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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花에 얽힌 사랑 이야기

김현거사 2011. 6. 16. 18:06

            

 

   매화(梅花)에 얽힌 사랑 이야기

                                                                                                                 김창현

 

 달빛 아래 보는 매화가 가장 아름답다. 월광 속에선 희미한 줄기가 수묵화처럼 보이고, 허공에 점 찍은 잎들은 화선지에 그린 그림 같다. 실바람이라도 불면 어떠한가. 얼음같은 살결과 구슬같이 맑은 얼굴은 달 아래 거니는 월궁 항아의 얼굴 같고, 후각을 자극하는 숨막히도록 청량한 향기는 말못할 사연을 지닌 여인의 체취 같다.

 매화꽃을 자세히 보면꽃잎들은 피어난 방향이 다 다르다. 정면, 후면, 측면, 아래를 향한 모습, 반개(半開)한 모습, 만개(滿開)한 모습이 뒤섞여 있어서, 각자 다른 생동감을 발견해야 제대로 매화를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매화는 그날 날씨와 시간에 따라 감흥과 운치가 다르다. 같은 매화라도, 달빛 속의 매화, 아침 이슬 맺힌 매화, 청명한 날 매화, 안개 낀 날 매화, 눈 오는 날 매화가 다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매화는 무어라해도 달빛 속의 매화가 아닐까 싶다. 

 찻잔 속의 매화도 아름답다. 깔끔한 청자 잔도 좋고, 투박한 이조 다완도 좋다. 청자 잔은 매화를 고결하게 하고, 백자 잔은 매화를 애련하게 한다. 먼저 눈으로 찻물에 적셔진 매화꽃을 구경한 후  다음에 그 향기를 음미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때 청초한 향이 더욱 깊게 마음을 적셔줄 것이다. 

 매화차 만드는 물은 산 속 샘물이 제일이다. 바위 틈에서 솟아난 석간수와 짙은 대숲 아래 샘물이 가장 좋은데, 가능하면 옥같은 흰 손으로 차를 따르는 여인이 곁에 있으면 더 운치있다. 아니면 가난한 선비나 화가도 좋다. 가난한 선비는 청빈을 말할 것이고, 화가는 미묘한 꽃빛의 변화를 말할 것이다. 매화차 마시는 장소는  앞에 작은 연못이 있으면 좋고, 연못에 초당이 있으면 좋고, 대나무가 몇그루 있으면 더 좋다. 문득 고요한 산사의 풍경소리 들려오는 운치있는 곳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매화나무는 대개 오랜 풍상을 겪은 고매(古梅)일수록 귀하고, 노인처럼 바위 옆에 비스듬이 선 매화일수록 귀하다. 매화는 어린 것 보다 늙은 것이 귀하다. 살찐 것 보다 여윈 것이 귀하다. 늙은 줄기는 기괴하게 굽어져야 하고, 어린 가지는 섬세하면서도 힘이 있어야 한다. 매화를 보는 법은, 늙은 것 어린 것, 드리운 것 치뻗은 것, 성긴 것과 빽빽한 것, 강(剛)과 유(柔)의 조화를 잘 살펴보는 일이다. 산매(山梅), 강매(江梅), 원매(園梅), 반매(盤梅)가 있지만, 그 중에서 귀한 것은 세월의 흔적으로 표피에 푸른 이끼가 무수한 태점(苔點)을 찍은 매화이다. 오래된 성곽이나 고찰에 서있는 이런 매화는 선풍도골을 연상케한다.

  매화의 멋을 알고나면 누가 가장 매화를 사랑했던 사람일까 자연스럽게 생각해보게 된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매화시를 썼고,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매화에 얽힌 고사를 남겼다.

 신흠은 '매화는 한평생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잃지않는다'고 읊었고, 조희룡은 매화 벼루에 먹을 갈아서 매화 병풍을 그리고, 매화 병풍 아래 누워 잠을 잤으며, 매화에 미친 자신을 '매화두타'라고 불렀다. 중국의 맹호연(孟浩然)은 기암절벽과 나목에 눈이 가득 쌓인 봄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나섰다. 답설심매(沓雪尋梅)의 고사가 그것이다. 북송(北宋)의 시인 임화정(林和靖)은 서호의 북쪽 고산의 매림(梅林) 속에 집을 짓고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고 살았다.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매화에 얽힌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따로 있다. 퇴계선생이다. 선생은 48세에 부인과 아들을 잃고 홀로 단양군수로 부임했다고 한다. 거기서 관기 두향(杜香)을 만났다. 당시 18세이던 두향은 매화처럼 깨끗한 살결에 옥같은 자태를 지닌 빙기옥골(氷肌玉骨)이었을 것이다. 시문과 가야금에 능했다고 한다. 

 두향은 선생이 부임하자, 선생의 인품을 사모하여, 매화 분재를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그 후 두분은 자연스레 가까워졌을 것이다. 두분은 매화분재를 앞에 놓고, 표피에 푸른 태점을 찍은 이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노인처럼 바위 옆에 비스듬이 선 매화의 고태(古態)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을 것이다. 월궁 항아의 얼굴처럼 얼음같이 차겁고 맑은 매화의 얼굴에 감탄하고, 말 못할 사연을 지닌 여인의 체취같이 숨막히도록 청량한 매화의 향기에 탄복했을 것이다. 같이 고찰을 방문하여 매화꽃을 구경하기도 했을 것이고, 서로 매화시를 교환했을 것이다. 두향은 산속의 맑은 샘물을 길어와 옥같은 흰 손으로 백자잔에 매화차를 따르기도 했을 것이다. 선생은 매화꽃을 앞에 두고 거문고를 탔을 것이고, 두향이는 매화 가지 아래서 옥피리를 불었을 것이다. 상처한 49세의 천하문장과 음률에 정통한 18세 빙기옥골이 매화를 사이에 두고 고결한 회포를 맘껒 풀었을 것이다. 

 그러다 만난지 9개월만에 풍기군수로 떠나가니 두향의 맘은 어떠했을까. 한 수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별이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제,

어느듯 술 다하고 님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매화꽃처럼 청초한 소녀 눈에는 이슬이 맺혔을 것이다. 시를 읊고, 수석과 매화 분재 한 점을 선물했다고 한다. 떠나는 님이 서러워서 잔을 비우며 슬피 흐느꼈을 것이다.   

 선생 역시 두향이 사랑하는 마음은 똑 같았다. 이별 하던 날 선물 받은 매화 분재를 공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69세에 고향 안동에 돌아와서 임종할 때까지 21년간 곁에 두고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 향리로 귀향하자, 도산서원 앞마당에 연못을 만들어 연을 심고, 동편에 매화를 심고, 그를 절군(節君)이라 칭송하며, 매형(梅兄)이란 호칭으로 인격으로 예우했다 한다. 벼루도 매화가 그려진 벼루를 썼고, 걸상도 매화가 새겨진 걸상을 썼다고 한다.  

 노후에 병이 깊어지자, 매화에게 자기의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민망하다며, 화분을 다른 방에 옮기라고 했고, 임종시에 '매화에 물을 주라'란 말을 잊지 않았으니, 이는 매화를 바로 두향이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또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서책에 91수의 매화시를 남겼다. 

 

'뜰 가운데 거니니 달은 날 따라오고, 매화 둘레 몇 번이나 서성여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더니, 향기는 옷깃 가득, 그림자는 몸에 가득' 

 

  한밤 중에 뜰에 내려서서 달빛 아래 매화 나무 둘레를 맴돌며 옷이고 몸이고 달빛과 매화 향기에 흠뻑 젖는 선생의 모습이 보이는듯 하다.

 

'누렇게 바랜 옛책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일국의 판서라는 바쁜 공무 속에서 산 퇴계선생이다. 그런 속에서 두향이에게 소식 전하지 못함을, 끊어진 거문고 줄에 빗대어 위로한 것이다. 생은 아침에도 매화를 보고, 밤에도 보고, 눈 오는 날도 매화를 보면서, 두향이 대하듯 하였을 것이다. 

 두향은 선생이 단양을 떠난 후,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퇴계선생의 부음을 접하자, 4일간 걸어서 안동의 상가를 방문하고 돌아와, 곡기를 끊고 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지금도 단양의 남한강 푸른 물가에 두향의 묘가 남아있다. 매화처럼 고결한 두향의 처신이었다. 두향은 매화의 혼이었던지 모른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매화를 사랑한 사람은 많지만, 두향이처럼 한 선비를 일편단심 사랑한 사람도 드물고, 매화시첩에  91수의 매화시를 남긴 선비도 없을 것이다. 참으로 두사람이야말로 만고청향(萬古淸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도 남한강에 가면, 강물에 어리는 두향의 향맑은 얼굴을 보는듯 하다. 퇴계선생의 매화시첩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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