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

청춘백서

김현거사 2018. 4. 15. 09:51

  청춘백서 

 

 사람은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와 싸우기도 하고 누군가와 사랑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와 헤어지기도 하고 누군가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평생 잊지못할 사람도 있는데, 최근 나는 가락동성당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장례식 문상객 명단에서 최옥녀란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옥녀는 내가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 여동생이다. 그 이름은 주마등처럼 50년 전 일을 떠올리게 했다. 


  철수의 자살


 그 시절 나는 대학 우체국에서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그 한 통의 전보가 내 인생을 통채로 바뀌어버렸다. 경택이가 보낸 '철수 사망. 급히 하진 바람.'이란 전보다. 나와 철수 그리고 경택이는 '배건너 삼총사'였다. 우리는 친구들이 알아줄 정도로 셋 다 운동 공부 모두 잘 했다. 체격도 좋아 공부를 뒷전으로 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쌈질이나 일삼던 '태양'이니, '파도'니 하던 크럽 아이들도 우리는 피했다. 철수와 나는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고, 외우는데 특기가 있던 경택이는 법대가 꿈이었다. 

 그 해 나는 K대 철학과엘 입학했는데, 철수와 경택이는 진주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던지 남에게 떨어지지 않던 철수는 재수가 챙피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실존주의 흉내를 내려고 그랬을까. 어느 날 철길로 걸어가 주약동 터널에서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그 자살은 다분히 나와 관련이 있었다.

 나는 K대에 입학하자 국어는 <승무>의 시인 조지훈 선생에게 배우고, 철학은 당시 사상계란 잡지에서 이름 날리던 신일철 선생한데 배웠다. 의기양양해서 편지마다 키엘케골의 '생의 무의미한 의지', 쇼펜하우엘의 '자살예찬론', 니체의 '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마치 내가 배운 것인양 써먹기 시작했다. 철수도 서점에서 실존주의나 염세주의 책을 사서 읽고 뭐라고 응수했다. 그러다 나보다 더 심각하단 걸 보여주고 싶었던지 모른다. 선수 치듯 그가 자살을 감행한 것이다. 그와 나는 가정도 좋은 편이었고,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공부나 운동 모두 잘했다. 자살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불작난을 저지른 이유가 무얼까. 그 놈의 문학과 철학이 병이다. 그와 나는 염세주의자로 보이고 싶었고, 문학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이런 허황한 풋청년의 마음이 한 젊은이를 저승으로 데려간 것이다.


 그때가 중간시험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경택이 편지를 받자, 즉각 시험을 내팽개치고 기차 타고 진주로 내려갔다. 시험 같은 건 중요치 않았다. 그건 속물들이나 신경 쓸 일이었다. 진주역에는 마침 보리가 익어가는 철이었다. 농부들이 타작을 하고 있었다.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웠다. 이 세상 전체와도 바꿀 수 없는 친구의 자살로 나는 천지가 빙글빙글 돌고, 하늘이 꺼지는듯한데, 그들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이때 나는 세상은 나와 전혀 다른 질서로 움직이는 걸 느꼈다. 나는 <이방인>의 주인공처럼 실존이 나와 완전 단절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상가에서도 새 체험을 했다. 아들과 염세 자살을 뻔질나게 이야기한 친구를 상주에게 보이게해서는 않된다고 했다. 나는 뭐라고 말 한마듸 붙이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철수 어머니와 옥녀 모습만 보고 상가에서 밀려났다. 철수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던 미인이다. 옥녀도 어릴 때부터 이쁘다고 별명이 '새첩이' 다. 하얀 상복 차림 철수 어머님과 머리에 십자 모양의 흰 꽃을 단 옥녀 모습이 유난히 청초해 보였다.  

 경택이가 날 데리고 '당미언덕'으로 갔다. 자살한 총각은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철수를 화장한 재는 경택이가 남강에 뿌리고 뼛조각 몇 개를 우리가 여름에 따이빙하고 놀던 '매기통'이 내려다보이는 당미언덕 소나무 가지 틈에 끼워놓았다고 했다. 세월이 흐른 후 객지에 살다가 우리가 고향에 돌아와도 그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경택이가 소나무에 올라가 뼛조각 하나를 들고 내려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영혼 없는 뼈조각이 의미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우리는 늘상 같이 평행봉 하고, 남강변을 쏘다니고, 밤에 여학생 집 근처로 가보곤 했다. 그 철수는 이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이다. 나는 당미 언덕 풀밭을 스쳐가던 바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샛노란 원추리꽃 꽃잎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한 청춘의 끝자락을 흔들던 그 원추리꽃을 기억하고 있다. 경택이는 십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언젠가 그 언덕을 찾아가니, 바람이 외로운 나의 옷자락을 흔들다가 지나갔다.  

 

 군 입대


 이렇게 철수를 잃고 그 해 가을 나는 군에 입대 했다. 나는 사하라 주둔 프랑스 외인부대 같은 곳으로 가고싶었다. 그런 살벌하고 냉혹한 곳에서 어느 날 사건을 만들어 자살하고 싶었다. 그것이 죽은 친구에 대한 의리라 생각했다. 나는 '햇볕이 눈부셔 살인했다'는 <이방인>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었다. 실존주의가 무었일까. 나는 실존주의란 걸 잘 모른다. 무조건 까믜나 싸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작가를 존경했을 뿐이다. 21살 철학과 1학년짜리가 무얼 알겠는가. 학교는 철학개론 책 겨우 몇 장 가르쳐주고 중간시험 이었다. 중간 시험 다 치루기 전에 나는 진주로 내려왔고, 초상집 다녀온 후 학교 재시험 재등록 관계는 알아보지 않았다. 그냥 기원에서 동명이란 친구와 놀다가, 창 밖에 지나가는 징집대열 구경했다. 

'한번 따라가보까?'

 그 말 하나로 우리는 대열을 따라가 역에서 기차 타고 창원훈련소 가서, 바리깡으로 머리 깍고 훈련병이 된 것이다. 그것도 인상 깊다. 이발병이 척 나섰다. 어디로 보나 시골 구장 반장 속 안썩이고 입대한 산수갑산 출신이 뻔했다. 훈련소 이발병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햐아 이것들이 동작 뜨다. 군기가 하나도 않보여!'

신병들을 제 집 강아지 데리고 놀듯 논다. 

'전열 앞으로!'

열 명씩 의자에 나란히 앉히더니, 이발병 두 명이 바리깡으로 좌우 두번, 앞뒤 두번, 옆으로 빙 둘러 한번 깍고 '일어서! 다음!' 한다. 한사람 머리 깍는데 2분, 면도도 없고, 머리도 감기지 않는다. 이발병 두명은 신속 정확히 백여명 일개 중대를 30분만에 이발 완료 시켜버린다. 그 다음에 견장에 갈매기 두개 그려진 직업 하사관 내무반장이 나타났다. 그는 하얀 줄 쳐진 백바가지 아래 눈매가 살모사처럼 차급다. 그가 우릴 교실같은 불록 건물로 안내했는데, 건물 안에는 통로 양쪽에 널판지가 깔려있다. 이게 침상이다. 통로 가운데 드럼통이 있다. 이게 난로다. 그때가 11월 달이다. 

통로 양쪽에 육십명을 세우더니 피복을 지급하는데, 새옷도 아니고 칫수고 싸이즈고 없다. 운 좋으면 새 것이요, 운 나쁘면 누더기다. 덮고 자라고 담요 두 장 주고, 밥 먹으라고 평식기 국식기 주는데 모두 찌그러진 것이다. 수저와 화랑담배 한 값 지급하더니, 내무반장이 명령을 하달한다.

'동작 그만! 뒤로 돌아! 침상에 올라가 각자 지급된 피복을 관물함에 정돈한다. 개인 사물 일체 허용치 않는다. 사복과 사물은 포장해서 집으로 보낸다. 지금부터 영 점 오초 내로 군복 갈아입고 관물정돈 실시한다. 실시!'

그래 훈련병이 우르르 침상에 올라가자,

'복창! 복창이 없어? 동작 그만 전원 원위치!'

복창부터 가르치더니 전원 침상에서 복도로 내려오게 하고, 서너번 '실시! 원 위치!' 침상 오르내리기 시키더니

'군대는 도시락 싸가지고 소풍놀이 나온 곳 아니다. 까라면 그걸로 밤송이도 까야 하는 곳이다. 절대 복종, 절대 복창 절대 필요하다. 전진 하면 총알 날라오는 곳으로도 포복해서 전진해야 하는 곳이 군대다.'

간결하게 군대를 정의해주고 내무반장이 사라진다.


 그 당시 아들 눈치 살피던 어머님만 황당한 꼴 당했다. 노상 자살하겠단 말을 입에 달고다니던 아들은 보름 지나서야 훈련소 지시로 가정통신문이란 걸 집에 보냈기 때문이다.  


 K대는 첫학기 학점 미달은 제적이라는 학칙이 있다. 어쩌면 나는 그 치욕을 피하고 싶었던지 모른다. 나는 딴 배에 승선하여 항구 밖으로 나왔다. K대는 내가 떠난 항구 안에 있었다. 군대는 거친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다. 제법 비인간적인 냉혹함도 있었다. 나는 그 거친 파도가 좋았다. 거기서 철 없는 인생행로를 걸어갔다.

 훈련소는 행군과 피알아이 같은 고된 훈련이 훈련병을 지치게 한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동네 구장 반장 속 썩이지않고 군대와서 출세한 장기 복무 하사관들 런데 열흘 쯤 받았을 때다. 훈련병은 인간이 아니었다. 하도 배가 고파 짬밥통에 버려진 냄새나는 음식도 퍼담아 먹었다. 10분 휴식 시간 화랑담배 한 개피에 고향 생각 해보기도 했다. 구장 반장 속 않썩이고 군대 와서 출세한 놈이 훈련소 기관병이다. 쌩 촌놈들이 잘난체 씨부리는 건 볼만했다. 천년 만년 말뚝 박은 하사관은 돈을 거뒀다. 그들한테 바치는 돈 상납 억울했다. 그런 속에 느는 것이 비굴이었다. 군대는 인간을 비굴하게 만든다. 염치 없는 사람 만든다. 좀도둑 만든다. 남의 관물 손대다가 피투성이로 엉덩이 터진 훈련병 있다. 나는 내 내부에서 절망이 화산처럼 터지기 기다렸지만, 그때는 내부 용암 온도가 아직 때가 아니었다. 

 훈련소 끝나고 병과 받던 날, 나는 동명이와 의무병과 받았다. 하기사 동명이는 부산 경남고 가기 전 천전초등학교부터 진주중학교 줄반장한 친구다. 우린 최우수 성적 받았다. 그걸 기관병에게 부탁하여 수송으로 기루까이 했다. 나중에 자가용 생기면 운전하자고 내가 동명이를 설득했지만, 기실은 자동차 부대는 빳다가 난무한다. 거기서 절망하여 철수처럼 자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탄 기차가 엉뚱하게 최전방 103보충대가 아니라 해운대로 빠지는 바람에 나는 김이 빠졌다. '백삼보' 103 보충대를 이리 부른다. 훈련병은 백삼보 차출은 죽었다고 복창한다. 그러나 인생은 대개 이렇게 기대에 어긋난다. 여하튼 나는 수영비행장 옆 운전교육대에서 9주간 운전교육 받고 제3 항만사령부 229 수송자동차대대로 떨어졌다. 229대대란 곳은 부산 운전병들 사이에서 '지옥 대대'로 알려진 곳이다. 군함이 3부두에 싣고온 군수물자를 기지창에 나르는 부대라서 베아링, 피복, 총기 등 전부 돈 되는 군수물자 다루는 곳이고, 도둑질이 심해서 밤마다 빳다가 난무하는 곳이다. 

 거기서 동명이는 미군 카츄샤로 옮기고, 나만 남았다. 유엔묘지 옆 229자동차대대 철조망 옆에 피던 노란 칸나 생각난다. 밤에 철조망을 넘어 탈영하다가 잡혀온 사병 생각난다. 229 자동차 대대에서 도둑질 않해본 사병 없을 것이다. 부대 철조망 옆 보리밭에는 전문 '도꾸따이' 두어 명이 항상 진을 치고 있었다. 척이면 삼척이다. 작전 다녀온 운전병이 물건 철조망 밖으로 던지면 고무줄로 묶은 돈뭉치 밖에서 안으로 날라온다. 고참은 고향에 논을 산 경우도 있다. 가장 비싼 것이 베아링 이다. 베어링은 철사로 묶어 연료통 밑에 숨겨둔다. 작전에서 돌아와서 철사줄을 당기면 연료통서 줄줄이 베어링이 나온다. 한번은 양풍길 병장 도꾸따이 장면 본 적 있다. 그는 GMC 신품 인젝션펌프를 기존 인젝션펌프 옆에 시커먼 구리스를 칠한채 달고 나왔다. '이게 뭐냐?' 헌병이 본넷트 열고 묻자, 양병장 왈. '세상 무식한 놈 첨 보겠네, 초소 헌병이 그것도 모르냐? 노후 차량은 인젝션펌프 두개 달아야 간다'고 공갈쳤다. 

 고참들은 그날 차량이 부산 진해 등 어느 기지창에 갔다면 무슨 물건 날랐는지, 그걸 팔면 돈이 얼마 나오는지 훤히 안다. 그래 가장 값나가는 병기창 물건 수송한 날 밤엔 빳다가 춤을 춘다. 빳다는 도깨비 방망이다. 치면 칠수록 돈이 더 나온다. 기발한 고참은 빳다 대신 고무호스를 애용하기도 한다. 침대마후라는 소신껒 치면 뼈가 상하지만, 고무호스는 낭창낭창 뼈를 상하게 하는 법 없다. 악질들은 고무호스에 물을 묻히기도 한다. 그건 살속을 파고들어 더 아프다. 자동차 대대 내무반에는 벼라별 인종 다 있다. 영도에서 밀수하던 사람도 있고, 인천 부두에서 깡패하던 사람도 있다. 부산 15P 감방에서 별을 단 전과자도 있다. 그들간 서열이 있고, 간혹 서열 때문에 싸움도 벌어진다. 실탄 장진한 칼빈 들고 내무반 안팎을 이리저리 쫒고 쫒기며 쏘다니면서 총질 하는 것이 마치 서부영화 장면 같다. 불쌍한 졸개들은 관물함에 얼굴을 쳐박고 활극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가 맘에 들었는데, 우연한 일로 엉뚱한 존재가 되었다. 세상 일 뜻대로 되질 않는다. 나는 자살할 때 쓸 요량으로 실탄을 훔쳐 내 GMC 운전대 위 호르 속에 감춰두었다. 우리 중대가 수영 부두에서 지금 해운대 신시가지가 된 장산 밑 탄약창 창고에 나를 때 칼빈 실탄 이십 여발을 거기 감춰두었다. 그걸 어느 토요일 오후 차량 점검하던 ROTC 소대장 홍소위가 발견한 것이다. 군에서 사병이 실탄을 빼돌린 사건은 큰 사건이다. 전 중대에 비상이 걸렸고, 일요일 밤에 내가 귀대하자 홍소위는 일단 나를 밀실로 데려갔다.

'실탄을 왜 빼돌렸느냐?'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친구가 자살하여 입대했습니다. 필요할 때 쓸려고 그랬습니다.'

자살할려는 놈은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실탄은 어디서 구했나?'

'수영 부두에서 구했어요.'

그날 주번사관이 홍소위 아니고 딴 사람이었으면, 나는 끝났을 것이다. 영창 가고 불명예 제대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소위는 K대 선배다. 그는 내무반 사고자들을 불러모았다. 중대 내무반에 전방에서 사고 치고, 남한산성에서 벽돌 굽다가 온 전과자 출신 몇 명 있다. 

'김일병은 내 대학 후배다. 이놈이 우리 대대 유일의 대학생 운전병인데, 그놈 차에서 실탄이 나왔다. 내가 철학 문학하는 놈을 아는데, 그런 놈들 세상 모르고 그런 짓 한다. 내 얼굴 봐서 체면 좀 살려주겠나?'

 홍소위는 성격이 좋아 사고자들과 친하다.

'소대장님! 그 놈 우리가 알아서 제대할 때까지 열외 해줄테니 걱정 마세요.'

이 바람에 나는 제대할 때까지 내무반 '열외'였다. 한번도 완전군장하고 영점 5초 내로 연병장에 집합한 적 없고, 침상에 두다리 걸치고 철모에 맨대가리 박는 원산폭격 해본 적 없다. 

 거기다 어느 날 내무반 사고자 왕초였던 김대지 병장의 총애를 받을 일도 생겼다. 행운은 항상 쌍으로 온다. 어느 토요일 오후 사병들은 모두 관물함 A급 피복 갈아입고 외출준비 하고, 김병장은 다섯 장 포개 쌓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사회 밑바닥에 살다가 온 사람이다. 해방 후 일본서 여동생과 귀국해서 살다가 여동생을 수녀원에 맡기고 입대했다. 군에서는 사고 치고 남한산성 형무소에 들어가 총감방장까지 했다. 그 세월에 여동생과 소식도 끊어졌다. 사고자 왕초로 내무반 왕이지만, 갈 곳이 없다. 너무 쓸쓸한 눈빛이라, 그날 마침 내가 내무반 근무라, 

'김병장님! 제가 PX에서 막걸리 한 잔 대접할까요?'

말을 걸었다.

'뭐? 네가 막걸리를 사?'

 김병장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 손목 잡고 PX로 가더니, 

'나는 사회 나가면 밑바닥 인생이다. 너는 우리 대대 유일한 대학생 운전병 아니냐? 여기서야 빌빌거리지만, 너와 나는 신분이 다르다. 그런 니가 나한테 술을 산다고?'

김병장의 목소리는 사못 떨리기까지 했다. 몇 잔 술잔 오가자 김병장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사회 나가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서 귀환선 타고 온 여동생은 어느 수녀원에 있는지 모른다. 여동생 이야기, 이북 출신 대대장 차 운전하다가 봉급을 떼먹고 탈영한 이야기.


 3병원 병원장 운전수로 보내졌다가 김병장 데려가라고 하소하는 바람에 도로 친정 복귀한 이야길 했다. 지루한 이야기 다 듣자, 

 '나는 사회 밑바닥 인생이다. 너는 사회 나가면 대학 다닌 사람이다. 그런 네가 술 사서 고맙다.'

 그러면서 애초에는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 하더니 술 더 들어가자 내 손 잡고 엉엉 울었다. 김대지가 김일병 손 잡고 울었다는 소문은 금방 부대에 퍼졌다. 그 이후 나는 800 중대 내무반 초 VIP로 대접받고 살다가 제대했다.

 나는 주량이 센 편이다. 중대 막걸리 마시는 대회에서 한 말 마시어 2등 한 적 있다. 1등은 한 말 반 마신 인천 부두 깡패 정봉율 상병이다. 간혹 작전 다녀오면 ROTC 장교들이 주보에서 나를 불렀다. 대대 유일의 대학생 운전병 주량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럴려고 군에 입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철수와 의리를 지키고싶었다. 사하라 주둔 외인부대를 기대했다. 냉혹한 군대에서  자살할 생각을 했다. 그 시덥잖은 문학 때문이다. 그래서 훈련소에서도 기관병에게 돈 주고 부탁해서 의무병과를 수송으로 기리까이하지 않았던가.

 외출 나가서는 위험한 곳을 드나들었다. 서면 '하이에리어' 미군 부대 주변 사창가가 그곳이다. 한번은 거길 배회하다가 15P 헌병을 구타하고, 헌병 백바가지와 완장, 하얀 장갑을 빼앗아 착용했다. 휴가병 잡아 외출증 검사한다며 돈을 뜯었다. 나는 대학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다. 아무도 힘으로 날 제압할 수 없다. 부전동 철도골목에서 고래고기 안주로 몇 잔 하고 부대 들어갔더니, 그날 15P 헌병대 운전병 파견 나간 양풍길 병장이 와 있었다.

'지금 전 제부지구 헌병대에 비상 걸렸다. 빨리 그 증거물 없애라'

 그래 헌병 화이바와 완장 꾸겨서 난로에 쳐넣고 태워버렸다.

 사고 치고 싶었으나 사고가 나를 피해 다녔다. 운명의 신이 장난을 치는듯 했다. 자살할려고 준비한 실탄 때문에 나는 오히려 내무반에서 '열외'가 되었다. 하이에리어 부대 근처 사창가도 나만 가면 헌병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나를 실존주의자라 믿었지만, 실은 완전히 '싸이코패스'(psychopath) 였다. 

 

    

그 당시 최무룡이 부른 '원일의 노래'라는 유행가가 있었다.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순정을
옥녀야 잊을소냐 헤어질 운명 차거운 밤하늘에 웃음을 팔더라도
이제는 모두 잊고 내 품에 잠들어라.'

 

 철수 동생 옥녀는 얼굴이 갸름하고 이쁜 편이다. 나는 옥녀 오빠가 되고 싶었다. 옥녀하고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적 없고, 옥녀가 차거운 밤하늘에 웃음을 파는 그런 상황도 아니지만, 나는 '원일의 노래'를 부르며 옥녀를 생각했다. 그러다 어떤 경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옥녀가 서면 로타리 뒷골목에 산다는 이야길 들었다. 막 고등학교 졸업한 다음 해다. 가서 군복 입은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머님에게 철수 대신 아들이 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자 서면 로타리 그 집은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50년 전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철수 어머님은 그때도 날 원망하는 것 같았고, 옥녀는 대문 밖에 나와서 날 배웅해준 것 같긴 하다.

 

  남해에서


 철수 자살 후 나는 부모님 애간장 어지간히 태워드렸다. 229 자동차 대대가 가장 자살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군에서 자살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나는 군에 입대할 때도 그랬지만, 이때도 말 없이 집을 나왔다.  

 까뮈의 소설 <이방인>을 보면, 주인공 뫼르소는 어느 날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받고 시골의 초라한 수녀원에 가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는 어머니를 본다. 장례식을 마치고 뫼르소는 애인 마리아와 함께 해수욕장에서 사랑은 나누고 저녁에는 영화를 본다. 그리고 아파트 이웃 사람이 졸라대는 바람에 그와 친구가 되고, 그 친구와 반목하고 있는 아랍인과 마주쳐 대치하다가 대낮의 사정없이 내려쪼이는 햇볕 때문에 눈이 아물거려서, 아랍인이 칼을 뽑자 건네준 권총으로 아랍인을 사살한다. 이 우발 사고의 재판은 살인이 계획적인 것인지 아니지에 따라서 유죄 무죄로 갈라진다. 뫼르소는 자기의 행동과 검사가 재구성한 범죄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생각한다. 방관자 같은 모습으로 배심원이 사형이라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어 사형선고를 내리자, 뫼르소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처한 부조리를 생각하며, '내가 사형 집행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씨니컬한 생각을 한다.

 나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까뮈의 <이방인> 주인공이 보여준 실존의 의미를 믿었다. 인생의 본질은 부조리며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 세계에서 명확한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세계의 침묵 앞에 번번히 좌절 당한다. 때문에 우리는 과연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 빠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구절도 절절이 믿었다. 22세 청년으로서는 노벨상 수상작가의 사상은 판단의 대상 아니었다. 무조건 존경의 대상이었다.

 

 어느 날 나는 가방에 영문 성경 한 권에 원고지만 챙겨넣고 집을 나왔다. 어디로던 가고 싶었다. 무조건 버스를 탔는데, 차는 서장대 밑을 지나 곤양으로 가다가 동네마다 서서 사람을 태운다. 몸뻬 차림 아낙과 하얀 무명옷에 두루마기 차림 남정네들이 타고내리는데 한참 꾸물거린다. 중간에 수심은 얕으나 부드럽기 비단 같은 바다가 보이고, 비토(飛兎)섬이  보였다. 거긴 고2 여름방학 때 나와 철수가 머물었던 섬이다. 같이 바지락 미끼로 장어를 잡아 고추장 발라 구워먹던 생각났다. 

  차가 노량에 닿자, 이쪽 금오산과 남해 망운산 사이 해협에 황혼이 지고 있었다. 짭쪼롬한 갯내음이 코를 스쳤다. '아! 여기서 한마리 외로운 갈매기처럼 섬을 헤매다니자.' 버스를 내려 가파른 돌계단 내려가니 늠실늠실 푸른 파도가 발끝에 닿는다. 선체에 붉은 칠한 낡은 철선이 오더니 사람 태우자, 탈탈탈 공중에 발동기 검은 연기 날리며 바다를 건너간다. 물살 거센 여기가 이순신 장군 노량해전 치른 장소다. 

 배 닿자 부르릉 남해읍 가는 버스가 시동 건다. 들판은 황혼의 해가 금실을 수놓았는데, 작물은 풍요롭고, 남해 사람은 표정도 순하고 말씨도 순하다. 해가 산 위로 꼴깍 넘어가고 나서 읍에 닿자, 사람들 흩어진 터미널엔 어둠만 짙다. 여관이 없던 시절이다. 잘 곳을 찾아보니, 국밥집에 국밥 먹는 장꾼 차림들이 보인다. 옳치 무슨 수가 있겠다 싶어 거기 앉아보니, 국밥 먹은 사람은 그 집 뒷방에서 잠을 잔단다. 초가지붕 위로 삐쭉 나온 굴뚝은 사람 손 닿을만치 낮고 오랜 세월 연기에 그을러 시커멓다. 화장실 냄새 나는 방은 기둥에 걸린 때묻은 남포등 유리를 통해 나온 불빛이 어슴프레 실내를 비치고 있다. '좀 땡깁시다!' 왕년에 부산 서면 하이에리어 부대 근방에서 헌병도 구타해본 몸이다. 시골 봇짐장사 쯤이야 귀엽다. '거기 재떨이도 이리 주소' 재떨이까지 챙겨놓고 담배 물고 누워보니, 가난한 봇짐장사꾼 옹크린 모습이 타향의 고독을 말해준다.

 들락거리는 사람이 열어젖힌 문으로 찬바람 들어오는 바람에 잠을 깨었다. 희뿌연한 새벽인데 장꾼들은 새벽 세수하는라 들락거린다. 부얶 가마솥은 뚜껑에서 쎄쎄 소리내며 김 품는다. 아궁이 군불 타는 소리 탁탁 들리고, 방안에 낼름낼름 뻘건 불빛 비친다. 오지그릇에 퍼담아주는 국밥 후루루 마시는데, 사는 형편이 좋아 그런가. 인심 좋은 오십대 아주머니 인물도 곱상한데, 밥통 아예 내놓아 장꾼들이 자기 양껒 밥을 퍼먹는다. 그 칼바람 부는 부산 인심과 대조된다.

 제삿밥 먹은 셈치고 도로 방에 들어가 한참 누웠으니 이둠이 걷힌다. 터미널 대합실에 가서 파리똥 시커멓게 묻은 노랗게 물든 남해 지도란 걸 보았다. 귀퉁이는 닳아 보이지 않는다. 거기서 섬 끝머리에 있는 동네 이름을 알았다. 


 미조리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보니 도로가 바다로 가는지 육지로 가는지 모르겠다. 바다가 육지로 파고들어온 것을 만(灣)이라 하고, 육지가 바다로 밀고나간 것을 곶(串)이라고 하는데, 산굽이 비포장 황토길 돌때마다 바다와 육지가 번갈아 나온다. 가다보니 바다에 뜨있는 섬도 보이고, 바위로 덮힌 산꼭대기에 제비집처럼 올라앉은 보리암도 보인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린다. 간혹 새소리도 들리지만 너무나 고요하여 마음이 편해진다. 이곳은 돈도 명예도 필요없고, 공부도 필요없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직 자연만 있었다.

 이렇게 버스가 달리다가 마지막 선 곳이 미조리다. 두어 명 버스 같이 타고온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가버리자 포구엔 덩그러니 나만 남았다. ㄱ 섬 마지막 동네에 내렸다. 당시 미조는 낮으막한 돌담집 몇 개 있던 작은 포구다. 저녁이면 삼천포서 들어오는 '망운산'호가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를 스피커로 틀곤했다. 


선주(船主)집 잔치


 손바닥만한 섬이라서 대학 다닌 총각이 미조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어느 날 옆 동네 잔치집에서 초대장 날라왔다. 배를 여나믄 척이나 가진 부자집이라 했다. 송정 그 집은 높은 소슬대문에 한문으로 입춘대길 먹글씨 크게 붙혀놓았고, 체격 당당한 황구는 사람 보고 꼬리부터 친다. 동네 사람 다 모인듯 했다. 가마솥에선 탕수국 냄새 진동하고, 뒤집은 솥뚜껑에선 파전 굽는 소리 요란하다. 유과 튀기는 사람, 시금치 고사리 다듬는 사람, 등에 애기 업은 소녀, 저고리 고름 풀고 애기 젖 먹이는 여인, 뛰어다니며 뭘 얻어먹는 아이들 모습 한 폭 풍속화 같다. 남정네는 장작 패고, 군불 지핀다. 노인네는 담뱃대 입에 물고 대청마루에 앉아있다. 풍채는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고, 삼베옷 주머니에 풍년초 봉지 들어있고, 가랑이 넓직한 베잠방이 사이로 칡뿌리 같이 시커먼 다리 보인다. 선주는 색상 촌스러운 양복 입었다. 그러나 대청에 넥타이 메고 앉은 모습 당당하다. 

'서울서 공부한다는 그 총각인가?'

'이쪽으로 오소.'

 내가 나타나자 노인들 눈치 하나 빠르다. 진사시 합격한 도령 대하듯 자리 비켜준다. 선주 앞 교자상에 앉아보니, 상 위에는 밤, 대추, 곶감, 강정, 약과, 잡채, 전골, 신선로, 탕수국, 실고추 얹은 도미찜 가득하다. 내가 왜 이런 귀빈 대접 받는가, 그 까닭은 나중에 알았다. 부자집 만량판 수연(壽宴)의 백미는 헌수다. 부모님께 잔 올리는 헌수(獻壽) 잔 들고 나온 처녀 가슴팍에 숙대 뺏지가 달려있다. 숙대라면 알만하다. K대 응원가에 '이대생은 우리 것, 숙대생도 양보못한다'는 구절 있다. 숙대는 안암골 축제 단골 파트너다. 그가 날 초대한 것이다. 

 그는 마치 장원의 공주 같았다. 외동딸이라 했다. 선주는 잔을 비우자, 그 잔을 내게 돌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명딸이 초청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마신 술은 내 평생 마신 술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술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도를 이룬다고 한다. 안주인이 목욕재계하고 담근 비전의 술이라 한다. 재료는 수수라는데, 색은 거무티티했지만, 맛이 그리 달콤하고 시원할 수 없다. 찰랑찰랑 대접 가득 채운 술이 단숨에 목 넘어간다. 세상에 이럴 수 없다. 그 명주가 그 외진 바닷가에 있을 줄이야. 소동파 말대로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 이다.


 그날 밤 자정 넘어 걸어서 집에 왔다. 달빛은 야트막한 돌담 위에 비치고, 물에는 '망운산'호 등불이 어리고, 등대불은 일 이초 간격으로 바다 지나간다. 금순이는 잠든 모양이다. 무화과 나무 밑에서 목욕하는 사람이 있다. 금순이 엄마다. 허룸한 옷으로 가려졌던 시골 여인 몸매기 그렇게 탄력적일 줄 몰랐다. 뒤챌 때 가슴의 융기와 젖은 겨드랑이 보인다. 철썩철썩 물소리 자극적이다. 나는 여인이 목욕 끝내고 다리 올려 팬티 입고, 치마 걸치고, 젖은 머리 만지며 방으로 돌아가는 전과정을 다 보았다. 모두 잠든 밤 일부러 날 보라고 저런 것일까. 하기사 백석의 시를 보면,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 매어 죽은 밤도, 묵은 초가지붕 위 박이 달같이 하얗게 빛나는 밤' 이라고 했다. 

'물 마시려고요?'

내가 부억에 들어가자 여인이 들어왔다. 컴컴한 부얶에 여인 몸 냄새와 쌔근쌔근 내뿜는 숨결 느껴진다. 물 바가지 건네는 여인의 손길 떨린다. 마당의 무화과나무만 달빛 아래 몸을 떨면서 그 모습 지켜보았다.

 사메셋 모음의 소설 <면도날>에서 주인공 래리는 참전 중 자신을 돕기 위해 전우가 총상으로 죽는 장면을 목격한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도 쌩쌩하던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자,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삶이란 눈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낸 비극적 실수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존재의 근원적 물음에 직면한다. 그래 광산노동자, 생선장수 같은 불루칼라 속으로 들어가 일도 해보고, 인도의 고산지대를 방랑하기도 한다. 그러다 라인강 도보여행 할 때다. 어느 농가 건초더미 위에서 잠 자다가, 자기보다 연상인 여인이 입술로 자기 입에 키스하고, 팔로 목을 휘감고, '조용히 해요' 숨가쁘게 속삭이던 경험도 한다. 그때 래리는 겨우 스물 셋 이어서, 여자의 비위를 상하게하고 싶지 않아, 해주기 바라는 행동을 해주었다고 한다. 나 역시 막 제대한 스물 셋이라 여자가 원하는 행동 해줄 나이다. 그녀의 뜨거운 작은 입술에서 마그리트 꽃향기 같은 게 나던 기억 난다. 살이 닿았던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는 다르다. 남녀는 평소 별처럼 먼 존재지만, 한번 살 닿으면 하나가 된다. 그가 나보다 열 살 연상이지만 그건 문제되지 않았다. 

 키엘케골은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해보라. 그대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결혼 하지않고 있어보라. 역시 그대는 후회 하리라. 결혼을 해도 하지않아도, 그 어느 편이던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연애를 해보라.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연애하지 말아보라. 역시 그대는 후회 하리라. 연애 해도 않해도, 그 어느 쪽이던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역시 키엘케골 말이 옳다. 나는 그럴려고 남해 간 게 아니었다. 금순이한테 노트와 학용품 몇가지 사서 손에 쥐어준 후 미조를 떠났다.



 욕지도에서


그러다 몇 달 뒤 욕지도로 건너갔다. 삼천포 떠난 배가 망망대해 몇 시간 건너가도 여전히 닿지 않는 먼 섬이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섬에 혼자 살고 싶었다. 외딴 수도원 신부님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고싶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이 있다. 거기 베네딕트 계열 수도원처럼 나도 청빈과 노동 의지하며 장미 키우며 살고 싶었다. 한번은 반나절 산길 걸어 어느 외진 바닷가 동네에 가서 한 여선생 만난 적 있다. 학교에 선생은 여선생 혼자였다. 아이들에게 철봉과 씨름 가르켜주자, 여선생은 날더러 거기서 같이 아이들 가르키자고 한 적 있다. 당시 낙도 외진 학교는 고졸이라도 교편이 가능하던 시절이다. 

 나는 이 당시 비로소 인생의 생살을 체험했다. 그 전에는 생살을 보호하는 위에 다른 피부가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잊혀진 사람이란 걸 알았다.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처럼 비참한 건 없다. 친구가 자살하여 군에 자원입대한 처음에는 주변에 걱정하는 사람 많았다. 형은 편지를 보냈고, 나는 파도 밀려오는 제3부두 데크에 주차한 GMC 운전대에서 답장을 쓰곤 했다. 남해에 있을 때도 편지가 왔다. 친구들은 철수 자살과 나의 입대, 그리고 섬으로 떠난 일련의 행적을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나를 잊어버렸고 소식을 끊어버렸다. 이때 비로소 나는 진짜 외롭게 된 것이다. 학교는 제적되어 있었다. 퇴로가 없었다. 고독이 뼈에 사무쳤다. 그 전 나의 절망은 전부 가짜였다. 낭만적 염세주의 였다.

 깊은 밤 혼자 펄럭이는 촛불 앞에서 눈물 흘리며 성경을 읽곤했다. 해무가 짙게 끼면 두 손을 앞으로 벌려도 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천지를 구분할 수 없는 그 해변을 무작정 걸어다녔다. 들려오는 것은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 울음소리와 파도소리 뿐. 잠 자다가 꿈속에서 '종암동 서울역 가요!' 하고 외치던 18번 버스 차장의 목소리를 들은 밤은 혼자 일어나 서러워 울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서울이 그리워 한없이 울었다. 나는 비로소 키엘케골, 쑈펜하우엘, 니체 같은 사상가들의 철학이 엉터리란걸 깨달았다. 지식인의 말잔치에 불과했다. 현학적이지만 실제 상황에선 아무런 약효가 없다.

 어느 날 모종의 결심을 하고 나는 동항리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주머니엔 소주 한 병과 유언장이 들어있었다. 밑엔 출렁이는 바다가 있었다. 중간에 소나무가 있다. 나는 그 소나무에 기대어 소주를 마시고 취해 잠들었다가 떨어질 심산이었다. '운명아 데려가고 싶으면 네 맘대로 데려가라'는 심보였다. 내 시신은 파도 따라 떠다닐 것이다. 유언장은 비닐로 싸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사람들은 유서를 읽어본 후 진주로 연락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운명의 여신이 작난을 쳤다. 내가 눈을 뜨자 거기가 저승이 아니었다. 바다는 진홍의 포도주 빛이었다. 해지기 전 구름은 찬란한 황금빛 이었다. 

'천지창조 했나?'

 씨니컬한 생각이 들었다. 자살이 실패한 것이다. 잠버릇 심한 내가 바다에 떨어질 것이라 믿었는데, 소나무를 붙들고 얌전히 깬 것이다. 

'그렇다면야 운명한테 더 이상 굽실거릴 필요 없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보다. 운명이 날더러 더 살아라면 살아보자.'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마치 백년 인생 다 산 사람 같았다. 마음은 식은 재처럼 싸늘했다. 절벽 위로 올라오니 빤짝이는 별이 보였다. 별을 본 순간 나는 니체의 '초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온 나는 냉정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수도승처럼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더 이상 키엘케골이나 쇼펜하우엘에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런 건 사춘기 아이들 작난이다. 나는 서양철학을 버리고 미친듯이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그 후 불교신문 기자가 되었다.

 

 최옥녀란 이름 앞에서 이렇게 깊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한 여인이 닥아왔다.

'오빠! 옥녀가 철수 오빠 동생인건 알지요?'

정애여사다. 그는 옥녀하고 동기다. 정애는 집이 사천인데, 여고 시절 동생 명애가 우리집에 하숙하여 자주 온 적 있다. 

'알지. 서울 사는 모양이네?' 

'아까 잠깐 보였는데, 집에 간 모양이네요. 남편하고 사별하고 송파에 혼자 살고있습니다.'

'옥녀 밑에 또하나 여동생이 있고, 철웅이라는 남동생도 있었는데?'

'네! 철수 오빠 밑에 철웅이가 있고, 지금 철웅이가 부산서 어머님 모시고 살아요.'

정애가 소식을 잘 안다.

'정애씨도 이젠 칠십 넘었으니 정애여사라고 부릅시다. 정애여사! 옥녀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오빠가 옥녀한테 그런 맘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고...철수 자살하고 나도 자살한다고 대학 중퇴하고 입대하고, 제대 후도 2년을 섬에서 살았어요. 그동안 옥녀 오빠 노릇 해줘야한단 생각도 많이 했고...해줄 이야기 많고.'

'그럼 오빠가 옥녀를 한번 보고싶긴 하겠다.'

'그래서 정애여사한테 부탁인데, 한번 자릴 만들어 주면 어떨까?'

'내가 죽전역 근처에 자리 만들어 볼께요.'

 정애여사는 만사 똑똑한 여자다. 그런데 소식이 없다. 혹시 옥녀가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ㅜ조리한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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