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한(恨)
가끔 <사막의 한(恨)>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다. '자고나도 사막의 길, 꿈속에도 사막의 길. 사막은 영원의 길, 고달픈 나그네 길. 낙타 등에 꿈을 싣고 사막을 걸어가면, 황혼의 지평선도 고달픈 나그네 길.' 인생길은 낙타 등에 꿈을 싣고 황혼의 지평선 걸어가는 캐라반의 길인지 모른다.
철모르던 시절 동네에 영균이라는 형이 있었다. 그는 진주서 알아주던 주먹이었는데, 여름이면 몸을 돋보이게 하려고 목에 은근히 힘을 준채, 거리 한복판을 건들거리며 다녔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래 학교서고 동네서고 항상 평행봉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제법 팔근육을 뽑냈는데, 고3 때 후회했다.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첫번째 후회다.
두번째 잘못은 대학에서 저질렀다. 이번에는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동양철학 교수님이 학교에 남겼냐고 권했을 때, 눈을 딴 데 팔고 있었다. 나는 당시 기자를 무슨 활빈당 쯤으로 생각했다. 부정을 파헤치고 약자를 돕는 사회의 목탁이라 생각했다. 그래 신기루를 쫒아갈려고, 교수님이 추천한 탄탄대로 외면하고 딴 길로 샌 것이다.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였다. 일간지에 응시하여 낙방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주간지에 입사했다. 근무한 불교신문이 주간지라고 일간지로 옮겼으나 그 밥에 그 국이었다. 결국 경제신문 기자로 10년 허송세월 하다가 하차했는데, 펜을 꺽은 이유가 걸작이다. 월남전이 났는데 스페인 내란에 참전한 헤밍웨이처럼 종군기자가 되지못한게 그 이유고, 언젠가 중국이 개방되면 대륙에 들어간 첫번째 기자가 되겠다고 대학시절에 미리 중국어를 배웠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렇게 용 못된 이무기 하늘 탓만 하다가 기자생활 끝냈지만, 불교신문에서 나온 것도 잘못이다. 후에 불교방송이 생겼고 주간지 후배는 보란듯이 방송국 편성국장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사막길은 이렇게 길 한번 잘못 들면 후회막급이다. 운동한다고, 기자된다고, 일간지 간다고, 나는 40 이전에 세 번 실수한 것이다. 그 뒤 나는 강바람에 허리 꺽인 갈대가 되고말았다. 동양철학 전공한 사람 찾는 데가 어디인가.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에 갈 데가 없었다.
나는 이때 꿈을 버렸다. 처자식 먹이고 입히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래 한 재벌 총수를 찾아갔다. 그는 자서전 쓸 작가를 구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인내를 배웠다. 그와 겸상하면 긴장하여 막내딸이 설사를 했다고 한다. 10분 면담한 중역들은 모두 구슬땀을 흘렸다. 이런 독한 사람과 하루 12시간을 얼굴 맞대고 산다는 것은 초인적 인내가 필요하다. 외출 때마다 벤츠 앞자리에 앉는 일도 생각보다 고역이다. 그는 상상을 초월한 절약가 였다. 몇 조(兆)라는 돈을 가진 재력가지만, 광고지를 짤라 메모지로 썼고, 런닝과 반쓰를 누덕누덕 기워 입었다.
앉은 자리 풀도 나지않는 이런 사람 아래서 전임 비서실장들은 줄줄이 병들어 나갔다. 위장병으로, 이름 모를 병으로 나갔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나는 거기서 20년을 돌부처처럼 죽치고 앉아있어야 했다. 나는 고행을 참아야 했고, 도인이 되어야 했다. '자고나도 사막의 길, 꿈속에도 사막의 길.'을 뇌이며, 시름 속에 안면몰수하고 찾아오던 비열한 사람들, 배신을 떡 먹듯 하던 군상들을 만나야 했다.
그러다 환갑 이전에 퇴직했으니, 건강상 이유였다. 감은 열매 맺는 시간은 오래 걸리고, 홍시되어 떨어지는 시간은 금방이다. 20년 고생 끝에 중역 쬐끔하고 마감하는게 우리 사회구조다.
그 후에 나는 비로서 오아시스를 발견하였다. 강원도 어떤 대학 겸임교수가 되어, 일주일에 한번씩 5년간 설악산 구경다닌 덕택이다. 심신이 피곤한 나는 계곡 옆에서 피래미가 헤엄치는 것을 오래오래 지켜보곤 했다. 그것은 일종의 싸이코테라피(psychotherapy) 였다. 자연에서 맘의 평화를 얻는 정신요법이다. 도시에서 시달리던 맘이 산에 들면 편해졌다. 그래 나는 땅을 찾아 한계령, 법수치 계곡을 샅샅히 흩고 다녔다. 여주, 양평도 돌아다녔다. 섬진강, 경호강도 돌아다녔다. 욕망은 적을수록 맘이 편하다는 걸 깨달았고, 작은 농가주택 하나 감나무 하나가 꿈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인생이 항상 우리를 편하게 그냥 놔둔 적이 있던가. 최소한의 소박한 그 꿈도 허사였다. 두 집 살림이라는 이유로 서울 태생 안주인이 쌍지팡이 들고 나선 것이다.
그 후에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집 주변의 텃밭이다. 이제 나는 텃밭에 토마토 심고, 고추 상추 심고, 새벽에 글 쓰다가, 눈이 침침하면 약수터 가서 목 축이고 온다. 신구의(身口意) 욕망 버리고 스님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나는 다시 쓴웃음을 짓지않을 수 없었다. 근처 토백이가 가꾸는 밭 때문이다. 그 밭은 어인 일인지 잡초도 없고, 무슨 비료 주는지, 옥수수는 그리 크고 싱싱하다. 도대채 이건 무슨 경우인가. 인생은 끝까지 피곤한 나그네가 걸어가는 황혼의 지평선에도 이런 갈등을 준비해놓고 있질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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