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중

46년만에 만난 스님

김현거사 2019. 8. 11. 20:28

 46년만에 만난 스님



 46년만에 설조스님을 만났다. 첫사랑이 잊히지 않는 것처럼 첫직장에서 만난 분도 그런 것 같다. 설조스님은 첫 직장 불교신문에서 만난 스님이다. 거기서 광덕, 월주, 법정, 설조 스님을 모셨는데, 광덕스님은 학승이었고, 법정스님은 문장가였다. 월주스님은 총무원장 역임한 고승이다. 그러나 설조스님은 내가 다른 신문사로 옮겼다가 기업체에서 은퇴한 후에도 가장 보고싶던 스님이다. 자상하고 다정한 미소가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모 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항상  따뜻한 미소로 사람을 대해주신 분이다. 미남에다 청안납자였다. 수행자답게 눈이 맑고 푸른 빛이다. 종단에서 알아주는 청류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전공인 동양철학을 살려 본격적으로 선(禪) 공부를 해보려고 불교신문에 입사했다. 적어도 3십년만 선에 관한 저술 섭렵하고, 선 수행 고승들을 만나보려고 했다. 그러면 한국에서 알아주는 선 이론가가 될 수 있다. 당시 인도와 중국의 이 분야가 활발치 못했다. 한국 제일의 선 이론가면 당연히 세계 제일의 선 이론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기가 모자랐다. 불교신문이 주간지라는 것이 맘에 걸려 2년 뒤 일간지로  옮겼다. 그나마 10년 뒤 '사회의 목탁'이라는 기자직까지 버리고 기업체로 옮겼다. 서울대 출신 선배 기자가 타계하여 상가집에 간 적 있다. 거기 남의 셋방에 사는 앞 길 막막한 미망인이 있었다. 나는 유난히 미인이던 그 미망인의 초라한 형색을 보고, '이래서는 않된다. 내가 무슨 지조있는 선비냐, 기자직을 버리자. 처자식 배고프게 만들지 말자.' 고 결심했다. 그래 모 재벌 자서전 써주는 작가로 옮겨,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거기서 30년 있다가 은퇴한 것이다.

 그러나 살고보니 두 번 다 코스 선택을 잘못한 것이다. 불교신문에 있었다면 학자가 되었을 것이고, 일간지에 있었다면 '사회의 목탁'이 되었을 것이다. 둘 다 버리고 재물에 몸을 던진 것이다. 나중에 계열사 사장 자리에 올라갔지만, 풍족히 산 것도 아니었고, 파란만장한 고초만 맛보았다. 모두가 남가일몽 이었다.


 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어느 날, 홰나무 아래 술자리를 차리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대취했다. 그런데 사람이 오더니 괴안국(槐安國) 왕의 명을 받들어 모시러 왔다고 말했다. 순우분은 사자들을 따라가서  왕을 알현하고 그 자리에서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어 남가군(南柯郡) 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나자, 어느 날 단라국(檀羅國)이 쳐들어왔다. 순우분은 적을 맞아 싸웠지만 패했고, 공주도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낙담하여 관직 사직하고 서울로 오자, 왕은 순우분에게 말했다. “그대는 집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으니 잠시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 어떤가? 이래서 순우분이 동굴 밖으로 나와 집에 돌아왔는데, 깨어 보니 모두가 꿈이었다. 자기는 행랑에서 자고 있었고, 일어나 보니, 하인은 정원을 쓸고 있고, 친구들은 옆에 있었다. 순우분이 꿈 이야기를 하자, 모두 기이하게 여겨 홰나무 아래를 파 보니 커다란 개미굴이 하나 있고, 개미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의 서울이며, 또 하나 구멍이 남쪽 가지 쪽으로 뚫려 있어 파 들어가니, 사십 척쯤 거리에 개미 떼가 또 있었다. 여기가 순우분이 다스리던 남가군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가 보니 밤에 내린 비로 개미굴은 모두 허물어지고 개미도 없어졌다. 순우분은 남가의 헛됨을 느끼고 도문(道門)에 귀의하였다.


 어느 문학 모임에서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그 자리서 설조스님과 통화를 시켜주었다. 내가 불교신문을 떠난 후, 설조스님은 오랜 기간 미국에 계셨고, 귀국 후 불국사 주지로 계셨고,  최근 단식투쟁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을 사퇴시킨 것이 내가 아는 스님에 대한 전부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오랜 기간 속세 풍진고초 겪은 한 중생 모시던 자비로운 미소 앞에 가서 당나라 순우분처럼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싶었다.

 마침 46년 전 우리 부부가 스님 모시고 신륵사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을 먼저 보낸 후, 아내와 북촌에 가서 스님을 뵈었다. 지금 조계종 최고 선지식이라 거사가 엎드려 큰절을 올리려니 스님이 거절하신다. 같이 근무한 광덕스님 법정스님 이야기, 도산 안창호선생 이야기, 봉은사 땅 매각 이야기가 나왔다. 봉은사 땅 매각은 그 당시 설조스님이 한 20만 평 떼어내 동국대를 그쪽에 옮기자고 제안하셨다. 역사에 만일이라는 가정법은 없지만, 만일 그때 스님 주장이 관철되었으면, 동국대는 지금 삼성동 코엑스 옆 그 엄청난 요지에 자리 잡고, 대학도 더 발전했을 것이다. 아내가 스님이 예전 신륵사 앞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싼타루치아' 불렀던 일 기억나시냐고 묻자, 고승이 가만히 눈을 감고 웃으신다.

파일받기



 년로하신 스님이다. 밥갑다고 오래 머물면 무리다. 딱 1시간 뵙고 부부가 돌아왔다. 그립던 자비의 미소는 훔뻑 보고왔다. 마음이 잠시 고향에 머물다 온 것처럼 흐믓하다. 스님은 3층 법당에서 인사 드리고 갈려는 우리를 궂이 1층까지 내려와 배웅하고 올라 가셨다.



'제작 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침 산책  (0) 2019.08.26
고향의 작은 둠벙  (0) 2019.08.20
오사리(五士里)의 하루밤  (0) 2019.08.02
김성문 아름다운 만남  (0) 2019.08.02
소중한 친구  (0) 2019.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