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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대통령 제3편 (박정희 박근혜씨 편)

김현거사 2018. 5. 27. 07:28

내가 만난 대통령 제3편 (박정희 박근혜씨 편)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대채로 두가지다. 하나는 독재자라는 것이며, 하나는 나라 살린 애국자라는 것이다. 요즘 와서 그에 대한 평가는 5천년래 가난의 역사를 탈피시킨 민족 영웅으로 보는 사람 많다. 그러나 내가 대학 다니던 70년대는 달랐다. 그때는 데모하면 애국자요, 박정희 반대하면 사상가였다.

 

 요즘 매스컴에 유명한 도올 김용옥이 같은 철학과에 다녔다. 그는 생물학과서 편입한 학생이고, 나는 철학과 군 제대 복학생이었다. 그는 얼굴에 냇천자 긋고 침 튀기며 데모 주장하는 학생이고, 나는 신문 사설을 외우던 기자 지망생 이었다. 나는 데모망국론 주창한 사람으로, 도올과 같은 과에 있었으니, 물과 불의 관계였다.

 하루는 강의실에 갔더니, 그가 무슨 애국자라도 되는양 뜨거운 눈빛으로 급우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보나마나 뻔한 뉴스를 인용하여 이껀 저껀 박정희 트집 잡으며. '이제 우리 학교가 데모 나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데모는 무슨 놈의 데모?' 하고 내가 핀찬하여 그와 말싸움이 붙었다. 원래 그는 한 성질 하는 사람이다. 지고는 못산다. 자기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자 맨체스타 다연발총 설탄을 내게 마구 퍼부었다. 나는 복학생이라 나이로 보면 과의 큰형님이다. 그래 젊잖게 '우리는 그래도 ‘학문 중 학문’이라는 철학을 배우는 대학생이다. 대중들 군중심리에 놀아나면 않된다. 사람들은 집권자 욕을 하면 좋아하지만, 그건 냉철한 역사의식이 없는 행동이다.' 하고 응수해 논쟁에 불이 붙었다.

당시 K대는 장안의 대학 데모를 주도하던 데다. 급기야 급우들이 중재에 나섰다. '그러면 빈 강의실로 가서, 거기서 두 사람이 데모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차분히 연설을 해보시오. 그걸 들어보고 다수결 결과에 따라 과론을 정하고 데모를 하던지 말던지 행동 통일을 합시다' 한다.

 그래 넓직한 빈 강의실로 자리를 옮겨 먼저 그가 시국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이젠 학생이 교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단계는 안전 욕구, 3단계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존경취득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피라미드형으로 이뤄져 생리적 하위욕구가 가장 강하다. 그 중 가장 강한 생리적 하위 욕구를 충족키 위한 경제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독재니 뭐니를 따지는 일은, 춥고 배고픈 우리 현실에선 사치에 불과하다고 했다.

 결과는 찬반 거수투표로 결정했는데 도올의 완패였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잠시 도서관 간 사이에 장난을 쳤다. '김형은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아무래도 중앙정보부 끄나풀 같은 냄새가 난다. 어디서 그런 이론을 배워왔겠느냐?'며 급우들을 꼬득였다.

그래 급우들 끌고 시계탑이 있던 서관의 한 강의실을 점령하고 출입구에 책상과 걸상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K대 최초의 데모에 돌입했다. 나는 백번 양보하여 행동통일은 해야한다고 교실에 합류했는데, 그 뒤 도올이 또 딴길로 새버렸다. 하루 쯤 지나 k대 교수였던 그의 형님이 와서 설득하자 강의실에서 나가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데모대가 흐지부지 해산된 적 있다.

 나중에 그는 하바드대 철학 박사로 귀국하였다. 머리는 좋은 친구다. 그 덕분에 그는 해박한 언설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지만, 나는 그 이름만 보면 지금도 시큰둥하다. 철학을 한 사람은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도 그의 역사를 읽는 안목은 의심스럽다.

 그 당시 반정부 인사로 유명하던 김지하 시인이 있다. 그는 도올과 다르다. 그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근래 백팔십도 전향되었다. 스므살에 반정부 운동 안하면 병신이고, 40대 되어 그러면 병신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다. 김지하씨는 인끼에 연연하지 않고 과거의 실수를 인정한 면에서 용감한 사람이다.  

 

 군대 시절에도 나는 박대통령 지지파였다. 대학생 데모대를 싫어한 적은 없다. 대학생 데모는 일종의 유행이기 때문이다.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입자 미니스커트 입는 여성들 많았다. 유행을 탓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학생들의 현실참여는 그게 맞던 틀렸던 일종의 유행이요 애교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운전병으로 부산서 근무할 때다. 나는 데모집압 차량을 운전하고 다녔는데, 경찰이 부산대 현장서 학생을 잡아 GMC에 실어주면 동래경찰서로 가던 도중에 차를 세우고 풀어주곤 했다. 학생이 무슨 죄 있는가? 철 없는 것이 죄라면 죄다. 서대신동 동아대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차에 태워준 학생을 모두 중간에서 풀어주었다. 문현동 고개 너머 수산대에서도 모두 풀어주었다.

상부 지시 받고 진압나온 경찰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데모대 학생을 다 자기 아들이나 친척 조카로 생각했다. 그래 내 행동을 따지지 않고 넘어가주었다. 경찰은 상부 명령이라 진압은 하지만 반감은 별로 없던 걸로 기억된다. 

 

 복학하여 학교에 돌아와서 나는 취재나온 미국의 모 언론사와 박정희 지지 인터뷰를 한 적 있다. 40년 전 그 일을 나는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K대는 데모 할려는 학생이 대다수였다. 데모 반대하는 나 같은 학생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그 외국 언론사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나를 찾아와서 인터뷰를 청한 것이다. 그래 나는 과열 데모 진행 중인 교문 앞 돌벤치에서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어찌 보면 변절자로 취급할 수도 있는 과열 데모꾼들 중인환시 속에서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태연히 인터뷰 하였다.

 

  인터뷰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다. 나는 맑스의 구조이론을 읽은 적 있다. 경제란 하부구조가 결국 정치 문화 등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우선 먹고 살게 된 이후가 중요하다. 

 독재란 개념을 이렇게 생각하였다. 가난이 가장 큰 독재이다. 나라가 가난하면 온 국민이 희생양 된다. 자식은 취직 못하면 부모에게 죄인이다. 노는 젊은이는 얼굴 펴고 살 수 없다. 부모는 직장 없으면 자식에게 죄인이다. 먹고 살 길을 찾지못하면, 자식도 부모도 다 죄인이 된다.

 가난이야말로 전국민을 죽이고 살리는 무소불위의 독재이다. 정치판에 제한된 독재는, 보통의 선량한 국민과는 전혀 상관 없다. 그건 정치판의 독재지, 선량한 국민에 대한 독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가 잘 살면 그때는 저절로 민주화 자유화가 온다. 회사원은 상사에게 할 말 다하고, 수 틀리면 다른 회사로 당당히 갈 수 있다.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요, 자유이다. 

  박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방해한 정적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국민은 아무도 그에게 고통 받은 적 없다. 오히려 국민들은 일자리가 많아 호강을 누렸다. 가난은 호랑이 보다 무섭다. 박통은 그 호랑이 퇴치를 위해 열심히 싸워준 투사다.

  

 지금 와서보면, 당시 K대 데모꾼 박계동은 나중에 국회의원 되었다. 성공회 이제정 신부도 K대 학생이었는데, 나중에 사회 나와서 야당하다가 박통 반대당 부총리를 챙겼다. 모두 반정부 운동으로 한 몫 챙겼다. 감방 다녀온 것을 무슨 훈장처럼 자랑했고, 사상가인양 행세했다. 이 무슨 이해불가의 해괴한 풍토인가?

어쨌던 큰 테두리에서 보아 그것이 잘하는 일인지 못하는 일인지는 불문하고 국민의 불만을 부추켜서 일단 표만 얻고보자는 논리는 말없는 다수 국민의 논리는 아니다. 경부고속 도로 놓지말라고 길바닥에 드러누운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을 했다. 독도를 일본에게 팔아먹은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을 했다. 나라 발전을 그렇게 사사껀껀 방해한 사람들이 국민을 선동하여 표를 얻고 대통령한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집은 박통의 피해자다. 일제 때 '화랑전기'란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책을 집필한 아버님은 5.16이 일어나자, 이를 군사쿠테타라고 섭섭하게 표현하여 수사기관 조사를 받고, 진양군 교육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후 기관원들이 항시 찾아와 아버지 근황을 살펴보고 가곤 했다. 그러나 아버님은 나중에 박통이 정치를 잘 하자 한번도 대통령을 비난한 적 없다. 나 역시 경제신문사 기자 노릇을 하면서 경제를 잘 이끄는 걸 보고 평생 박통을 존경했다. 

 

 박통에 호의적인 이유로 사회 나와서 덕도 보았다. 신문사서 기업체로 옮길 때다. 자서전 써 줄 사람 채용한다고해서 모 그룹 회장을 직접 면담 했는데, 그 분 질문이 특이했다. 현존하는 사람 중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당장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말이 딱 그분이 원한 답이었다.

 회장은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 편지를 써 줄 사람이 간 것이다. 뭐라고 용건을 말하면서 편지를 한 통 써오라고 하고, 이튿날 그 편지 읽고나더니 '내일부터 비서실로 출근하라.'고 바로 결정했다. 그후로 나는 '박정희 대통령 옥궤하(玉机下)' 란 존칭으로 청와대에 보내는 편지 만드는 일로 밥벌이 했다.

 

 애초에 나는 그 회사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신문기자가 남의 비서 노릇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참에  작품 소재가 될지 모르니, 재벌이란 사람 구경이나 싫컷 해놓자는 생각으로 입사한 것이다. 그 분은 한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한 분이었다. 자서전을 빌려 발전하던 70년대 한국 경제를 기록해놓는 것은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그 양반 비자금 조사였다. 명목은 보안점검차 파일 정돈이었다. 그러나 실은 이 양반이 돈을 어디 누구에게 갖다바쳤을까를 조사한 것이다. 

  비밀 금고 안에는 대통령과 관료들, 은행장, 법조계 인사에게 보낸 서신들이 있었다. 선물 받는 사람 명단과 주소, 연락처, 선물 내역이 있었다. 나는 그런 편지를 일주일 동안 전부 읽어보고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으로 청렴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항간에선 박통이 그 회사를 봐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투자 지분이 있다는 루머도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모두 읽어보니, 그 모두 말짱 할일 없는 사람들 카더라 통신이었다. 박통은 그 회사 방위성금도 면제해주었지만, 단 돈 10원 한장 받은 적 없었다. 세상에 이런 깨끗한 분도 다 있나 싶었다, 

 회사가 갖고있던 앨범에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던 근혜씨가 단발머리 하고 그 회사에 찾아와서 라인 투어 하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근혜씨 서강대 은사인 임태순 교수와 주고받은 편지도 있었다. 청와대와 친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통은 오로지 그 회사가  국가 장래를 위한 반도체사업을 하고 있었기 땜에 호의를 베풀어준 것이다.

  

  박통 밑에서 오랜 재무장관을 한 김용환씨 이야길 직접 들은 적 있다. 그가 우리 회장과 청진동에 있는 <장원>이란 요정에서 식사를 할 때다.

박통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월남 파병 때, 여론과 국민에게 시달리면, 혼자 잠들지 못하고 청와대 뜰을 거닌다고 했다, 시바스리갈이나 폭탄주 마신다고 했다. 야당은 독재라고 사사껀껀 쌍지팡이 들고 나서지, 철 없는 대학생은 데모로 괴롭히지, 참으로 고독했을 것이다. 간혹 김장관한테 새벽 2시에도 잠못들 때 전화가 온다고 했다. 

박통이 독일에 차관을 얻으러 갔을 때 그곳에 있는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을 만나 눈물 흘린 이야기, 정주영씨와 의기투합해 경부고속도로 뚫은 일 들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 뒤 대통령 해먹은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이런 감동적인 일화를 남긴 적 없다.

차지철이 한 원양회사서 상납받은 집이 수유리에 있었다고 한다. 4,19탑 방문하고 오던 길에 차지철이 자랑스럽게 박대통령 모시고 가서 집들이를 했는데, 음식이 엘리베이터 타고 2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음, 자네도 이런 식으로?’

화를 벌컥 내는 바람에 차지철이 황급히 이 집을 반납하고 연희동으로 도로 이사간 일화도 있고 한다.  

 김장관은 집이 녹번동에 있었는데,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론, 장관이 12시 이전에 집에 오는 일도 없고, 공휴일도 없다고 했다. 박통 김장관 모두 Workaholic(일 中毒)이었다. 두 분 다 참 멋진 분들이다. 

 

 나는 박통을 간혹 좀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셥센이 있을 때다. 청와대는 재벌에겐 초청장을 보내는데, 회장이 년세를 핑계로 매번 나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재계 거물들만 초청한 그야말로 V-VIP 모임이다.

 거기서 칵테일 잔 들고 박통 근처 갈 수 있는 사람은 정주영 이병철 박용학 같은 사람이다. 새끼 재벌들은 대통령 경호실과 안기부 눈치 보느라고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나는 방명록에 대필서명 해놓고 멀찍이서 구경하고 와서 회장께 누가 왔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보고했다.

  

 한가지 기억 남는 일은 10,26 사태로 박통이 서거하기 한 달 전에 회장이 박통에게 경옥고 한 단지를 보낸 일이다. 경옥고 만드는 일은 경동시장 한약 심부럼 전담인 내가 맡았다. 꿀 인삼 생지황 백복령을 사오고, 충북 영동에 가서 뽕나무 뿌리 구해와서 약을 다렸다. 닭 우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용인 연수원에 조수 하나 데리고 가서 며칠간 만들었다.

 경옥고는 그 약을 먹으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며, 말처럼 뛰어다니게 해준다는 명약이다.  첨부 서신과 함께 김도룡 총무비서관에게 전달했는데, 김비서관은 우리 선물은 검사 거치지 않고 바로 올려주었다. 나는 박대통령이 서거하시기 전에 내가 만든 그 경옥고 몇 숟갈 드셨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박근혜씨는 아버지 서거 후, 우리 회사 옆에 있던 어린이공원 안 육영재단 사무실에서 몇번 만났다.

 세상 인심이 고약해서 아무도 그를 찾지 않던 때다. 그 때 내가 회장을 설득해서 설 추석에 금일봉 들고 찾아가곤 했다. 가서는 10.26 이후 재벌들이 아무도 가지않던 신당동 빈소를 찾아간 이야기, 매년 기일이면 회사 전 중역을 대동하여 국립묘지 참배한다는 이야기를 전한 적 있다.

 그 이야길 듣고 근혜씨는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그는 회장님께 안부 전해달라는 말도 하고, 돈이 없어 절전하고 난방비도 줄인다는 이야기도 했다. 박통이 거액의 돈을 감춰두었단 루머는 말짱 유언비어다. 만일 그랬다면 대통령 사후 따님이 그런 경제적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그런 면에서 박통은 한 아들이 문제된 김영삼씨나 세 아들이 비리로 문제된 김대중씨와 판이하다.

 

 박근혜씨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 타계 후 퍼스트레이디 한 경험 때문인지, 대화 한마듸 한마듸가 바늘 틈 꽂을 틈 없이 빈틈없고 치밀했다. 신중하여 결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차거운 얼음공주였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지금은 전혀 다르다. 여성다운 면모가 살아나 얼굴에 화기가 돌고 미소도 이쁘다. 패션도 잘 골라 외국 어느 정상 부부 만나도 돋보인다. 신의로 국정 잘 다스리고, 유창한 외국어로 우방과의 관계를 다져간다. 몇가지 문제도 불거졌지만, 줏대없는 정치로 일관하는 사내들보다 낫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당 간부들도 지금처럼 친박이니 뭐니 하면서 남자들이 슬슬 대통령 눈치만 봐서는 않된다. 바지 속에 불룩한 뭐가 달린 사내답게 대통령이 소신있게 훌륭한 업적 남기도록 목슴을 걸고 과감히 직언을 해야 한다.

 이제 세월이 지난 후 생각해보니, 그때 근혜씨가 어려울 때 왜 내가 워커힐 식사라도 몇번 초대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 좀 더 친했다면 지금 직언을 해드릴 수 있는 처지일 것이다. 당시 그는 아무나 만날 수 있는데 누구도 찾지 않았고, 지금 그는 아무나 만날 수 없는데, 사람들은 모두 만나려고 애쓴다. 이게 소위 세상 인심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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