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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작은 둠벙

김현거사 2019. 8. 20. 18:13

 고향의 작은 둠벙

 

  간혹 고향의 작은 둠벙이 생각난다. 그 둠벙은 지금 신안동 아파트촌 속 어느 지점에 있다. 당시 신안동은 시내 변두리 동네다. 서장대 지나 둑 넘어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 가운데 신작로로 흙먼지 날리며 하동 가는 버스가 달렸다. 나는 강 건너 망경동에 살았지만우리 할아버지 사신 곳이 신안동 이다.

  할아버지는 낮은 야산에 올망졸망 이십여 가구 모여 살던 신안동 언덕 꼭대기에 사셨다. 거기 대밭과 과수원과 타작마당과 어른 다섯이 껴안아도 손이 마주 닿지않는 정자나무가 있었다. 내 6대조 할아버지가 심은 나무다. 앞에 남강과 강 건너 망경산 절벽이 보이던 동네 어귀에 삼촌집이 있었다. 거기 여나믄 마지기 논에 물 대려고 산에서 흘러온 물을 모아둔 작은 둠벙이 있었다. 그 둠벙은 내가 신안동 갈 때마다 놀던 둠벙이다.

둠벙가 하늘은 늘 빨간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풀섶에는 날개가 모시처럼 빳빳한 검푸른 물잠자리가 까딱까딱 꼬리를 수면에 적시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왕잠자리에만 관심을 보였다. 왕잠자리 암컷은 '또니'라 불렀는데, 몸이 호박색이고, 수컷 '수벵이'는 하늘색이다. 아이들은 '또니'를 실에 묶어 공중에 빙빙 돌린다. 그러다가 교미하러 달라붙는 '수벵이'를 살살 풀밭에 끌어내려 손으로 잡았다. 잡으면 손가락 사이에 날개를 접어 그러고 다녔다. 간혹 '또니'가 없으면 호박꽃을 따서 '수벵이' 날개와 엉덩이를 노랗게 물들여 가짜 '호박 또니'를 만들어 '수벵이'를 낚았다. 운 좋은 날은 '또니'수뱅이가 교미를 한 채 풀밭 위로 낮게 비행하는 걸 만난다. 그러면 낮은 포복으로 닥아가 실과 거미줄로 만든 잠자리채로 둘을 한꺼번에 잡기도 했다.

  하늘에 이런 공군이 있다면 물에는 또다른 해군이 있다. 거북선의 노처럼 좌우에 여러개 발이 달린 방개도 있고, 몸이 가벼워 물 위에 기름처럼 미끄러져 가는 소금쟁이도 있다. 또 초록과 검정 얼룩무늬 해병대 옷 입고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는 개구리도 있고, 개구리를 노리고 스르르 물 위로 나타나는 물뱀도 있다. 그러나 이런 건 둠벙의 주인이 못된다. 정작 주연은 몸이 납작하고 전신에 금빛 비늘 덮힌 참붕어고,  조연급은 잡으면 손가락 사이로 미끈미끈 빠지는 미꾸라지와 메기와 장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조연급을 어른들은 더 좋아했다. 사촌동생 창선이와 나는 혹시 장어가 보였다하면 바지를 걷어붙이고, 개구리밥 떠있는 풀섶을 헤치면서 옷이 다 젖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 장어를 잡으면 신이 나서 검정고무신에 담아 집에 가져갔다.

 간혹 삼촌댁 두 누이가 둠벙에 나타나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놀러 나온 것은 아니다. 메뚜기를 잡아 풀줄기에 뀌거나 사이다병에 넣어 집에 가져가 소금에 튀겨 짭조름한 반찬을 만들었다. 우리가 협조해서 메뚜기를 잡아주면, 그 댓가로 삶은 감자도 내오고, 과수원에 가서 단감을 따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세상에 그 둠벙처럼 좋은 놀이터가 없다. 둠벙에는 미끄럼틀과 그네가 없지만헬리콥터처럼 공중을 날아다니는 '또니''수벵이' 있고, 잠수함처럼 물 속을 헤엄치는 붕어와 메기가 있었다거북선처럼 생긴 방개도 있고, 뒷다리 잡으면 절로 덜렁방아 찧던 여치도 있었다. 그 모두가 신이 만든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이다. 요즘 백화점에 가면 배터리로 움직이는 자동차와 인형이 있지만, 둠벙에서 만난 것은 그런 허접한 것이 아니다. 날쎄게 하늘로 도망도 가고, 물속에 숨기도 하고, 잡히면 손 안에서 퍼더덕 거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손가락을 물기도 한다.   

 신안동이 아파트촌으로 변하면서 창선이는 논을 팔아 백억 대의 부자가 되었다. 장손이던 우리집은 더 많은 논을 물려받았지만 일치감치 처분하고 떠났다. 간혹 진주에 가면 나는 서장대에 올라가 한참 신안동 쪽을 바라본다. 거기 아파트촌 어딘가에 둠벙이 있었고, 둠벙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었고, 논둑에는 베어말리던 진한 풀냄새가 있었다. 미인은 아니지만 사촌 누이의 다정한 미소가 있었고, 삶은 고구마 갖다주던 따뜻한 정이 있었다. 신안동 바라보는 내 눈에 그런 추억들이 물 뺀 둠벙 바닥에 숨어있던 미꾸라지처럼 움직인다. 

(경남미디어 201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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