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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인이다>

김현거사 2019. 10. 11. 15:24

  <나는 자연인이다>


산중에 무엇이 있느뇨?(山中何所有) 
산마루에 흰 구름이 많소이다(嶺上多白雲) 
그러나 다만
스스로 즐길 뿐이며(只可自怡悅) 
가저다 드릴 순 없소이다(不堪持贈君)  
 

이 시는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그의 친구 도홍경(陶弘景)이 구곡산(九曲山)에 들어가 은둔하자 불러내기 위하여 산중에 무엇이 있어 나오지 않느냐고 물은데 대한 답시이다. 도홍경은 일찍이 무제와 절친한 친구였고, 무제가 제나라를 공격하고 새로 나라를 세울 때 양(梁)이라는 국호를 도홍경이 지어 주었다. 무제는 그를 정치 참모로 곁에 두고자 했는데 산중에 들어가버려 아쉬워하면서 사람을 보내 자주 자문을 구했기 때문에 그를 산중재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나같은 사람이 도홍경 이야기를 꺼내면 분수에 맞지않는 참람(僭濫)한 짓이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태어난 곳이 전원도시 진주라서 그런지, 늘상 '새는 옛 숲을 그리워 하고, 고기는 옛 연못을 생각한다(覇鳥戀舊林 池魚思故淵)'는 도연명처럼 자연을 그리며 살아왔다.  

 그래 서울 생활 50년 동안 아파트 빌라 단독주택 할 것 없이 줄곧 1층에 살면서, 마당에 꼭 감나무를 심었다. 시간 나면 고향 근처 절이나 지리산을 찾았고, 집에 있을 적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겼다. 그 바람에 명동 출생으로 덕수초등부터 시작한 완전 서울내기 아내와는 남모르는 고충이 많았다. 서울 밖이라곤 외가가 있는 부평에 가본 것이 전부인 아내는 현실에 아무 도움 되지않는 <자연인> TV 프로그램이나 한가히 보는 내가 마치 와싱톤 어빙의 소설에 나오는 <립반 윙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 뉴스 본다며 남이 열심히 시청하고 있는 챈넬을 딴데 돌려버리기 일쑤요, '자연인이란 사람들이 입성도 사는 곳도 지져분해서 보기 역겹다'는 비우호적인 표현을 꺼리낌 없이 하곤 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나는 애초에 산속에 초당 지어놓고 아침엔 코로 이슬 맺힌 야생화 꽃향기 맡고, 귀로 숲에서 지져귀는 새소리 듣고, 골동품 주전자에 차 끓이는 연기 올리며 시나 수필 쓰며 사는 팔자는 애초에 아닌 셈이었다. 이태백처럼 친구와 술을 마시며 산에 핀 꽃을 감상하다가 '오늘 나는 여기서 잠을 자려하니, 그대는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생각이 나면 거문고 들고 찾아오게' 라고 말 할 팔자도 아니고, 도연명처럼 '동쪽 울타리 앞에서 국화를 꺽어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볼' 더물 


 살기도 틀렸거니와기는 은근히 섞인 표현을 책임감 없이 것은 완전 시간 낭비요 이나 한가하게 시청하는 꼴을 보기 싫어한다.

 

 그러다보니 맘 속으로 늘 자연으로 탈출하는 꿈을 꾸곤 했다. 나는 테헤란로에 빌딩 가진 사람 보다, 낮엔 차밭 가꾸고, 밤엔 골동품 주전자에 차 끓이는 연기 올리며 시를 쓰는 화개골에 달빛초당이란 초당을 지어놓고 사는 친구를 더 부러워 하는 사람이다. 코로 아침 이슬 맺힌 야생화 향기  맡고, 귀로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 듣고 사는 것이, 노년의 가장 큰 행복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한 때는 별거하여 혼자 지리산 어디메로 가서 살겠다는 아내에게 약간 불손한 사상조차 가지고 살았던게 사실이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집에서 사느냐, 아니면 지리산에 가서 혼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 햄릿처럼 고민했다. 그런 어느 날 마당쇠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하던 모세처럼 하늘로부터 어떤 하나의 영감을 얻었다. 그건 가히 코페르닉스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건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코페르닉스의 지동설 같은 거였다. 나는 ' 내가 산으로 찾아가서 입산할 것이 아니라, 산을 내 옆으로 끌어온다'는 새로운 사상을 창안한 것이다. 나는 새로운 사상을 창안한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도시의 모든 인류가 풀지못한 고민을 단숨에 해결한 이 코페르닉스적인 발상의 전환을 '신자연인 사상'이라 칭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 살다보면 누구에게 배신 당하여 잠못 이루는 밤이 있다. 마당쇠도 그런 쓰라린 시간이 있었다.마당쇠는 살을 맞대고 사는 마님이 전혀 모르는 과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당쇠는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이다. 사람은 세상 살다보면 누구에게 배신 당하여 잠못 이루는 밤이 있다. 마당쇠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그때 마당쇠는 속초 모 대학에서 매주 세 시간 비서학 강의를 나갔다. 양수리 지나가면 새벽 강물 위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신비롭다. 그 모습을 보며 혼자 가노라면 신기하게도 마음 속 고뇌가 사라지곤 했다. 자연이 의사다. 인제 상동리에서도 그런 체험을 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박인환의 시비 앞에 차를 세우면, 거기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잎이 보인다. 그게 그냥 한 첩 보약이다. 그 향기, 그 흔들림이 그대로 마당쇠의 마음을 위로 해주었다. 원통 어느 이름 모를 계곡의 물속을 헤엄치던 피래미도 그랬다. 차 세우고 혼자 물가에 앉았노라면, 간혹 피래미가 물 위로 점프하곤 했다. 그 싱싱한 생명력의 비상, 그것이 마당쇠의 피로한 신경을 파동으로 치료해주곤 했다. 그런 상태는 마당쇠가 다시 양평 지나 서울로 입성하면 흐려지곤 했다. 서울 하늘 뒤덮은 매연처럼 서울에만 오면 스트레스로 다시 나타나곤 했다. 그 후로 마당쇠는 자연이 병을 고치는 명의임을 확신했다.

 

 그래 마님이 TV 챈널 선택권 독점하여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까지 못보게 억압하자, 별거하여 혼자 입산하는 수 밖에 없다는 불손한 사상조차 가졌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마당쇠는 햄렛처럼, '집에서 사느냐, 아니면 지리산에 가서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런 어느 날 마당쇠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하던 모세처럼 하늘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었다. 코페르닉스는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마당쇠도 ' 내가 가서 입산할 것이 아니라, 산을 내 옆으로 끌어온다'는 새로운 '신자연인 사상'을 창안한 것이다. 이런 걸 코페르닉스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한다.

후로 마당쇠는 천석고황(泉石膏肓)의 병을 완치했고, 마님의 지극한 

당나라 유종원의 강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온 산에는 새도 날지 않고
萬經人踪滅(만경인종멸)모든 길엔 사람 자취가 끊겼는데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외로운 배 위에 도롱이(사)를 거치고 삿갓(립) 쓴 노인이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눈덮힌 차가운 강에서 홀로 낚시를 하는구나

황보염 - 산 속 객사(산관)
山館長寂寂(산관장적적)산 속 객사는 언제나 쓸쓸하고
閒雲朝夕來(한운조석래)한가한 구름만이 아침 저녁 찾아온다
空庭復何有(공정부하유)빈 뜰에는 무엇이 있을까

落日照靑苔(낙일조청태)지는 해가 푸른 이끼를 비추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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