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상

중봉 조헌 문학상

김현거사 2019. 4. 4. 09:04

 

 

고향의 강

                                                                                                                          김창현

 

  내 고향에는 아름다운 강이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경호강 덕천강 두 강이 진양호에서 합쳐진 후 촉석루 밑으로 흘러가는 강이 있다.

 어릴 때 나는 그 강에서 멱 감고 물고기 잡고 놀았다. 강가에서  종달새 소리 듣고, 은모래밭과 대숲 위로 느릿느릿 흘러가던 흰구름을 보며 자랐다. 코스모스 핀 강둑에서 시원한 산들바람을 씌고, 별빛 쏟아지던 평상 에서 유성을 보며 자랐다. 

 

 그러나 이제 칠십 고개를 넘어 고향엘 가면 아는 사람을 만나기 힘든다. 거기서 소싸움 벌이던 백사장도 여전하고, 연 날리던 강둑도 여전하고, 그 아래 얼음이 얼면 썰매를 타던 다리도 여전하지만, 사람은 다 낮선 얼굴이다. '이곳이 나의 고향이었던가. 여기가 내가 다니던 학교인가. 저기가 내가 좋아하던 그가 살던 집터인가.' 매번 그런 생각에 잠기게 한다. 고향은 이제 반갑게 손 잡고 시장 뒷골목 찾아가 잔 나눌 친구가 없다. 가슴 허전하여 발걸음 휘청거리게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최근 거기서 나는 한 반가운 존재를 만났다. 어릴 때부터 낮익은 강을 만난 것이다.

 

 나는 강변에 내려가 벤치에 앉아 예전에 멱 감던 그 강을 바라보며 여러가지 생각에 잠겨보았다.

 생각해보니 강도 나처럼 구비구비 길 없는 길을 헤쳐온 나그네였다. 강도 나처럼 산을 사랑했고, 뻐꾹새 소리를 사랑했다.  언덕 위의 정자를 사랑했고, 절벽의 노송을 사랑했고,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는 나룻배를 사랑했고, 돌담 위에 주렁주렁 감이 달린 동네를 사랑했다.

 강도 나처럼 도시보다 한가한 시골을 좋아했고, 이끼 낀 성벽을 좋아했다. 다리 위의 외로운 가로등을 좋아했고, 기적을 울리며 떠나가는 기차를 좋아했다.

 강도 나처럼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신세였고, 한번 이별한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신세였다. 때로 탄식하고, 때로 울부짖고, 때로 환희의 노래 부르면서, 그 모든 감정을 물결 속에 잠재운 존재였다.  

 

 소년은 이제 노인이 되었지만, 강은 예전 그대로 였다. 그러나 그 강은 어릴 때 같이 놀았던 친구였다. 따지고보면 같은 역정을 공유한 동지이기도 했다.

 강과 나는 오래 전에 고향을 등지고 나선, 밤하늘 유성같은 존재였다. 목적지가 어딘 줄 모르며 타향을 방황한 에뜨랑제였고,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쓸쓸한 존재였다.

 강이 수많은 별을 비추다 떠나오듯 나 역시 얼마나 많은 그리운 별에게 마음을 주고 헤어졌던가. 강이 때때로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하듯, 나 역시 얼마나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했던가. 

 그러면서 우리는, 마음은 계절 따라 얼었다 녹았다 하는 변덕쟁이란 걸 알았고, 세월은 쏜살같이 달아나는 심술쟁이란 걸 알았다. 

 

 나는 강에게 다정히 물어보았다. 늦가을 서리맞은 홍시를 따려고 돌을 던지고 긴 대나무 장대를 흔들던 메기통 가는 길 그 늙은 감나무는 그대로 있을까. 친구들과 벌거벗고 깊은 강으로 다이빙 하던 소년, 수경을 쓰고 물속에 들어가 고무총으로 수염이 길다란 메기를 잡던 소년, 눈이 루비같이 붉고 털이 하얗고 복실복실하던 토끼를 키우던 소년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을 노래하던 소년, '가스등'에 나온 잉그릿드버그만의 미모를 부러워하던 소년, 유랑극단 가설무대 탭댄스를 흉내내던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그때도 지리산에서 흘러온 남강물은 너무나 맑고 달콤했고, 유리어항에 베를 덮고 그 안에 된장을 발라 잡던 뱃바닥 푸른 보리피리는 너무나 날렵했다. 버들잎 움트는 신안동 들판 종달새가 울면 봄이 왔고, 서장대 밑 남강에 수박향 나는 은어가 몰려오면 여름이 왔고, 약수암 절벽 단풍이 그림처럼 물에 비치면 가을이 왔다.

 나는 거기서 지리산에서 흘러온 남강물처럼 유정한 청년으로 자랐다. 영남예술제 열린 밤에 남녀 학생들이 촉석루 아래서 유등을 띄울 때, 등에 한 소녀의 이름을 써서 흘려보낸 적 있다. 초등학교 동창이던 그 소녀는 지금 어디 사는지 강에게 물어보았다. 

 

 그 때 강은 자기도 수많은 사랑하던 별을 비추다 떠나왔다고 말해주었다. 강은 마치 참회를 들어주는 신부님이나 명상을 가르키는 스님같았다.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 없이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었다. 

 나는 강 앞에서 지난 날들을 회상해보았다. 좌절된 내 젊은 시절의 꿈, 박봉으로 피로와 허기에 지치고 고생하던 일, 누군가와 얼굴 붉히고 헤어진 일을 회상했다. 사람들은 남풍에 실려왔던 봄처럼 모두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그러나 싸파이어처럼 아름답고 푸른 물결은 아직도 거기 있었다. 나는 아직도 고향에 그가 있음에 감사드렸다. 상처를 차그운 강물에 담근 것처럼 그때 아품이 시원히 씻어짐을 느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나는 비로서 강을 만난 것이다. 강은 항상 포근한 어머니 같았다. 파란만장한 나그네 길에서 돌아온 소년의 요람을 흔드는 어머니 손길처럼 다정한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 손길을 느꼈다.

 강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성자 같았다. 강은 고요를 보여주었고, 말 없는 말인 침묵을 보여주었다. 강은 고요히 명상에 잠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 나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강이 되고 싶었다. 나는 강처럼 고요해지고 싶었다. 강처럼 신비한 침묵을 지니고 싶었다. 강처럼 쓸쓸한 미소를 짓고 싶었다. 강처럼 말 없이 누구를 기다리고 싶었고, 명상에 잠기고 싶었다. 강이 가장 다정한 벗이요, 진정한 스승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나는 더이상 동구 밖 정자나무에서 가을밤을 홀로 지새우며 슬피우는 귀뚜라미처럼 되지않아도 된 것이다. 고향에서 언제던지 마음을 터놓을 강을 만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나는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성스럽고 고요한 고향의 강이 항상 거기서 나를 기다려주었기 때문이다.  

 

 

노년의 사계절


 인생 백년이라지만, 백년을 살아도 삼만육천일이요, 앞길이 구만리라지만, 목슴은 바람 앞에 등불이요, 풀잎에 맺힌 이슬이다. 그 짧은 인생에 노루 꼬리처럼 짧은 것이, 문턱 밑이 저승이라는 노년의 시간이다. 직장에서 은퇴한 노년의 시간은 밤 깊은 법당에 향 하나가 타서 고요히 재가 되는 시간, 늦가을 붉은 홍시가 꿀로 익어 낙과되고마는 그런 짧은 시간이다. 이 안타까운 시간에 무엇을 마음에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먼저 봄에는 꽃과 채소를 마음에 둘만하다. 귀천궁달이 수레바퀴마냥 도는 세상보다 자연에 맘 돌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비 내린 상쾌한 봄날 아침 아침 뜰에 나가보자. 흙을 밀치고 나온 수선화 새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함박꽃 붉은 촉, 상사초 푸른 촉도 보인다. 흙 속의 부드러운 새촉들은 어린 소녀 같이 싱싱하다. 그 새촉은 마치 우리 노인이 옛날 소년 때 만난 첫사랑처럼 우릴 가슴 설레게 한다. 

 봄은 콘닥터가 지휘하는 심포니처럼 아름답다. 꽃들은 차례대로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개나리 산수유는 노란 저고리, 진달래는 연분홍 치마, 목련은 하얀 드레스 차림이다. 매화와 배꽃은 향기가 청초하고, 벚꽃은 비단처럼 화려하다. 벌 나비처럼 향기 찾아서 이리저리 온갖 꽃의 품으로 날아들만 하다. 이 축제의 뜰에서 라일락이 연인처럼 달콤한 향기를 풍겨오면, 히야신스꽃도 잊으면 안된다. 꽃집에서 몇개 구근을 골라 와보라. 실내에 자색 보라색 노란색 순백의 향기가 가득해질 것이다. 천상의 향기가 이럴 것이다. 봄은 정말 음미해볼만한 아름다운 심포니다.

  겨울 넘긴 텃밭의 청갓과  부추 몇 잎도 기쁨이다. 뜯어서 접시에 놓는 재미도 잊어선 안된다. 식탁에 올린 담박하고 쌉싸레한 푸성귀에 맛을 들여야 한다. 건강에도 좋거니와 고인(古人)의 담박한 의취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여름은 물소리를 마음에 둘만하다. 고요함을 즐기는 노인이란 오래된 벼루처럼 운치있는 법이다. 여름에 가장 고요한 소리는 물소리이다. 물소리 중에 으뜸은 처마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다.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 작은 울림 하나하나가 교회의 종소리 산사의 목탁소리처럼 청아하다. 수정으로 깨어지는 그 소리에 몰입해보면 천지의 파장이 몸에 스며든다. 거처하는 집이 교회나 절간처럼 청결하고 고요해짐을 느낄 수 있다.    

 산골 물소리도 고요하다. 배낭에 술과 찬거리 담고, 홀로 청산을 찾아가보라. 적막강산 속에서 안개를 마시고 구름을 타면서, 흰구름에 눈 씻고, 솔바람에 이마 씻고,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어보라.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가 문득 저멀리 모기소리같이 하찮게 들릴 것이다. 

 

 가을에는 여행을 마음에 둘만 하다. 한번 흰구름을 닮아봐야 한다. 버리고 비우고 떠나볼줄 알아야 한다. 무심한 흰구름처럼, 황금빛 주홍빛으로 단풍 물든 산 허리 달빛 아래를 거닐고, 어기야 디어챠 어기여차 갈대밭 속을 한 잎 조각배에 몸 싣고 가고, 갈매기 벗삼아 외로운 섬 멀리 사라지는 황혼을 따라가봐도 좋을 것이다. 들녂에서 추수하는 농부에게 슬며시 닥아가 탁주 한잔 얻어마셔도 좋고, 출렁거리는 뱃머리에서 어부가 갓잡은 싱싱한 생선을 흥정해봐도 좋다. 등대가 보이는 항구의 목로주점을 찾아가도 좋다. 주가(酒家)의 늙은 여인과 젖가락 장단치며 구성지게 옛노래 불러도 좋다. 밤차로 고향에 가서, 타계하신 부모님 무덤을 돌아봐도 좋다.

 흔히 여행을 인생 같다고 한다. 그러나 아쉬운건 인생이니, 여행은  떠나도 돌아올 수 있지만, 인생은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불귀(不歸)가 끝인 것이다. 인생은 온 곳 모르고, 갈 곳 모르는 구름이다. 그렇게 화려하다가 금방 허망하게 스러지는 구름이다. 버리고 비우고  떠나는 구름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겨울에는 차를 마음에 둘만 하다. 눈 오는 밤에 고서를 뒤적이면서 풍로에 차 한잔 끓이는 것이 노년의 운치다. 목욕 후 먹을 갈아놓고 묵난을 쳐보는 것도 좋다. 피리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다. 허공에 피어오르는 차의 향기에 마음을 모울 때, 살아온 인생의 전과정을 투명하게 관조할 수 있다. 올 때도 빈손으로 왔거니와 갈 때도 빈손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아니던가. 삶은 지팡이 하나와 발우 하나만으로 족했던 것이다. 금전이나 대인관계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 현우(賢愚)도 따질 필요가 없었다. 명예도 거치장스런 것이었다. 마음은 어디서나 자유로워야 했다. 가난하면 청빈을 구하고,부귀하면 검소를 벗했어야 했다. 간혹 밤늦어 참선을 끝내고, 이윽고  차 한잔 기울이면, 흉중에 속계와 선계가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차의 품질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오직 맑은 차 한잔의 의미만 가슴에 담으면 그만이다. 

 

  봄은 꽃을 즐기고, 여름은 물소리 즐기고, 가을은 여행을 즐기고, 겨울은 차를 즐김이 좋으리라. 사계절 이 밖에 할 일이 또 무엇이랴. 아침은 시를 읽고, 오후는 낮잠을 자고, 밤엔 달을 구경함이 좋으리라, 하루에 할 일이 이 밖에 또 무엇이랴. 

은퇴한 노년이란 어차피 직장도 떠났고, 자녀도  품에서 떠나갔다. 부양할 자식이없는 신부님이나 스님 처지와 같다. 이제야 못에 갖혔던 고기, 새장에 갖혔던 새가 자유를 찾은 것과 같다. 공작은 깃을 아끼고, 범은 발톱을 아낀다고 한다.   이제야말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을 아끼며 살 때가 온 것이다. 동지에 개딸기 찾듯이, 뒤늦게 과거에 연연할 필요 없다. 그동안 밤송이 우엉송이 다 밟아본 노년이다. 이제야말로 한번 표연히 출세간의 길로 가볼 때가 온 것이다. 천지에 소요유(逍遙遊)할 빈 배 하나가 저 멀리서 조용히 흘러오고 있다.


梅花頌


달빛 아래 보는 매화가 가장 아름답다. 화선지에 그린듯한 하얀 꽃잎이 밤하늘 푸른 허공에 점점이 점 찍은 모습처럼 청초한 건 없다. 실바람에 꽃잎 흔들리면 달빛 아래 사쁜사쁜 거니는 월궁 항아의 하얀 옷깃을 보는듯 하다. 꽃은 피어나는 방향에 따라 정면인 것, 후면인 것,옆으로 보이는 것, 아래로 향한 것, 半開한 것 滿開한 것이 뒤섞여 더 생동감 있다. 매화는 시간에 따라 운치와 감흥이 다르다. 아침에 보는 매화와 밤에 보는 매화, 청명한 날 매화와 안개 낀 날 매화, 눈 오는 날 보는 매화가 다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매화는 月下의 매화가 아닐까 싶다. 이때 줄기는 월광 아래 희미하여 수묵화가 되고, 얼음같은 살결과 구슬같이 맑은 얼굴은 달빛 아래 더 선명히 보인다. 또 후각을 자극하는 숨막히도록 청량한 향기는 말못할 사연 지닌 여인의 체취처럼 신비롭다.

 찻잔 속의 매화도 아름답다. 깔끔한 백자 잔도 좋고, 투박한 이조 다완도 좋다. 작은 찻잔은 꽃잎을 더 자세히 보이게한다. 찻물에 적셔진 꽃잎은 마음을 젖게 만든다. 꽃에는 반드시 꽃받침이 있기 마련이다. 홍매는 붉고, 청매는 녹색이다. 여인이 화장을 바꾸듯 매화는 꽃받침 따라 격조를 바꾼다.

매화차 만드는 물은 깊은 산 속 샘물이 제격이다. 가능하면 옥같은 흰 손으로 차 따르는 여인이 있으면 더 운치있다. 가난한 선비도 좋고 화가도 좋다. 가난한 선비는 청빈을 말할 것이고, 화가는 꽃빛의 자세한 변화를 논할 것이다. 매화차 마시는 장소는  앞에 작은 연못이 있으면 좋다. 연못 옆에 초당이 있고, 초당 옆에 대나무 몇그루 있으면 더욱 좋다. 문득 옆에서 누가 부드러운 해금을 타거나. 고요한 산사의 풍경 소리가 울려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매화는 오랜 풍상을 겪은 古梅일수록 귀하다. 고승처럼 허리 구부정하게 땅으로 누운 매화일수록 격조 높다. 매화는 어린 것 보다 늙은 것을 귀히 여긴다. 살찐 것 보다 여윈 것을 귀히 여긴다. 줄기는 기괴하게 굽어져야 귀한 법이고, 가지는 섬세하면서 힘 있어, 늙은 것과 어린 것, 드리운 것과 치뻗은 것, 성긴 것과 빽빽한 것, 剛과 柔가 조화를 이뤄야 귀하다. 세월의 흔적으로 표피에 푸른 이끼가 무수한 苔點을 찍고 바위 옆에 비스듬이 선 매화 등걸은, 산중의 선풍도골 선비처럼 반갑다. 매화는 山梅,江梅,園梅,盤梅가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매화는 오래된 성터나 고가나 고찰에서 세월을 보낸 늙은 고매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매화시를 썼고,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매화 그리는 법을 논했다. 그 중 절창은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시가 아닐까 싶다.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가면서 항상 가락을 잃지않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않고(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月到千虧餘本質),

버들은 백번을 꺽여도 새가지가 올라온다(柳經百別又新枝)'


매화를 이보다 핍절하게 묘사한 시는 없다.

 가장 매화를 사랑한 선비는 퇴계 선생이 아닐까 싶다. 선생은 48세에 부인과 아들을 잃고 홀로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18세의 관기 杜香을 만났다. 두향은 매화같이깨끗한 살결에 옥같은 자태를 지닌 빙기옥골(氷肌玉骨)이었을 것이다. 시문과 가야금에 능하고 특히 매화를 사랑했다고 한다.'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마져 가는구나.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9개월 후 풍기군수로 떠나가는 선생이 한없이 야속했을 것이다. 매화보다 향기로운 소녀는 눈에 이슬 머금었을 것이다. 한 수의 시를 읊고,수석 두 점과 매화 분재 한 점을 선물했다고 한다. 선생은 이 매화를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거쳐 69세에 고향 안동에 돌아와 임종할 때까지 21년간 곁에 두고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노후에 병환이 깊어지자 매화에게 자기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민망하다며, 화분을 다른 방에 옮기라고 했고, 임종시에도 '매화에 물을 주라'란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두향이 준 매화를 항상 곁에 두고, 매화시첩(梅花詩帖)에 91수의 매화시를 남겼다.

'뜰 가운데 거니는데 달은 날 따라오고, 매화 둘레 몇 번이나 서성여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향기는 옷깃 가득, 그림자는 몸에 가득'.

 선생은 한밤 중에 매화가 피어나자 뜰에 내려서서 달빛 아래 매화 나무 둘레를 맴돌며 옷이고 몸이고 달빛과 매화 향기에 흠뻑 젖었던 모양이다. 인편으로 소식 물어오는 두향에겐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누렇게 바랜 예 책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선생이 떠난 뒤, 두향은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다가, 부음을 접하자,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방문하고 돌아와, 곡기를 끊고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매화처럼 향기로운 두향의 처신이다. 두향은 매화의 혼이었던지 모른다.

 인생이 한 편의 시라면, 두 분처럼 향기로운 매화시를 남긴 시인도 없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나는 한번도  이같이 그윽한 사랑을 이야기 들은 적 없다. 가히 만고청향(萬古淸香)이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

                                                                                                                 김창현

 

    

 매화는 같은 매화라도, 아침 이슬 맺혀있는 매화, 눈 속에 핀 매화, 달빛 속의 매화가 그 감흥과 운치가 다르다. 아침 이슬 젖은 매화는 향기가 더 청초하고, 시린 눈 속에 핀 매화는 그 품위가 더 고고하다.

 그러나 달빛 아래서 보는 매화가 가장 아름답다. 달빛 속의 매화는 마치 달 속에 사는 항아의 얼굴같다. 얼음같은 살결과 구슬같은 피부가 돋보인다. 그때 어디선가 실바람이라도 불어보라. 후각을 자극하는 숨막히도록 청량한 향기는 말못할 사연을 지닌 여인의 체취 같다. 차갑고 신비로운 살결은 시각을 놀라게 하고, 숨막히도록 청량한 향기는 후각을 놀라게 한다.   

 

 이 매화를 사랑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를 썼고, 그림을 그렸고, 고사를 남겼다. 

 신흠(申欽)은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노래를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잃지 않는다( 梅一生寒不賣香)'고 읊었다.

 임포(林逋)는 서호에서 물에 거꾸로 비친 매화의 정취에 감동하여, '들어누운 성긴 가지 그림자 맑은 호수에 어리 비치는데(影橫斜水淸淺), 그윽한 향기가 달빛 속에 뜨간다 ( 暗香浮動月黃昏)는 시를 남겼다. 

 조희룡은 매화 벼루에 먹을 갈아 매화 병풍을 그렸고, 그 병풍 아래 누워 잠을 잤으며, 자신을 매화에 미쳤다고 '매화두타'라고 불렀다.

 맹호연(孟浩然)은 기암절벽에 눈 쌓인 봄,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나서는 그림을 그렸다. 답설심매(沓雪尋梅)의 화폭이 그것이다.

  임화정(林和靖)은 서호(西湖) 북쪽 고산(孤山)의 매림(梅林) 속에 집을 지어놓고,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살았다.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가 그것이다. 

 

 화가들은 매화를 그리는 수많은 법식을 남기기도 했다.

 매화는 오랜 풍상을 겪은 고매(古梅)일수록 귀하고, 늙은 것이 귀하고, 여윈 것이 귀하다. 노인처럼 바위 옆에 살포시 기댄 매화가 귀하고, 줄기는 기괴하게 구부러져야 하고,  세월의 흔적으로 줄기에 푸른 이끼가 무수한 태점(苔點)을 찍은 매화가 가장 귀하다. 

 매화는 산매(山梅), 강매(江梅), 원매(園梅), 반매(盤梅)가 있지만 격조가 우선이다. 아무리 화공의 솜씨가 뛰어나더라도, 그림이 격조를 얻지못하면 속되다.

 

 차인들도 차 마실 때 매화의 운치를 빌려오곤 했다. 먼저 찻물에 매화꽃을 띄워 젖은 매화의 애련한 모습을 눈으로 감상하고, 그 다음에 손바닥으로 바람을 일으켜 코로 그 향기를 마셨다. 잔은 깔끔한 청자 잔도 좋고, 투박한 이조 다완()도 좋다고 한다. 청자는 매화를 고결하게 하고, 백자는 매화를 애련하게 하기 때문이다.  

  차 마실 장소는 앞에 작은 연못이 있으면 좋다고 한다. 거기 초당이 있으면 좋고, 대나무가 몇그루 있으면 더욱 좋다. 고요한 산사의 풍경소리가 들려오는 운치있는 곳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했다.

 같이 매화차 마실 사람은 가난한 선비나 뛰어난 화가가 좋다고 한다. 가난한 선비는 청빈을 알고, 뛰어난 화가는 꽃빛의 미묘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많은 시인과 화가 그리고 고인 중에서 가장 매화같이 청초한 사랑을 나누고 간 분은 누구일까.

  조선조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퇴계 선생이다. 선생은 48세 때, 부인과 아들을 잃고 단양군수로 부임했다거기서 얼음같은 피부, 옥같은 자태를 지닌 빙기옥골(氷肌玉骨)의 두향(杜香)을 만났다. 

 두향은 당시 열 여덟 나이로 시가와 가야금에 능했다고 한다. 선생이 부임하자, 인품을 사모하여 매화 분재를 가져와서 선물했다고 한다. 상처한 49세의 천하문장과 매화를 사랑한 18세 관기는 이렇게 만난 것이다.

 

 두분은 매화를 앞에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줄기가 기괴하게 굽어진 매화, 세월의 흔적으로  푸른 이끼가 무수한 태점(苔點)을 찍은 매화를 앞에 놓고 그 격조를 평했을 것이다. 선풍도골의 매화를 찾아 오래된 성곽이나 고찰을 찾기도 했을 것이다. 두향은 산속의 맑은 샘물을 길어와 옥같은 흰 손으로 매화차를 따르기도 했을 것이다. 두향은 시를 읊고, 선생은 매화 앞에서 거문고를 탔을 것이다. 달 밝은 뜰에서 항아의 얼굴같이 은은한 매화 꽃빛을 감상했을 것이다. 사연 지닌 여인의 체취처럼 후각을 자극하는 짙은 향기를 맡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만난지 9개월만에 생이별하였으니, 두사람의 심회는 오죽 하였을까.  그때 두향은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두향은 풍기군수로 떠나는 선생에게 수석과 매화 한 점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때 두향의 청초한 눈가에 이슬이 맺혔을 것이다.

 그후 선생은 매화를 볼 때마다 두향을 생각했을 것이다. 공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69세에 고향 안동에 돌아온 후 임종하실 때까지 21년간 매화를 곁에 두고 끔찍히도 아꼈다고 한다. 도산서원 앞마당 연못가에 매화를 심고, 매화를 절군(節君) 혹은 매형(梅兄)이란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벼루도 매화가 그려진 벼루를 썼고, 걸상도 매화가 새겨진 걸상을 썼다고 한다.  

 '매화시첩(梅花詩帖)'을 만들어  91수의 매화시를 남겼다.

 

 '뜰 가운데를 거니니 달은 날 따라오고, 매화 둘레 몇 번이나 서성여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 향기는 옷깃 가득, 그림자는 몸에 가득.' 

 

'누렇게 바랜 옛책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선생은 두향이와 한번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노후에 병이 깊어지자, 매화에게 자기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민망하다며 매화 화분을 다른 방에 옮기라고 했다고 한다. 두향이 바로 매화였기 때문이다. 임종시에는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선생이 떠난 후, 두향은 남한강변에 움막을 치고 살다가, 어느 날 부음을 접하자, 4일간 걸어서 안동의 상가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곡기를 끊고 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참으로 매화같이 고결한 두향이의 처신이었다. 두향이는 살아있는 매화의 혼이었던지 모른다.

 

 나는 동서고금을 통한 수많은 시인묵객 중에서 매화처럼 격조 높은 사랑을 해본 사람은 오직 두 사람 뿐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선비들 중에 매화시첩을 만들어 91수의 매화시를 남긴 사람은 퇴계선생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과 두향은 참으로 만고청향(萬古淸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단양의 남한강 푸른 물가에 두향의 묘가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단양에 가면,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고 하신 퇴계 선생의 유언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섬돌 앞에 붉은 모란 늦게 오니 오직 두 가지만 남았다. 내일 아침 바람이 일면 응당 날라가버릴 것 밤에 붉음 쇠하는 것 아까워 불 켜들고 본다

.장안의 부호들이 얼마 남지 않은 봄을 아까워하여 새로 핀 자모란을 다투어 구경하는데 따로 있는 흰쟁반에 싸늘한 이슬 바쳐든 듯한 꽃을 달밤에 가서 보는 이 아무도 없구려

.부귀스런 멋은 꽃중의 으뜸이라 빛깔과 향기는 더 보탤게 없으나 어째서 꽃 모양은 그렇게 크면서 작은 열매라도 맺지 않는가

?양귀비 돌아간 후 천년 묵은 한동풍 불 때마다 꿈에서 보네.

양귀비 떠나간 뒤 긴긴 세월 한을 품고 동풍과 더불어서 옛 생각에 잠겼는 듯예쁜 꽃이 받침목에 의지하여 갓피어 웃는 맵시 오래 취한 듯. 붉은 단장 비에 젖는 것 관심이 통 없으니 애처롭다 원래 어리석게 태어났음이여

.달의 정령과 눈의 넋이 구름 뿌리로 잉태되어 살찌고 향기로운 꽃 봄들자 피어나네. 이슬내린 가지 위엔 구슬덩이가 감춰 있고 앞뜰에 바람일 적 은술잔이 기울어진다

.

모란에 대한 것은 『삼국유사』의 선덕여왕조에, 당시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홍색·자색·백색꽃의 모란 그림과 씨앗 서 되를 보내 왔다고 적고 있다.

문양으로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암막새 기와에 모란꽃을 도안화한 보상화(寶相華) 무늬가 많이 나타나며, 고려 이후에는 여러 공예 의장(工藝意匠)에 더욱 성행하였다.

고려자기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송(宋)·원(元) 도자기의 모란 무늬와 같은 회화적인 형식이었으나, 차츰 절지(折枝)와 화분(花盆) 형식 등의 관념적인 무늬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당초 덩굴과 결합된 모란 당초 무늬를 철사(鐵砂) 물감으로 활달하고 자유롭게 그린 회화적인 무늬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의 분청사기(粉靑沙器)에도 시원스러운 철사 모란 무늬뿐만 아니라 박지(剝地)·선각(線刻, 彫花) 기법 등에 의한 추상화된 모란 무늬가 특징적이며, 백자(白磁)에서는 매우 사실적인 투각(透刻) 모란 무늬가 항아리 등에 가득 새겨지고 있다.

모란은 일찍이 그 고운 아름다움으로 시와 고사(故事)에 늘 등장하여, 국색 천향(國色天香)의 자색으로서 꽃 중의 꽃인데다 화목을 상징하기까지 하여 화재(畫材)에 뿐만 아니라 복식(服飾)·가구(家具) 등의 중요 장식 무늬로 널리 쓰여져 왔다. 매화의 향기를 암향(暗香), 난초의 향기를 유향(幽香), 모란의 향기를 이향(異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당나라의 위장(韋莊)이라는 이가 읊은 시에서도 모란의 향기를 칭찬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당나라의 시인인 위장(韋莊)은 백모란꽃을 읊은 시에서 모란의 향기를 칭찬했는데, 실제로 꽃에서 향기가 난다. 다만, 품종에 따라 향기가 없는 것도 있긴 하다. 한편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는 모란이 개화하는 시기가 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름다운 모란꽃을 찾아다니며 감상하는 게 세시풍속으로 유행했다. 유행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장안성의 관청, 사찰, 저택 등 저


모란송(頌)                                                                                                      

                                                                                                                김창현

      

 모란꽃 피는 5월이다. 세모시처럼 사각거리는 소리가 날 것같은 것이 모란 꽃잎이요, 얇은 한지 주름을 방금 다림질해놓은 것 같은 모란 꽃잎이다.  금분(金粉)에 용뇌향 사향을 섞은 듯 형언하기 어려운 향기를 풍기는 것이 모란 꽃술이다.

 이 모란이 비 개인 아침 푸른 잎새 너울너울 손짓하며 나를 정원으로 불러낸다. 아마 자기의  화려한 꽃빛과 고귀한 향기를 배관하라는 모양이다. 과연 모란 앞에 서면, 금실에 곡옥(曲玉)을 단 사슴뿔 모양의 관(冠)을 쓰고, 머리에 봉황과 용을 새긴 봉잠(鳳簪) 용잠(龍簪)을 꽃고, 시녀에게 일산(日傘) 받치게 한, 천년 전 계림(鷄林)의 여왕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모란을 흔히 화왕(花王)이라 부른다. 그래서 모란이 뜰에 나타나면, 모든 기화요초는 고귀한 황실의 품위 앞에 빛을 잃고 만다. 평소 기품있는 푸른 빛을 자랑하던 붓꽃이 스스로 신하 자처하며 시녀인양 머리 조아리고 발치에 엎드리고, 소녀의 볼처럼 귀여운 연분홍 복사꽃도 둘러리인양 한발짝 몸을 움츠리고 물러선다. 농염한 자줏빛 속살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자목련도 얼굴을 붉히고 뜰 한 켠으로 숨어버리고, 개나리 진달래 같은 속가(俗家) 미인들은 진작 모란이 오기 전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모란은 빛과 자태뿐 아니라 향기도 고귀하다.

 평소 난초가 맑음을 자랑하고, 오동이 격조를 자랑하고, 장미가 농염을 자랑한다. 그러나 누가 순서 정한 것도 아닌데, 달빛을 사향으로 버무린듯한 모란의 고귀한 향 앞에선 모두 풀이 죽어 물러서고 만다. 

 이슬 젖은 모란꽃 향내는 뜰을 적시고 사람의 오관을 적신다. 그 향은 사람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중풍이나 혈관계 질환을 고치는 사향과 비슷하다. 귀부인이 몸에 지닐 최상급 향이다. 

 모란은 일부 대형 품종만 제외하면 대개 향기를 가지고 있다. 모란에 향기가 없다는 이야기는 모란을 키워보지 못한 사람들 이야기이다.  

 

 당태종이 선덕여왕의 후사 없음을 비웃어 나비가 없는 목단꽃 그림과 목단씨 세 되를 보냈다는 무책임한 고사도 근거 희박한 야사(野史)일 가능성이 높다. 

 아시다시피 당태종은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하나인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라는 병법서를 쓴 사람이다. 그가 원교근공지책(遠交近攻之策)이란 병법을 모를 리 없다. 

 진평왕의 딸로 16년간 여왕으로 재위했고,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공주가 그의 동생인 선덕여왕을 조롱했다는 말은 어딘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당태종은 오히려 고구려를 협공하기 위해서 선덕여왕에게, '모란처럼 아름다운 계림(鷄林)의 여왕이시여! 이 아름다운 모란을 보내오니....' 어쩌고 하는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전에 항주를 여행하다가 한지에 배접한 모란 그림을 구해온 적 있다. 원래 중국은 모란과 매화를 국화(國花)로 칠만큼 모란 사랑하는 나라다. 북송 때 사람인 주렴계의 '애련설(愛蓮說)’을 보면 ‘수륙 초목의 꽃 가운데 사랑할 만한 것이 심히 많지만(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진나라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좋아하였고(晋陶淵明獨愛菊 ), 이씨가 창업한 당나라 때 이후로 사람들이 심히 목단을 사랑하였다(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고 하였다. 당나라 때부터 목단재배가 성행한 것을 알 수 있고,  현종은 양귀비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궁성 바깥에 침향정이란 별궁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목단꽃을 감상한 것으로 유명하다.

 화랑가에는 부귀목단도(富貴牧丹圖)라 불리는 모란 그림이 많았는데, 수많은 백모란 흑모란과 붉은 모란 그림이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담묵으로 처리한 은은한 모란, 붉은 빛으로 대담하게 그린 화려한 모란 그림이 모두 필선이 운치있고 기교가 뛰어난 것이었다.

 값도 싸고 해서 한 점 골라와서 표구하여 거실에 걸었는데, 반가운 사실은 그 모란도에도 몇마리 나비가 곱게 그려져 있었던 점이다.  

 

 그후에 화원에서 싱싱한 모란 묘목 서너 그루를 구해와서 침실 앞에 심어보니, 생물 목단 군식(群植)이 그림보다 더 좋다. 눈 앞에 생동감 있게 피어나는 봉오리 모습, 활짝 꽃잎을 펼치는 화려한 모습, 애처러운 낙화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준다. 그 뿐인가. 새벽이면 진동하는 향기는 바람 타고 침실로 멋대로 넘나든다. 그 향기는 마치 계림(鷄林)의 한 여왕이 체취를 풍기는 듯하였다.

  나는 침대에 누워 상상을 해보곤 했다. '선덕여왕은 얼마나 고왔을까. 양귀비 같았을까. 서시 같았을까?' '여왕은 햇빛에 빤짝빤짝 빛나는 금관을 썼을 것이다. 몸에선 매화향 용뇌향 사향을 섞은 것 같은 향내가 났을 것이다.' 

 나는 수많은 젊은 화랑의 무리가 여왕에게 바치는 충성의 명세, 여왕이 화랑에게 던지는 고귀한 미소를 눈 앞에 그려보기도 했다. 

 

 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다. 

 그러나 나는 영랑의 시를 읽을 때마다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과 모란이 뚝뚝 떨어질 때의 그 허전한 마음은 잘 표현되었으나, 정작 모란의 화려한 모습과 고귀한 향기를 직접 묘사한 구절은 없기 때문이다. 간접화법만 있지 직접화법이 없다.

 그래 나는 혼자 영랑의 시에 사족(蛇足)을 달아보곤 한다. 모란은 신비로운 천년 전 계림의 향기를 간직한 꽃이다. 여왕처럼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향기와 화려한 자태를 지닌 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