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향의 시냇물

김현거사 2011. 1. 19. 10:50

    고향의 시냇물

 

 누구나 고향 생각하면 화가가 되고 음악가가 된다. 고향이 한 폭 아름다운 수채화로 떠오르면 화가요, 물소리가 한 소절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면 음악가다. 

  최근에 유화를 시작하면서 고향을 그려보기로 했다. 서투른 솜씨지만 캔버스에 옮기는 일은 나름대로 뜻있다 싶어, 우선 내가 잘 아는 시냇물을 그려보았다. 그 시내는 그냥 작고 평범한 시내다. 그러나 그것은 어릴 때 함께  소꿉놀이 하고 놀던 여자애 같다.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지 않는다. 안개 속의 산처럼 신비롭다. 세월이 갈수록 그리움이 쌓여, 나중에 그것은 한 편의 시가 된다.

 

   우리 할아버지 집은 신안동 언덕 위에 있었다. 큰 정자나무 선 타작마당과  대밭이 집을 감싸고 있었다. 부드러운 능선은 바람에 흔들리는 청보리밭에 덮혀 있었다. 앞은 넓은 들판이고, 뒤는 청보리밭으로 꼬불꼬불 내려간 산길 끝 작은 동네에 닿았다. 

 거기 작은 우물 곁에 우리 논이 있었다. 논가에는 어릴 때 내가 입술 까매지도록 오디 따먹던 늙은 뽕나무가 있었다. 뽕나무는 코발트빛 하늘과 목화송이 흰구름을 몇 점 머리에 이고 있었다.

 낮으막한 야산을 돌아흐르던 시냇물은 얼핏 보기엔 너무 평범하였다. 그러나 내 소년 시절 보물이 거기 다 있다. 빨간 산딸기와 하얀 찔레꽃과 망개나무 빨간 열매를 물에 비쳐주며 흘렀다. 물속에는 예쁜 조약돌과  바람에 씻겨진 부드러운 모래가 깔려 있었다. 다슬기와 고동이 있었다. 나는 거기 예쁜 조약돌을 만지며 놀았다. 황혼에 피라미가 물 위로 점프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새벽에 젖은 물가에 찍어놓은 깜찍한 물새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 작은 개여울이 내가 타향에 살면서 가장 그리워한 풍경이다. 나는 내 유년시절 이 시냇물을 고흐가 아를의 교외 풍광을 그린 것처럼, 한번 강렬한 텃치로 그려볼 작정이다.  

 

  나는 그 과수원 집과 시냇물도 꼭 그려보고 싶다. 남강 건너 약수암이란 절이 있었다. 절 아래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게 핀 산골짝이 있었다. 물에 연분홍 꽃잎이 떠내려 오곤 했다. 거기 징검다리는 맨발의 과수원집 어린 소녀가 놀던 곳이다. 그가 띄운 고무신 배는 넘실넘실 물결 따라 흘러갔다. 소녀의 뺨은 부드럽고 고왔다. 베잠방이 소년이던 나는 항시 소녀 곁에서 놀고 싶었다. 과수원 한 켠 공터에 낮으막한 원두막이 있었다. 하늘엔  빨간 잠자리가 떼지어 날고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을 한번 르노와르처럼 그려보고 싶었다. 그의 '모자를 쓴 소녀'처럼 부드러운 소녀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 복숭아꽃 곱던 산골 과수원과 빨간 잠자리 떼를 꼭 한번 그려보고 싶었다.

 

 나는 지리산 밑에서 자라 산골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시냇물 위에 걸쳐진 섶다리를 그려보고 싶었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이 맑은 물에 거울처럼 비치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주렁주렁 열린 늙은 감나무 홍시와  처마에 풍경이 달린 절을 그려보고 싶었다. 백도라지 핀 밭과 물방아간과 그 옆의 시냇물을 그리고 싶었다. 

 

  시냇물은 강이 되기 전의 작은 흐름이다. 시냇물은 강처럼 깊고 푸르지 않지만, 강의 원천이다. 우리 그리움의 출발점이며, 추억의 발원지다. 강 보다 오히려 더 어리고 다정하다. 우리가 소나기 올 때 토란 잎을 우산처럼 받치고 뛰어다닌 곳이고,  덤벙덤벙 옷 적시며 송사리와 물방개 잡던 곳이다. 원두막에서 빗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풀피리 불던 곳이고,  밭두렁 종달새 소리 듣던 곳이다. 밤하늘에 날라다니는 반딧불 쫒고, 별빛 어린 냇물가에 밤마다 울어대던 개구리 울음소리 듣던 곳이다.  함초롬히 이슬 맞은 박꽃이 피던 고향은 하늘빛마저 얼마나 그리운 곳인가. 그 하늘 아래 다정한 시냇물이 있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내가 이 시냇물을 그리려고 작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싶다.

 

 

 
정목일 10.07.06. 08:13
김창현의 서정과 감성의 텃밭을 짐작할 수 있다. 진주인의 가슴 속에는
지리산이 솟아있고 남강이 흐르고 있다.
 
 
이영성 10.07.06. 11:17
유화에 까지 매진하는 친구의 노익장에 박수를 보내며 언젠가 자네가 그린 시내냇물 안주삼아 탁주일배 할 날 있기 바라네.
 
 
봉화 10.07.07. 19:47
저는요 바다 보다 강 보다 시냇물을 더 좋아하거던요 시냇물만 한 20여점 그려서 인사동 풍류사랑에서 전시회를 한번 열어보면 어떨까요 제발 그렇게해요 봉화
 
 
농암 10.07.08. 13:03
고향에 대한 많은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를 지니시고 살아오신 그 자체도 예술이온데 ,더더욱 그것들에 대한 시서뿐 아니라 화폭에도 담아보시려는 거사님의 그 용광로 같은 열정은 다 어디서 나오시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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