왔건만 발길을 돌려야 할 사람이었네
상처진 가슴 안고 울고 갈 길을 어이해 내가 왔나 진주는 천릿길
사랑에 버림받은 서러움 속에 오로지 그 사람의 행복을 빌며
모두가 운명인 걸 원망하랴 청춘의 슬픈 노래 진주는 천릿길
내가 '은주의 노래'를 2절까지 완창하자, 그분은 '아니 진주 남자들은 다 이런 멋쟁이로 잘 생겼어?’ 사랑스럽다는 듯이 섬섬옥수로 내 손목을 잡고 쓰다듬으며 날 쳐다보았다. 강원도가 고향인 최각규 부총리가 서울대 후배고, 도지사가 큰누님 모시듯 깍듯이 대한다던 그분이다. 장미는 늦가을에 더 요염하다. 멜랑코리에 젖은 애잔한 늦가을 장미가 날 쳐다보던 그 눈빛 잊을 수 없다. 그날 나는 술도가 그분의 여동생 원인순이가 내 초등학교 동기고, 지금 영등포 구청 앞에서 복요리집 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김상무! 내가 오늘 당신한테 청춘고백 한 셈이지? 이 담에 건물 완공되면 여기 2층에 깔끔한 일본식 우동집 하나 할 생각이야. 한계령 지나가면 반드시 날 찾아보고 가소. ’
이렇게 시동생 대하듯 하시던 그 분과 곤드레만드레 취한 적 있다. 지금도 장수대 지나가면 그분 생각난다.
(경남진주신문 2018년 5월1일 게재)
'잡지 기고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반에서 만난 사람 (0) | 2022.03.04 |
---|---|
흘러간 명화들 (0) | 2020.03.08 |
晉州 八景/경남진주신문/ 2018년 5월22일자 (0) | 2018.06.15 |
고향의 강/ 2018년 6월12일 경남진주신문 (0) | 2018.06.15 |
살만한 터를 찾아서/지구문학 2018년 여름호 (0) | 2018.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