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모란송(牧丹頌)

김현거사 2019. 4. 5. 10:54



 모란송(牧丹頌)                                                                                                   

 

 

모란송(牧丹頌)

 

모란꽃 피는 5월이다. 세모시 사각거리는 소리 날 것 같은 것이 모란 꽃잎이요, 얇은 한지 주름 방금 다림질해놓은 것 같은 게 모란 꽃잎이다. 금분(金粉)에 용뇌향 사향을 섞은 형언하기 어려운 향기 풍기는 것이 모란 꽃술이다. 모란은 곡옥(曲玉) 주렁주렁 달린 사슴뿔 모양 관을 쓰고, 머리에 봉황과 용을 새긴 봉잠(鳳簪) 용잠(龍簪)을 꽃고, 시녀에게 일산(日傘) 받치게 하고 나타난, 천년 전 계림의 여왕을 연상케 한다.

흔히 모란을 화왕(花王)이라 부른다. 모란이 뜰에 나타나면, 모든 기화요초는 고귀한 황실의 품위 앞에 빛을 잃고 만다. 평소 청초함을 자랑하던 일본 붓꽃은 스스로 신하 자처하며 시녀처럼 머리 조아리고 발치에 엎드리고, 연분홍빛 소녀 볼처럼 귀여운 복사꽃도 둘러리 되어 한발짝 몸 움츠리고 물러선다. 농염의 자주빛 속살로 사람 유혹하던 자목련도 얼굴 붉히고 뜰 한 켠에 숨어버리고, 개나리 진달래 같은 속가(俗家) 미인은 모란이 오기 전에 진작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모란은 색깔과 자태 뿐 아니라 향기도 고귀하다. 매화 향기를 암향(暗香), 난초 향기를 유향(幽香), 모란 향기를 이향(異香)이라 한다. 매화는 빙설같은 향기를 자랑하고, 난초는 그윽한 향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달빛을 사향으로 버무린듯한 모란의 향 앞에선 모두 풀이 죽어 물러서고 만다. 이슬 젖은 모란꽃 향내는 뜰을 적시고 사람의 오관을 적신다. 그 향은 사람 피부를 뚫고 들어가 중풍이나 혈관계 질환을 고치는 사향과 비슷하다. 귀부인이 몸에 지닐 최상의 향이다. 일부 세간에서 모란이 향기가 없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모란을 모르는 이야기이다. 당태종이 자기 거울처럼 아낀 간의대부 위징(魏徵)은 백모란 향기를 시로 읊은 적 있다. 모란은 일부 대형 품종을 제외하면 향기가 깊다.

나는 항주에 갔을 때 한지에 배접한 모란 그림을 구해온 적 있다. 원래 중국 사람들은 모란을 좋아한다. 모란과 매화가 국화(國花). 주렴계는 '애련설(愛蓮說)’이란 글에서 진나라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좋아하였고(晋陶淵明獨愛菊), 당나라 이후는 사람들이 심히 목단을 사랑하였다(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고 하였다. 당현종은 침향정이란 별궁을 지어놓고 양귀비와 모란꽃 감상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하절색 양귀비는 모란꽃에 비유되었고, 화가들은 의례 모란을 그렸다.

그래 그런지 내가 구한 모란도도 예사롭지 않았다. 백모란 흑모란, 자색 모란 군식(群植) 그림인데, 담묵으로 처리한 백모란은 하얀 모시 적삼같은 은은한 운치가 있고, 먹을 살짝 묻힌 갈필로 젖은 화선지에 그린 흑모란은 아련아련한 발묵 처리가 신비롭고, 자색 모란은 대담한 필선과 강렬한 색감이 눈길을 끌었다. 모란 줄기도 예외 아니었다. 먹의 농담과 선의 강약으로 묵향을 맘껒 뽐내고 있었다. 나는 이 부귀목단도(富貴牧丹圖)를 표구하여 거실에 걸어놓았는데, 어느 날 흥이 내켜 모란 몇 그루도 뜰에 심었다.

그랬더니 실물과 그림이 안팍에서 호응한다. 거실엔 모란 그림 은은하고, 뜰에는 살아있는 모란이 피어나는 봉오리의 생동감, 꽃잎 벌어지는 화개 모습, 애처러운 낙화 모습 낱낱이 보여준다. 새벽에 창문 열면, 진동하는 향기가 바람 따라 제멋대로 침실에 넘나든다. 밖엔 이슬 머금은 모란꽃이 있다. 의재필선(意在筆先)이라고 한다. 글 쓰기 전에 미리 마음 속에 글자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결정해야 글씨가 저절로 이뤄진다. 모란은 어떻게 법첩도 없이 마음만으로 저런 생생한 그림 그리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이 모란이 비 개인 아침이면 푸른 잎새 너울너울 손짓하여 나를 정원으로 불러낸다. 밖에 나와 자기의 화려한 자태와 고귀한 향기를 배관하라 한다. 그래 나는 뜰에 나가 천년 전 계림(鷄林)의 여왕 앞에 국궁배례 한다. 모란은 선덕여왕이다. 여왕의 금관엔 위로 햇빛에 빤짝이는 사슴 뿔 모양의 순금 관태가 치솟아 있고, 관태엔 비취빛 곡옥이 매달려 있다. 아래에는 살짝 건드리면 흔들리면서 사방에 황금빛 빤짝이는 순금 드리개가 드리워져 있다. 여왕의 몸에선 매화향 용뇌향 사향을 섞은 것 같은 향기가 난다. 나는 모란꽃을 보면서 그 모든 모습과 향기를 확인하곤 한다.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보면 '여왕은 용과 봉황의 자태를 가졌고,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은 위엄을 갖췄다'고 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용과 봉황의 자태로 표현했을까. 얼마나 위엄 있었으면 하늘의 태양 같다고 했을까. 화랑들은 이 아름다운 여왕 앞에 목슴을 걸고 충성 맹세를 했을 것이다.

여왕은 덕만공주(德曼公主) 시절부터 미모와 지혜로 이름난 여왕이다. 삼국유사에 여왕의 총명함도 기술되어 있다. 당태종이 붉은색, 흰색, 자주색 모란 그림과 함께 꽃의 씨앗을 신라로 보내오자, 여왕은 그림을 살피더니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 말했다. 과연 신하들이 왕궁에 씨앗을 심어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더니, 여왕의 말처럼 꽃에서 향기가 없었다고 한다.

옛시인은 달밤에 이슬 머금은 모란을 보며 은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나는 모란 앞에서 천년 전 여왕 모습을 그려본다. 여왕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서시 같았을까. 양귀비 같았을까. 모란꽃 향기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여왕의 체취를 느끼면서, 여왕이 화랑에게 던진 고귀한 미소도 그려본다. 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라고 읊었다. 그러나 나는 모란에서 신비로운 천년의 향기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