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템풀스테이
인생은 여행과 같다. 끝에 갈수록 배낭 안에 쓸데없는 것이 많아진다. 그걸 비워야 한다. 1박 2일 쌍계사 템풀스테이 그래서 나섰다.
김삿갓 아니지만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길 나서니, 날씨가 내편이다. 어제 밤은 비오더니 논물이 찰랑찰랑, 농부는 바지 걷고 논둑을 왔다갔다, 하얀 해오라비도 보인다.
천안 공주 쯤 산을 허옇게 덮은 것이 밤꽃이요, 완주 임실 천지 푸른 것이 대밭이다. 버스가 대구 광주 연결하는 팔팔고속도로 지나가자, 거기 내가 사모하는 님이 보인다. 지리산이다. 흰구름은 겹겹이 산을 덮었고 봉은 봉마다 전부 신선이다.
내 저 속에 들어가 누굴 만나려는 것이다. 화개에 내려 택시로 쌍계사 직행하니, 절 밑 바위에 쌍계(雙溪) 두 글자 보인다. 최치원이 새긴 것이다.
일주문 앞에서 반가운 친구들 만났다. 계곡에 널부러진 바위들, 그 밑의 계곡물, 퍼런 이끼 둘러쓴 고목. 그들이 날 알은체 해준다. 절 보살님 만나 속세 옷 벗고 법의 갈아입으니 마음 편안해진다. 법당에 달려가 우리 철학과 대선배님께 인사드렸다. 자기는 고요한 산 속 법당 거룩한 연화대 위에 앉아 계시니 마음 편하신 모양이다. 눈 지긋이 내려감고 미소 가득하다. 나만 화택지옥에 빠져 고생 많다. 이 무슨 불공평한 일이냐? 잠시 후배가 선배한테 불평 좀 했다.
법당 앞에 깨어진 쇠로 얶어놓은 오래된 비석하나 있다. 최치원이 명문을 쓴 진감선사 비석이다. 사람들은 내용을 모르고 그냥 가지만, 그게 그럴 일인가? 천하 대문장이 그 비문 속에 있다. 최근 내가 원고를 출판사로 넘긴 <책 한 권에 소개한 한국 고전 25편> 첫번째 글이 이 진감선사 비문 내용이다.
두 손 합장하고 범종각에 가서 법고, 범종, 목어, 운판 치는 스님들 모습 구경했다. 저녁 예불 참가해서 모처럼 '지심귀명례'서부터 '사홍서원'까지 수십번 앉았다 엎드렸다 절도 해보았다. 늙은 몸이 뻣뻣해서 무릅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갓 욕심을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취나물과 김치 서너 쪽 고추장 한 숟갈로 저녁공양 마쳤다. 두어 발짝만 나가면 맛 있는 섬진강 재첩국과 참게탕과 은어구이 있지만 일부러 이러는 건 사찰 공양이 욕심 버리는 공부기 때문이다.
그날 밤 허경스님과 차 마시며 법담 나누었다. 이쪽은 전 육군소장 누구, 이쪽은 국창 누구의 남편 누구, 이쪽은 수필가라 소개하자 스님도 좋은 인연으로 본 모양이다. <불교의 체계적 이해>란 고익진씨 책 선물하고, 벽에 걸린 관세음보살 족자 제작한 연락처도 알려준다. 서로 안목이 일치한 이 관음보살 불화가 쉽게 만날 수 없는 명품이었다.
그날 밤 계곡 물소리 들으며 자고 이튿날 아침 도량석에 참가했다. 새벽 3시30분 사내(寺內) 대중과 도량의 제신(諸神)에게 기침을 알리고, 절 안팍을 청정케 하기 위해 목탁을 치며 도는 의식이다. 밤하늘 별은 탑 위에 옥구슬처럼 총총하다. 범종소리 산속으로 울려퍼지는 것이 신비롭다. 차가운 물 한 모금 삼키고 별 한번 쳐다본 찰라가 법열(法悅) 속 이다.
절 하러 절에 갔다고 법당에서만 절하랴. 물소리는 8만4천 법문이요, 층암절벽은 그 모두가 아미타불 문수보살 아니던가? 꽃은 피고 산새는 노래한다. 딱다구리는 딱딱 목탁 친다. 안개는 향불처럼 산을 휘감았다. 이 신령스런 곳에 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아침 공양 끝내고 불일폭포로 나섰다, 폭포가 그냥 밋밋한 능선에 걸렸겠는가? 왕복 두시간 거리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급경사다. 거기 고운선생이 청학 백학을 불러서 타고 다녔다는 환학대란 넓직한 바위도 있고, 불일평전이란 평지도 있고, 위험해서 발걸음 휘청거리게 하는 까마득한 절벽도 있고, 절벽 위에 불일암이란 암자도 있다.
과연 신선이 사는 청학동이라고 우겨도 될법하다. 삼신봉 뒷쪽에 걸린 불일폭포는 물줄기가 높은 곳에서 비단을 펼친듯 아름답게 떨어지고 있다.
외로운 구름 고운(孤雲)선생이니 폭포가 가장 잘 보이는 그 험준한 절벽 중간 지금 전망대 자리도 가봤을 것이다. 그런 생각 하면서 아침 역광이나마 감사한 마음으로 사진 한 장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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