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봉을 오르며

설악산 대청봉 등반기

김현거사 2017. 10. 13. 21:11

  설악산 대청봉 등반기

 

 '지리산은 맏며느리 같고, 설악산은 양장미인 같다. 살결은 지리산은 육산(肉山)이라 부드럽고, 설악산은 골산(骨山)이라 각선미가 있다. 가을 단풍 옷 벗는 자태는 지리산은 구중심처 큰애기 한복 벗는 태고, 설악산은 모던걸 이브닝까운 벗는 태다.' 나는 지리산과 설악산을 이렇게 분류한다. 

 한계령(寒溪嶺)은 차거울 한(寒) 시내 계(溪), 이름만으로도 운치있다. 신라 때 ‘한계고성’(寒溪古城) 터 설악루 매표소에서 입산하니 처음부터 산색(山色) 비범하다. 푸른 잎 가장자리부터 싱그럽게 물들어가는 것은 상수리나무고, 비단에 그린 듯 화려하게 붉은 건 단풍나무요, 흰 줄기에 반짝이는 금빛 잎 단 것은 숲의 귀족 자작나무다. 산공기 수정처럼 맑다. 만산홍엽리(滿山紅葉裏) 초록은 바위의 청태(靑苔)요, 티 한점 섞지않은 남청(藍靑)은 초추(初秋)의 하늘이다. 풍마우세(風磨雨洗). 비바람에 씻기고 닦인 것 저만 아니련만, 그 무슨 조화로 한계 낙엽은 저리 고울고? 고도 높을수록 단풍 더 붉다. 나무 하나하나 비단 옷 입은 맵시가 '지방시' 가을 패션 모델 같다.

 

 

 푸른 암봉이 실안개에 가렸다 나왔다 숨박꼭질하는 산길에, ‘내 밑으로 기어서 지나가시오’, 심술맞게 길을 터억 막고 나자빠진 것은 거대한 굴참나무 고사목이다. 산공기로 폐부(肺腑)를 씻고 ‘서북주릉선(西北主稜線)’에 닿으니, 발 딛은 곳이 백두산, 낭림산, 금강산, 진부령, 대청봉, 한계령으로 흘러와서, 점봉산,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 큰 줄기다.

 산을 벗어나야 산이 보인다 했던가. 서북주능선에서 귀때기청, 끝청, 중청, 대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설악 산괴(山塊)는 거대한 한 점 수석(壽石)이다. 멀리 푸른 안개 속 대청봉을 향해서 용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뻗은 용아장성(龍牙長成) 보인다. 뜀바위, 촛대바위, 개구멍바위 등 깍아지른 험로(險路)로 암벽 타는 분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용아릉은 그 아래 수렴동 수많은 소(沼)와 담(潭) 거느리고 있다.

 

 물과 바위만 빼어나랴. 안개 낀 산상 바위틈에 꽃이 핀다.

 

 

 

 마고(麻姑)선녀께서 언제 여기 꽃씨 심으셨나. 노란 각시원추리, 보랏빛 난장이붓꽃 황홀하고, 바람꽃, 금마타리, 금강초롱, 등대시호 청초하다. 하이비스커스꽃과 풀룸메니아꽃 덮힌 하와이를 꽃의 천국이라 부르는가. 보라빛 용담, 하얀 구절초 피는 여기를 나는 ‘천상화원’(天上花園)이라 명하련다.

 ‘용아장성’에 봉정암(鳳停庵) 있다. 신라 자장율사가 당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모신 봉정암은 오대산 상원사, 영취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백덕산 법흥사와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하나다. 돌계단 위에 5층사리탑 있으니, 부처님 진신사리 어디 있는가. 뒤로 독성나한봉, 지장봉, 석가봉, 기린봉, 할미봉이 병풍처럼 호위한  그 속에 있다.

 

 ‘서북주능선’에서 보이는 끝청은 신기루다. 가도가도 끝 없는 산길을 코 끝에 쇠똥내 풍기며 터지려는 심장박동 참고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니, 땀은 비오듯 떨어져 눈에 들어가 따갑지, 후덜후덜 떨리는 다리는 중심을 못잡아 너덜지대 젖은 돌에 미끈미끈 스키를 타지, 돌진 가재마냥 등짐은 왜 그리 어깨를 누르는가?

‘선배님 배낭 내가 메고 갈까요?’

눈 감으면 송장으로 알고 염해도 될 얼굴인가 보다. 장교수가 배낭 달란다.

 거대한 주목(朱木)을 만났다. 누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 했던가?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간다는 거대한 주목을  연인인양 팔로 안아보았다. 설화(雪花) 덮힌 겨울산에서 꼭 봐야할 정취는 주목의 푸른 침엽과 심홍(深紅)의 열매다.

 갑자기 산길에 왜가리떼 날라온듯 자배기 깨지는 소리 난다. 시끄럽기 일등인 내고향 경상도 여자들이다.

‘아저씨 끝청까지 얼매 걸립니꺼?’

‘반시간 정돈데, 어디서들 오셨소?’

‘울산요.’

‘울산? 온 김에 울산바위나 좀 가져가시지.’

‘좋지예. 빽에 넣어만 주이소.’

사십대 아주머니 부대 씩씩하다. 

‘속초가 왜 속초요? 알고나 가시요.'

그러고 잠시 사설을 달았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만들자 울산바위가 날라오다가 여기 섰다는 이야긴 다 알지요? 그 뒤 울산사람이 ’울산바위를 울산에 도로 갖다놓던가, 아니면 울산바위를 재로 새끼줄을 꼬아 묶어달라. 그러면 도술을 써서 가져가겠다’고 했어요. 그래 속초 사람들이 고민 끝에 한 도인의 가르침을 받아, 기름 묻힌 새끼줄을 울산바위에 묶어 불을 질렀지요. 새끼줄이 불에 타서 재로 변하자, 재로 꼰 새끼줄로 바위를 묶은 셈 아니요? 그래 묶을 속(束)자. 풀 초(草)자 해서 속초가 된거요.’

‘오매 우야꼬! 빽도 필요 없구마. 새끼줄로 묶어가모 되능거.'

 

 고진감래(苦盡甘來)라던가. 일단 끝청 오르자 중청대피소 가는 길은 완만한 능선이라 돛 달고 노젖기다. 대피소 평상 위에 지글지글 삼겹살 굽는 소리 귀를 번쩍 뜨게한다. 국 끓자 해 지고, 속초시 먼 등불 어둠 속에 아련한데, ‘건배’ 독한 꼬냑 한모금 목줄기 넘기자 피로가 싸악 가신다.

 아침 8시 대청봉(大靑峰)에 올랐다. 대청봉은 해발 1708미터로 금강산 비로봉 1638미터 보다 높다. 날씨는 문자 그대로 오리무중(五里霧中), 운무 너머로 북쪽 공룡릉, 세존봉, 울산바위가 보인다. 남쪽 점봉산은 연하(煙霞) 좌대 위에 수석처럼 앉아있고, 동쪽 권금성은 금빛 일출 몇가닥 품고있다.

 ‘양양군 서면 오색리 산1-1’.라고 새긴 돌 앞에서 증명사진 찍고, 설악 봉우리들 왜 대청, 중청, 소청, 끝청, 뀌때기청, 봉마다 ‘청(靑)’자 돌림인가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청(靑)’이 흰빛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기 때문이다. 설악산은 내비불루 청바지에 흰 모자를 쓴 미 해군 같다. 푸른 에메랄드색 산이 백설(白雪)모자 쓰고있다.


 대청봉에서 속초로 하산하는 길은 둘이다. 화채봉, 만경대, 권금성, 소공원 코스와 소청봉 희운각 양폭 비선대 코스다. 초봄의 화채봉 코스는 알프스처럼 시적(詩的) 상상력 자극시킨다. 아무도 밟지않은 능선의 하얀 눈 위에 우아한 보랏빛 얼러지꽃의 군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천불동 코스를 택했다. 기암괴석과 폭포와 단풍을 보고싶었기 때문이다. 소청 거쳐 희운각산장 가는 가파른 계단 내려오니 공릉능선(恐龍稜線) 보인다. 능선이 얼마나 가파르면 공릉능선인가.

 '마등령에서 무너미고개까지 공룡이 용솟음치듯 힘차게 울퉁불퉁 솟은 5K 암봉군(群)이 공룡능선인데, 여기가 내외설악을 가르는 설악의 척추입니다. 척추 동쪽 외설악은 기암절벽 천불동이 남성적이고, 서쪽 내설악은 백담, 가야, 백운계곡이 여성적 입니다.

 장교수 설명이다.

 

 희운각산장 도착하여, 평상에서 시원한 샘물 한잔으로 땀을 식히니, 대청봉 오른 것도 은근히 자랑인데, 남은 건 천불동(千佛洞) 단풍 구경이라 이제부턴 없던 흥도 절로 난다.

 천불동 내려가니, 가파른 협곡 오른쪽은 화채능선이요, 왼쪽은 톱날 공룡능선이다. 바위는 수직절리(垂直節理) 천태만상 빚었으니, 뽀족한 암봉마다 아미타불인가하면 문수보살이고, 관음보살인가하면 미륵보살이다.십리 불계(佛界) 천의 불상(佛像) 보여주고, 골골이 은하(銀河) 같은 폭포와 담(潭)이다.

 

 

 선경(仙境)은 내려가면서 보아야한다. 선인(仙人) 하강(下降)의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 누가 나무까지 이리 멋진 수형 잡아주었던고. 바위 위 낙락장송은 안개 휘감아 멋을 부리고, 물은 폭포에서 쏟아져 암반의 소(沼)에서 휘돌고 구비치고 내달리며 골짜기를 소리로 덮는데, 하늘을 찌르고 구름을 뚫은 건 암봉이요, 하늘과 땅 취토록 붉게 만든 건 만산홍엽이다.

 바위틈 쇠난간 움켜잡고 양폭산장 내려가니, 절벽 중간중간 푸른 이끼와 단풍 조화 그림같은 만경대 능선이 하늘에서 수직으로 계곡에 내리꽃혔고, 천당폭포 지나 양폭산장 가니 양폭, 음폭 쌍폭포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염주골에 염주폭포 하나 더 있어, 하얀 물보라 부서져라 바위를 때린다. 천불동은 기암절벽과 폭포와 소(沼)와 담(潭) 원도한도 없이 보여준다. 폭포 없는 산들 여기 와서 꼬리도 못펴겠다. 여기가 내가 보기엔 설악의 백미(白眉)다.

 

 양폭산장 물 맑고 깨끗한 바위 위에서 늦점심 먹고, 하얀 구절초 향기 맡으며 탁족(濯足)하니, 추수여면경(秋水如面鏡)이라 얼굴이 다 비친다. 소소히 날리는 단풍을 어깨에 맞으며 골 안 굽이쳐 흐르는 물길 따라 걷노라니, 천불동(千佛洞) 물소리 바로 무량(無量)설법이요 장광설(長廣舌)이다.

 더 내려와 다섯 개 폭포 연이어 흘러내리니 오련(五連)폭포다. 병풍교 지나 절벽이 만길 벽처럼 우뚝 선 것은 귀면암(鬼面岩)이다. 그 아래 토막골, 잦은바위골, 물줄기가 연이어 맑은 담(潭)과 소(沼) 만들어놓았는데, 거기서 결정타로 사람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것은 문수담(文殊潭) 이호담(二壺潭) 유리처럼 파란 물빛이다.

 그후 비선대(飛仙臺)가 나온다. 선녀가 너럭바위에서 바둑과 거문고 즐기며 누워서 경치 감상한 곳이 와선대(臥仙臺)요, 하늘로 올라간 곳이 비선대다. 수석(水石)이 이리 맑으니 글인들 어이 없으랴. 시인은 ‘반석 위로 흘러가는 물은 아름다운 옥구슬 구르는 것 같고, 너럭바위에 폭포수 떨어지는 모습은 선녀의 옷자락이 나부끼는 것 같다.’고 읊은 적 있다. 바람 속에 ‘줄 없는 거문고’(無弦琴), ‘구멍없는 피리’(無空笛) 소리 들리는듯한데, 박새 노랑할미새는 여기서 득음(得音)하였나. 맑은 울음소리 속세를 떠나있다.

 비선대 위에 나란히 선 것이 선녀봉 장군봉이다. 장군봉 층층계단 위가 원효스님 도 닦던 금강굴이니, ‘금강삼매경’은 그 어떤 경계더냐. 지관(止觀)의 맑은 심정, 물속에 비쳐있다.

 

 

 여기가 신선이고 극락이 아니겠는가. 비선대에서 산을 보고 합장하는 고운 할머니 한 분을 보았다. 나도 내려온 산을 되돌아보았다. 청수한 준봉이 안개 휘감고 있다. 월야선봉(月夜仙峰). 달밤엔 저 봉이 선녀로 보일테지. 하얀 안개가 향 피우듯 산 위로 올라가고 있다.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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