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

돌아가리로다

김현거사 2018. 4. 15. 07:24

 

  돌아가리로다

 

 돌아가리로다. 거기 복숭아꽃  가랑비에 젖는 강촌이 있다. 섶다리 아래서 아이들이 은어를 잡고, 버들숲에서 종달새 우는 강촌이 있다. 연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들으러, 강촌으로 가리라. 뽕나무 위에서 한가로히 닭이 울고, 야산에서 장끼가 꿩꿩 우는 산촌이 있다.  해오라기 나르는 푸른 강이 있다. 내 어이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가리라. 편의점도 마을회관도 없는 거기, 강에 섶다리가 있고, 나락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논이 있다. 십리나 떨어진 장에서, 올해 추수한 콩이랑 팥을 팔아, 메밀전 안주에 탁배기로 묵 축이고 돌아오는 노인이 있다. 고등어 자반 잠시 옆에 내려놓고, 장죽에 불 붙여, 공중으로 날라가는 연기를 바라보던 아름다운 섶다리가 있다. 

  歸去來兮 (돌아가리라!) 田園將蕪胡不歸(전원이 장차 황폐해지기 전에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랴). 대학시절에 좋아하던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명문장이라기에 그 원문을 외우고 다닌 적 있다. 그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맘을 이 시에 의탁하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산촌으로 돌아가리라. 거기 겨울 텃밭에 푸른 채소 자라는 남쪽 어디로 가리라. 해남이나 보성 어느 이름 모를 골짝도 좋고, 거제나 남해도 좋고, 통도사나 토함산 아래도 좋겠다. 그런 곳이라야 없는 사람이 일년 내내 싱싱한 푸성귀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되도록 인적 먼 곳이면 좋겠다. 사람 멀어지면 세상 일 잊게되고, 세상 일 멀어지면 마음 한가해질 것이다. 자연에 더 눈이 갈 것이다. 최소한 옆에 작은 개울은 하나는 있으면 좋겠다. 개울이 있어야 사시사철 맑은 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사람이 먹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다. 이왕이면 작은 쏘가 있으면 좋겠다. 거기서 목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재와 피래미 하고 놀 것이다, 개울가에 작은 황토방 하나 지으리라.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리라. 간결에서 청정을 얻으리라.

 

 내 일찍이 욕심 속에서 살아왔다. 어려서는 공부 잘 하야 한다는 중압감에 부대끼며 살았고, 커서는 돈 욕심, 벼슬 욕심, 자식 욕심 속에 묻혀살았다. 미꾸라지처럼 몸을 더러운 진흙탕 속에 두었다. 이제 한 포기 백련이 되련다. 진흙 속 꽃을 피우련다. 담 위에 박꽃 얹고, 달빛 아래 그 빛을 감상하리라. 세상에 가장 그윽한 교유가 달님임을 깨달으리라. 고관대작 보다 개똥벌레와 북두칠성이 귀한 것임을 깨달아 보리라. 구름 속 달이 얼굴 내밀어 마당의 멍석을 밝게 비춰주는  곳, 희미한 등잔불 아래 풀벌레 소리 들려오는 곳으로 나 돌아가리라. 거기 아궁이에 군불을 때리라. 산에서 나무 해오고, 장작을 패고, 톡톡 틔는 군불 타는 소리 들으리라. 군밤과 고구마 익는 냄새 맡으리라.  

 간혹 산중을 헤매며 칡을 캐리라. 더덕도 도라지도 맥문동도 캐리라. 대밭에서 죽순 따고, 물가에 미나리 심고, 텃밭에 당귀 심으리라. 앞마당에 감나무 무궁화 매화도 심어보리라. 서리 내린 감을 따서 곶감도 만들고,  피는 무궁화 꽃 감상하고, 옥비녀 꽂은 여인같은 매화의 청고한 향기 맡아보리라. 매화를 보며 서호의 시인 임화정(林和靖)을 생각하고, 국화를 보며 도연명을 생각하고, 대나무를 보며 소동파를 생각하리라.

 토란은 넓은 잎에 굴러가는 아침 이슬이 좋고, 매화는 옥비녀 꽂은 여인처럼 향기가 청고(淸高)하여 좋고, 노송은 고고한 푸른 빛이  탈속(脫俗)하여 좋다.

 국화 옆에서 도연명을 생각하고, 대나무를 보며 소동파를 생각하리라. 연꽃 앞에서 주렴계를 생각하고, 매화를 보며, 서호에 은거하여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은, 시인 임화정(林和靖)을 생각하리라.

이미 지난 날은 탓하여 무엇하겠는가. 조롱에 갖힌 새처럼 갖혀있던 지난 날을 탓하여 무엇하랴. 이제 새처럼 바쁜 날개짓 하며 말 없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리라. 

 

  내 어이, 춘산에 가득 핀 꽃 아롱아롱 수면에 비치는 강촌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두어 이랑 밭에 고추와 상추 심고, 고구마와 감자를 심으리라. 가을이면, 대추가 익고, 석류가 익고, 가지가  휘어지도록 붉은 감 달리는 감나무가 있다. 누렁텅이 호박이 지붕 위에 살찌고, 알암이 산에서 저절로 벌어져 떨어지는, 그 풍요로운 땅으로 내 어이 돌아가지 않으리.

 

  죽순은 채소의 보배요, 복숭은 과일의 보배요, 게는 수서동물의 보배요, 술은 음식의 보배이다.

 여름에는 작은 조각배 젓는 삿갓 쓴 어옹에게 부탁도 해보리라. 붕어찜에는 죽순 요리가 최고요, 화채에는 복숭아가 최고다. 국화철에는 민물털게 맛이 최고요, 시흥(詩興)에는 술이 최고다.

 차는 혼자 마시는 걸 이속(離俗)이라 하고,  둘이 마시면 한적(閑寂)이라 한다. 맑은 샘물로 차를 끓이고, 기괴한 바위 옆에 자리를 펴리라. 혼자 이속(離俗)을 맛보고, 바둑 두는 노인과 둘이 한적(閑寂)을 맛보리라.

 두견주, 매화주, 솔순주, 머루주, 연엽주, 담아놓고, 때 맞춰 술동이 개봉하니, 신선은 남의 일이라 치더라도, 불노(不老)는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산에 샘이 있고, 바위에 이끼가 있고, 꽃에 나비가 있고, 사람에게 흥취가 있다.

 천지만불 중에서 가장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셋 있다. 하늘에 달이 있고, 새 중에 뻐꾸기 있고, 초목에 버드나무가 있다. 천공의 달처럼 맑은 것 없고, 녹음의 뻐꾸기소리처럼 맑은 것 없고, 강변의 버들처럼 부드러운 것 없다. 오직 이 셋이 청교(淸交)를 맺을만한 것이다. 그 외 산광(山光), 수성(水聲)이 있어, 산빛은 아침 저녂이 아름답고, 물소리는 밤과 새벽이 특히 고요하다.

 멀리 할 것은 두가지 있으니, 첫째는 부귀한 사람이요, 둘째는 그들에게 굽신거리는 사람이다. 부귀하면 대개 욕심이 많고 오만하기 쉽고, 아첨하는 사람은 대개 뜻이 비루하고 천박하기 쉽다.  

 

 비 오는 날은 꽃묘종 옮기고, 달 밝은 밤은 노대에서 달을 보리라.  

 강에서 목욕한 후, 산들바람에 휘파람 불며 돌아오고, 민물게와 고동을 잡아, 한 표주박 술안주 삼으리라. 

 간혹 소매자락에 흰구름 스쳐가는 산 속 암자를 찾아가리라. 바위에 앉아 선시(禪詩)를 읽으리라.

  개자원화보를 죽상(竹床)에 펼쳐놓고, 석도(石濤)나 팔대산인(八大山人)의 산수화를 그려보리라. 법첩(法帖) 꺼내놓고 천하제일 명필을 감상 하리라. 곱고 매끄러운 오동나무 수피에 작은 칼로 시를 새겨보리라.  

 왕희지가 집에 있을 때, 가느다란 꽃잎이 잔뜩 난 꽃의 꽃잎 수를 세는데 전심하느라고, 옆에 제자가 손수건을 들고 서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꽃은 방향을 풍기므로 미인보다 낫다. 

 사람들은 모두 부귀영화를 바라지만, 나는 홀로 한가함을 구하리라. 세상에 한가한 일보다 좋은 일 없다. 한가하면 책을 읽게 되고, 산을 오르게 되고, 그림을 그리게 되고, 꽃을 완상하게 된다. 

 

 돌아가리라. 달에 영허(盈虛)가 있고, 꽃에 성쇠가 있고, 사람에게 때가 있다. 

 부귀는 바라던 바 아니었고, 명예도 그러하다. 분수를 알고, 검소를 즐기면, 낙(樂)은 스스로 찾아온다. 

 대나무 평상에 빗겨앉아서, 봄에는 매화를 기다리고, 여름에는 과일을 기다리고, 가을에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설후관산(雪後觀山)을 기대하리라.

구름은 무심히 산골짝에서 나오고, 꽃은 무심히 피고, 날 저물면 나르던 새는 무심히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돌아가리라. 새가 둥지로 돌아가듯, 돌아가리라. 나물국 맛있게 먹고 무심을 배우면, 한 무릅 펴기 그처럼 편안할 것을, 더 이상 무엇을 애태우고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돌아가리라. 강촌으로 돌아가 이슬에 함초롬히 젖은 구절초처럼 살리라. 뻐꾸기와 종달새, 달과 구름 친구하고 살리라. 몇권 서적 외에는 재물도 명예도 구하지 않으리라. 바람이 고요하면 나도 고요하고 바람이 조용하면 나도 조용하리라. 자연에 몸 맡기고, 오로지 천명을 누리다 가면 그만이지, 더 이상 무엇을 구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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