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에 서면
김창현
전에는 강에서 멱감고 물고기하고 놀 줄만 알았다. 버들숲을 보고, 흰구름을 보고, 종달새 소리만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강변에 서면, 강물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얀 물안개 핀 강, 별이 찬란한 강변에 서면, 강이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한다. 돌담 위 감나무 우거진 동네, 대밭과 은모래 곱던 동네, 햇볕 빤작이던 물에서 같이 논 옛친구 이야기를 해준다. 강둑에 불던 산들바람과 꽃과 아름답던 노을을 환영처럼 보여준다.
세월이 갈수록 강이 다정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생각하면 강도 나처럼 구비구비 길 없는 길 헤쳐오며, 산의 바위를 사랑했고, 숲의 꽃을 사랑했고, 새소리를 사랑했다. 빈 나룻배를 사랑했고, 언덕 위 정자를 사랑했고, 절벽에 비스듬히 선 노송을 사랑했다. 강도 나처럼 도시 보다는 한가한 시골을 좋아했고, 이끼 낀 성벽을 좋아했다. 다리 위의 외로운 가로등을 좋아했고, 기적 울리며 떠나가는 기차를 좋아했다. 강도 나처럼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신세였고. 한번 이별한 사람은 다시 만나볼 수 없는 신세였다. 때로 탄식하고, 때로 울부짖고, 때로 환희의 노래 부르면서, 그 모든 감정을 물결 속에 잠재웠다.
이제 강변에 서면, 나 역시 어딘가로 흘러가는 서러운 강임을 깨닫는다. 강에 수많은 별이 비치다 사라지듯, 얼마나 많은 그리운 별들이 내마음에도 비치다 사라졌던가. 강이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하듯, 얼마나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나 역시 탄식했던가. 강과 나는 애초에 고향 등지고 세상 길 나선 나그네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밤하늘 유성같은 존재였다. 강과 나는, 마음은 계절 따라 얼었다 녹았다 하는 변덕쟁이란 걸 알았고, 세월은 쏜살같이 달아나는 심술쟁이란 걸 알았다. 그래 나는 지친 마음으로 강을 찾아간다. 마주보며 시간을 보낸다. 강은 때론 쓸쓸한 미소를 보인다. 혼자 떠나가는 나그네의 미소다. 강은 이정표 없는 길 정처없이 떠난다. 남풍에 실려온 봄처럼 갈 곳 모르면서 떠난다. 나는 황혼에 떠오르는 강의 그 쓸쓸한 미소를 좋아한다. 나 역시 흐느끼며 흘러가는 서러운 강이었다. 나 역시 외로운 나그네 였다.
강은 언제 봐도 다정하고 푸른 눈을 가졌다. 여신처럼 깊고 신비스런 눈을 가졌다. 밑바닥 훤히 보이는 수정같이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곤 한다. 싸파이어처럼 푸른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도 한다. 이 세상 누구도 그런 아름다운 눈을 가진 이는 없다. 나는 그 푸른 눈동자를 향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 뭉게구름 같던 젊은 날 꿈을 이야기 한다. 피로와 허기로 고생한 세상 이야기, 명예와 부귀가 물거품같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강은 묵묵히 들어준다. 마음을 열고 주의 깊게 이야기를 경청해준다. 좀 더 옆으로 가까이 닥아오라고 손짓할 때도 있다. 부드러운 물무늬로 미소처럼 응답해준다. 나는 그 물무늬를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때마다 고통이 고요히 사라짐을 느낀다. 강은 참회를 듣는 신부님이고, 명상을 가르키는 스님이다.
강은 몸을 낮추고 아래로만 흘러간다. 더러움 깨끗함을 모두 포용한다. 물속에 수초와 고동과 온갖 물고기를 키운다. 자기의 덕을 말하지 않는다. 강은 침묵할 뿐이다. 강은 마치 아가를 키우는 어머니 같다. 나는 작은 아가처럼 된 것이다. 나는 강의 침묵과 신비로운 말을 차츰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선 말 없는 말이다.
파란만장한 칠십 평생 지나, 나 이제 구비구비 먼 길 떠나온 나그네라 그런가. 가을밤 홀로 지새우는 귀뚜라미 같아 그런가. 고향 지키는 늙은 정자나무 같아 그런가. 이제 텅 빈 가슴속에 강물이 속삭이는 속삭임은 너무나 또렷히 들린다. 어머니처럼 따뜻한 강의 체온이 전신으로 느껴진다. 전에는 그렇치 않던 강이다. 그러나 나 이제 강변에 서면, 강은 신비로운 여인이 된다. 나는 드디어 강을 만난 것이다. 비로소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강을 만난 것이다.
'기고 예정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땅 굴 파는 노인 (0) | 2011.06.16 |
---|---|
내가 사랑했던 나무 (0) | 2011.06.16 |
梅花에 얽힌 사랑 이야기 (0) | 2011.06.16 |
고향의 강 (0) | 2011.06.16 |
고향의 작은 웅덩이 (0) | 2011.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