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길

첫사랑의 여인

김현거사 2018. 4. 4. 15:43

 

 첫사랑의 여인

 

 사람들이 흔히 첫사랑은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한다. 환상이 실망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첫사랑을 만나고싶다. 그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내가 어느 별에서 왔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얼마나  세월이 사람의 얼굴에 주름살을 더하고, 젊은 시절 빛나던 눈에서 빤짝이던 생기를 뺏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에 구애되고 싶지않다. 나는 그가 차라리 초라한 모습이면 좋겠다. 입은 옷도 신발도 초라하고, 가난의 차거운 파도에 시달린 흔적이 있는 눈가에 애수 가득한 그런 여인이면 좋겠다. 종교를 가졌다며 이웃을 위해서 봉사한 이야길 꺼내는 그런 여인이면 좋겠다. 나는 그의 눈물을 딱아줄 손수건이 되고싶을 것이다. 그가 젊은 시절 애창한 샹숑 한구절 기억하는 여인이면 좋겠다. 나는 궂이 청초한 들국화나 향기로운 백합 그 시절 그가 들국화처럼 얼마나 청초했고, 백합처럼 향기로왔던지 말해줄 것이다. 

 

얼마나 이제 그 노년의 피곤이 깃든 모습 앞에서,  서점에 가서 그의 손에 책 한 권을 쥐어줄 것이다. 그의 얼굴 한 쪽에 아직도 예전에 내가 가슴 태우며 황홀히 바라보던 그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우리는 같이 커피숖에 가서 많은 이야길 나눌 것이다. 그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초라한 여인이어도 상관없다.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라도 상관없다. 나는 한 때 떨리는 심정으로 밤마다 그의 집 앞을 한없이 헤매었고,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절망과 비탄으로 지낸 몇 년을 이야길 할 것이다. 밤마다 그의 집 담장 너머로 던진 편지를 이야기 하고, 망진산 바위에 새긴 시를 이야기 할 것이다. 

 

 죽은 초등학교 친구 이야기도 할 것이다. 서고, 봄나물 돋아나던 신안동 들판 끝 남강에 헤엄치던 버들피리 이야길 할 것이다. 옥봉 백사장에서 열리던 씨름대회와 칠암동 백사장에서 열리던 소싸움 이야길 할 것이다. 사천 선진나루 벚꽃 향기,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 나들이 이야길 할 것이다. 영남예술제와 촉석루와 의암 이야기도 할 것이다. 죽은 초등학교 친구 이야기도 할 것이다. 서로 언제 진주를 떠났던지, 그 후 타향에서 서로 살아온 내력도 이야기 할 것이다.

 . 만약 신이 나에게 은총을 베풀려고 생각하신다면, 가난한 그런 여인을 보내주시기 바란다.

소베지 페넬로페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한 때 내가 떨리는 심정으로 밤마다 그의 집 앞을 한없이 헤매었고,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자 몇 년을 지내었고, 오십 여년이 흘러도 이 연녀이 지났어도 절망과 비탄으로 몇 년을 남해에서 헤매였다는 순진한 이야길 털어놓을 기분이 나겠는가. 차라리 만나지 말아야 한다. 추억은 창고 안에 가둬두어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 나이든 후엔 첫사랑을 만나지 말라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름다운 소년 시절 내가 때 내가  속에 아름을 만나지 말라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언제가 신이 내게 은총을 베풀지 모른다. 그리하여 내가 아득히 50년 전에 사랑한 소녀를 만나게 해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너무 당당한 모습이길 원치 않는다. 몸에 명품을 걸치고, 자신만만한 눈초리로 상대를 쳐다보는 사람, 호사스런 외국 관광지 이야길 하는 그런 여인이길 원치 않는다. 겸손한 척 하다가 어느새 출세한 남편과 자식 자랑 하는 그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 아득한 세월 저쪽에,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간 그가, 이제 눈치 빠르고, 물질의 풍요를 이 세상 가장 중요한 덕목인 줄 아는 사람이길 원치 않는다.

그런 사람 앞에서 순진한 이야길 털어놓을 기분이 나겠는가. 차라리 만나지 말아야 한다. 추억은 창고 안에 가둬두어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 나이든 후엔 첫사랑을 만나지 말라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 속에 새 한마리 키우는 일이다

그의 목소리가

새 울음보다 영롱해진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 속에 꽃 하나 심는 일이다

그의 자태가

꽃보다 향기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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