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의 어린 시절
강아지 하품한다 송아지 되새긴다
암탉이 꼬꼬꼬 병아리 떼 몰고 간다
가슴 속 깊숙이 찍힌 흙내품은 고향 사진. <고향 사진>
장손인 내가 (나의) 출생 하기 전(의) 4~5년간은 우리 집안의 대 변동기였다. 아버님 형제분 (할아버지의 자녀) 2남2녀가 혼인으로 분가하셨으며, (으로 흩어져간 세월이며), 조부님이 별세하셨다.(, 손자인 나의 출생 등으로 한 세대가 교체된 시기였다.)
우리 집은 (홀로 남은)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손자인 나(까지) 4인가족으로 줄었고(다. 그리하여) 내가 세 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네 식구가 남부여대하고 월아산 두 봉우리 사이의 질매재를 걸어 한 4~50리 동북쪽으로 이사를 갔다.(는데, 그) 새 주소지는(가) 같은 군내의 지수면(智水面) 용봉리(龍奉里) 「우기미(于今洞)」였다. (나는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네 식구가 남부여대하고 월아산 두 봉우리 사이의 질매재를 걸어 몇 십리를 이동했던 것이다. )
우금동으로 이사 간 것은 우금동 옆 동네 안계동에 아버님과 우애가 돈독했던
(*왜 그 우금동이었을까? 그 옆 동네 안계동에)
시집간 큰고모(정영란)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약방을 하던 부농 재령이씨 집안으로 출가한 큰 고모의 조언과 의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고모는 한약방을 하던 부농인 재령이씨 집안으로 출가하여 우애가 돈독한 분이셨다.)
(*그 ‘우기미’에 우리 가족이 산 기간은 약 10여년이다.)
가난한 훈장(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서당공부를 마치고 결혼했지만 자립할 처지가 못된 데다가 의지할 곳 없어 외로워(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살고 있던 여동생과 제부의 이웃동네로 이사 가게 된듯하다.
가난한 훈장 아들 처자 아니 굶기려고
바다 건너 공장노동 고귀한 땀방울이
그 소망 이뤘습니다 식량 자급 자작농. <아버지>
나는 이 우금동에서 세 살부터 초등학교 3학년인 열 살 까지(의 한) 7년을 살았는데, 이 당시
(*의 유년을 보내게 된다. 나의 어린아이 4년간과 초등 저학년 3년간이 그것이다. 이 지수초등 이야기는 따로 하기로 하겠다.)
가장인 아버지는 할머니와 처자식을 우금동에 남겨 두고 일본으로 공장노동을 떠났다. 내 기억으로는 그 일본에서 수년간 돈을 부쳐와 가족 생계를 유지하고 문전옥답 논 두 마지기도 사들여 겨우 호구 하며 (한 10여년) 그 동네에서 살았었다. 그 우금동 시절에 (나의) 여동생이 태어나(출생하려) 다섯 식구로 늘어났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즉, 나의 지수초등학교 1·2·3학년은 이 우금동시대의 산물이었다. )
이 시기의 나는 (집안 형편은커녕 천지분간이 안되는 천진난만 그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세대교체라도 하듯 태어난 하나밖에 없는 집안의 장손(아들)이라 부모님은 물론 할머니까지(는 더더욱) 오냐오냐 해서 천지분간이 안되는 (하니까) 응석쟁이 였던 것 같다.
(부리고 깽판 놓고 어리냥 부리고를 거듭한 듯하다. 이 난장판이 극에 달한)
지금도 하나 기억 나는 것은 (하나 있다.) 초등 2·(*3)학년 때 등교하려고(의 아침 등교를 위해) 대문을 나서다가 (는 순간의 돌발사건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시락을 마당에 딱지 치듯 내리쳐 던져버린 일(것)이다. 철들어 그 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아마 늘 넣어주는 김치반찬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철들어 이에 상도하면 헛웃음이 절로 솟아오른다.)
내 고향 그 언덕에 저녁노을 짙어지면
할머니와 멍석 깔고 별 하나 콩콩 별 둘 콩콩
아련히 되살아나는 백발 동심 천진난만. <할머니>
그 당시(래도) 할머니의 손자사랑은 (더) 유별났다.(었다.) 언제나 쓰다듬어주고 맛있는 것 살짝 주고 장독 위에 정화수(물) 떠놓고 “우리 손자, 우리 태수”하시면서 손 모아 축수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히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 경기도 포천 조부모 합폄묘 둘레에는 할미꽃이 온통 수놓고 있다. 내가 60이 넘은 뒤에 (*경기도) 포천에 가족묘지를 조성하면서 유난했던 할머니의 손자사랑을 잊을 수 없어 대진대학교 총장 공관 뒷산에 자생하던 할미꽃 (합폄묘 앞에 할미꽃) 몇 송이를 옮겨 심고 물 주고 가꾼 것이 그리 번진 것이다.
(*을 주곤 한 일이 있었다. 대진대학교 총장 공관 뒷산에 자생하던 할미꽃이었다. 유난했던 할머니의 이 손자사랑이 한평생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꽃들이 지금은 묘 둘레에 퍼져 온통 수놓고 있다.)
“조선에 둘도 없는 내 새끼-새끼야.”
토닥이던 추임새에 우쭐우쭐 했었지
할미꽃 흐드러졌다 산소라도 가 뵐까. <할미꽃>
내가 열 살이 되던 때(자 진주유학을 위해 숙부댁으로 떠나게 되자) 우리 집은 여자 3대(가) 셋만이 사는 외로운 집이었다. 아들은 공부를 위해 진주로 유학을 떠났고,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일본에 계셨기 때문이다.(경지에 이른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아들인 나는 진주로),
남자 둘이 떠나(니) 할머니 어머니 여동생 (셋 만이 남아 즉) 여성 세 식구로 적막하게 살다가
(3대만이 살게 되자, 쓸쓸함을 넘어 얼마나 적막했겠나 싶다.)
그 몇 년 뒤에 아버지가 일본 노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간난의) 우금동시대를 청산하고 월아산 질마재를 다시 넘어 옛 터전 금산면의 머리미(末岩洞)로 이사를 왔다.(오게 된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모은(받은) 저축금으로 논밭 5~6 마지기를 장만하여 진주시에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다. (그 이사길은 넘어간 월아산 질매재를 다시 되돌아넘는 길이었다.) 이 머리미란 동네는 우금동은 물론, 달암동 보다 진주시내 쪽으로 더 가까운 동네(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진주 숙부댁에 머물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던 이 외동아들이 걸어서 통학할 수 있도록(는) 진주 근처로 애써 이사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뒤에 나는 실지로 머리미(거기)에서 사범학교 장거리통학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부모님의 사랑을 하해(河海)와 같다고 한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보면 부모님의 열 가지 큰 은혜를 설하고 있다.
그 첫째가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이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여 태 속에 넣으시고 10개월 동안 입덧이 나서 음식도 제대로 드시지 못하며 나를 지키고 호위해준 은혜요.
둘째가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해산하는데, 죽음을 무릅쓴 고통과 모험을 견디신 은혜요,
세번째는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이다. 어머니는 건강한 아기가 무사한 것을 보면, 해산의 고통도 잊고 오직 아기 사랑으로 만족하시고 미소를 지으신다.
네번째는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이다. 어머니는 맛이 있고 몸에 좋은 것은 아기에게 먹이고, 쓰고 거칠고 험한 음식은 어머니가 잡수신다.
다섯번째는 회건취습은(回乾就濕恩)이니, 잠을 잘 때도 어머니는 춥고 바람 들어오는 거친 자리에서 잠을 자고, 아기는 따뜻하고 포근한 자리에 눕힌다.
여섯번째는 유포양육은( 乳哺養育恩)이니, 3년 동안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요,
일곱번째는 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이니, 똥오줌 가리지 못하는 아기 옷을 성 한번 내지 않고 항상 깨끗히 해주신 은혜요,
여덟번째는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이니, 자식이 멀리 객지에 나가면 어머니의 마음도 또한 자식을 따라 함께 간다. 밥은 굶지 않나, 춥지는 않나, 모진 병에 걸리지나 않나, 객지에서 나쁜 사람을 만나서 봉변이나 당하지 않나 근심이 끝날 날이 없다,
아홉번째는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이니, 자식을 위해서는 그 어려움을 대신 받고자하며, 생명도 바치려는 보살의 마음을 가지셨다.
마지막 열번째는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이니,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다. 부모님의 눈으로 보면 80이 된 자식도 어린 아기처럼 보이며, 그를 염려하시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런 부모님의 알뜰하고 깊은 자식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지 조차 못하고 효도는커녕 자주 뵙기조차 못한 나의 이 불효를 무슨 벌로 매를 맞아야 하나 자괴감에 휩싸인다.
아버님은 머리미로 이사온 후에 이미 (그때 아버지는) 논밭 장만하는데 다 써버린 빈 일본 우체국 저금통장을 내게 주셨다. 아마 그 통장은 애착이 남아 버리기 아까운데다가 자식이 나이들면 가난한 집안을 위해 이국으로 나가 노동 하면서 우체국에 저금한 이 가난의 집안 역사를 되새기라는 교훈 삼아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적인 동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시경(詩經)에 '욕보지심 호천망극(慾報之德, 昊天罔極)이란 구절이 있다. 부모님의 거룩한 은혜는 높고 넓은 하늘처럼 끝없어 갚을 수 없음을 비유한다.
(*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어)
나는 지금도 이 저금통장을 보관하면서 아버지의 일생을 되새기면서 아픈 가슴을 스스로 쓰다듬는다.
8. 봉래학교에 체육관과 역사비를(을) 세우다
1. 내가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한지 한 50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 하나.) 문교부 차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1982년 어느 날 봉래학교 사친회장 일행이 찾아와 봉래학교 체육회관 겸 강당 신축 예산을 부탁해온 일이 있다.(왔다.)
그래 문교부의 연말 예산 잔액을 알아보니 그건 이미 바닥이 난 다음이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그 만분의 일이나마 모교에 보은하고싶어(었다. 그래서) 경상남도 학무국에 전화로 부탁하여 그 건축 비용을 부탁하였는데, 그런 부탁이 내(다). 일생에 처음 있는 일이라 즉각 들어주어 1주일 만에 예산 배정이 되어 이듬해에 건물 하나를 지었다. (뜻밖의 성취였다.)
모교에서 기념으로 남기고자 하니 간판이름을 써 붓으로 써달라기에, 한글로 「봉래체육관」이란 붓글씨를 보냈더니, 완공 후에 그 졸필 다섯 자를 확대하여 석판에 써 붙이고, 체육관 입구에는 「이 건물의 간판글씨는 제24회 졸업생인 정태수 문교부 차관의 글씨」라는 입간판 하나를 세워주었다. 그 (한) 30년 후에 (나의) 그 돌간판은 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지금은 황금색 판에 「봉양관」이란 새 간판으로 바꿔 달려 있다.
3년 재학이라는 짧은 인연이었지만 모교에 이런 (큰) 기념물을 세워 남길 수 있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24회 동기생인 대법관과 법무부장관을 지낸 이정우씨의 기념탑도 근년에 세워졌다.
2. (그 사친회장과 학교장 일행과의 재회에서 봉래학교 100년사에 화제가 옮겨졌다가, 볼래학교 전신 「사립 봉양학교」에 옮겨졌다.)
1년(여가) 지난 후, 사친회장이 상경하여 어렵사리 구한 「구한말 당시의 장지연(영)선생의 남평문씨 현창비문」 원고를 들고 오셨는데(다.) 그 (배경)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진주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은 한말에 창설된 사립 봉양학교(鳳陽學校)이다. 1909년 순종(純宗)이 각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라는 칙령을 내리자 진주지역의 민족교육과 구국의 뜻을 함께 한 김기수, 강재순 등이 모여 1910년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공유부지(현 경상남도 진주시 중앙동)에 사립 봉양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경영이 어렵게 되자 남평문씨 할머니가 기부금으로 갱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다. 이를) 장지연 선생의 글은 원문이 한문이어서 난해하여
( 칭송의 글(한문)을 남겼다. 그러나 그 원문이 한문이어서 난해하니)
그 옆에 한글(시)로 「남평문씨 헌창찬가」를 추가하여 입비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서부경남에서는 처음으로 건축된 강당이라 매우 자랑스러워 흔적없이 넘어가기에는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시간이 걸려) 1985년에 사친회에서 오석으로 기념비를 복원하여 세워(웠다.) 지금도 모교(의 계단)화단에 (까맣게) 건립하여 전해오고 있다. 그 사진과 가사를 싣는다.
봉래체육관 (「봉래체육관」 간판이 걸려있다)
「봉양학교 창시자, 남평문씨」 기념비문(장지연)과 현창문(정태수)
<오른쪽>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 선생 비문
<왼쪽> 정부인 남평 문씨 현창비문(貞夫人 南平 文氏 顯彰碑文)
충절과 예악의 고을 진주에
남평 문씨 할머니 또 하나의 별이로다.
대한제국 기울던 이십 세기 초
교육으로 구국갱생 이룩하고자
거족적인 교육운동 기운 일었네.
뜻있는 진주선비 힘을 합쳐서
비봉산 양지 바른 명당 언덕에
봉래(蓬萊)전신 봉양(鳳陽)학교
세우기는 하였으나 비바람 못 가려
이 소식 정해들은 문씨 할머니
길쌈 절약 저축한 큰 돈 이천 양
교육만이 민족 생존 이어간다시고
학문의 국제경쟁 미리 염려하시며
선뜻 던져 학교 설립 큰 일 마치니
진주 하늘 또 한 번 높아졌도다.
그 일 있고 칠십육 년 세월이 흘러
수많은 봉양 봉래 봉의 후예들
석학 지사 지도자 큰 일꾼 되어
앞선 나라 복된 마을 이끌어가니
선각자의 거룩한 뜻 이루었도다.
아! 그 때
여인으로 안목이 어찌 그리 높았을까?
큰일에 돈 쓸 줄 어찌 그리 알았을까?
길이 본이 될 만고의 거울이여!
1985년. 봉래 제24회 졸업생 鄭泰秀 지음
9. 날이 갈수록 더욱 그리운 사범학교 동기들
나에게는 날이 갈수록 더욱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다. 사범학교 동기생들이다. 처음에는 120명이었는데 지금은(한) 20여명만 남아 있어 아까운 친구들인데,(이다.) 다음과 같은 남다른 동질성이 더욱 그 우정을 느끼는 것 같다.
첫째, 고향이 같다. 진주라 천릿길이다. 그 고향산천 그 사투리 그 고향노래를 모두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자 동기생이 없는 것은 그 당시가 (다.) 남자만 선발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소년 후기에 만난 친구들이라(다.) 천지 분간이 안 되는 죽마고우시대를 벗어나 감성이 싹트는 다정다감한 시절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셋째, 6년간이란 긴 세월, 거의 매일 보고 자란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근)은 6334학제이지만, 그 당시에는 664 학제였다. 그 중 초등 6년은 너무 어려 동창관계가 약하지만 중등 6년은 다양한 감성교류가 이뤄지는 시기가 아닌가. 더구나 나의 경우는 초등과정이 2분 되어있어 더욱 그러하다.
넷째, 해방 전·후기를 함께 겪은 학우들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기인 2차 대전 끝 해에 만나 해방과 건국의 중대시기에 한 교정에서 보고 배우던 친구들이다.
다섯째, 첫 직업이 같은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사범학교는 초등교원 양성기관이다. 그 과정을 마치고 모두가 고향 근처 학교에 배치 받은 친구들이다.
여섯째, 사회 첫 출발기에 6.25 남침 전쟁기를 함께 맞은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무교육요원이란 특혜로 모두 제2예비역에 편입된 병역 면제를 받아 어려운 내전기를 무사히 넘긴 행운아들이다.
일곱째, 일생 같은 길을 걸어 공감을 지닌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생을 교육자로 보낸 동질성을 가진 친구들이다.
여덟째, 늙을수록 생각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생이 재촉해오니 더욱 그리워진다. 120여 명이 함께 졸업했지만 이제 겨우 한 20여 명만 연락이 된다. 날이 갈수록 간절해진다.
아홉째, 고향 사투리로 탕탕 놓고 얘기 나누면서 간격 없이 대할 수 있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이(끝으로 크게 나누어 이 지구상의) 네 곳에 흩어 모여 살고 있다. 1.고향 진주에 2.근 고향 부산에 3.타향 서울에 4.타국 일본에… 이렇게 네 곳에 살고 있다. 다만, 고향에서 멀어질수록 직업이 멀어지는 것이 인과관계인가 싶다. 직업상의 순종에서 잡종으로 흩어지나 보다.
나는 몇 년 전에 (이 그리운 친구들의 명단을 만들어 돌린 바 있었다.) “잘 접어 수첩에 넣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생각나면 전화 걸자”고 부언하며 이 그리운 친구들의 명단을 만들어 돌린 바 있다.이제 해마다 그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있)데,(다.) 한 달 전쯤에는 부산 친구 하나가 떠나갔다. 명복을 빈다. 그리운(고) 친구들아, 남은 세월의 무병장수와 행복을 빌고 또 빈다. 100세를 넘기는 날엔 청수연(天壽宴)을. 111세를 맞는 날에 황수연(皇壽宴)을 함께 열자꾸나.
전화받을 수있는 晉師제6회(1950.5.5.졸) 동기생들 2016.10.31 현재
서울지구: 金淇洪 閔泳鐵 卞奎秀 李正雨 林奉仁 張正基 鄭泰秀 成圭錫
(六進會) 成在祥 孫英秀 (미확인, 裵勝煥 裵玉光 梁在重)
釜山지구: 姜海相 金容世 金潤洙 朴箕緖 朴性來 林文燮 陳雄鉉 車琮洙
(新安會) 咸載弘 許 順 (미확인, 金武燮 金忠鎬 河性綱)
晉州지구: 姜淸秀 閔泳桓 尹禹鉉 李泰洙 鄭桂文 河五柱 (미확인, 黃善鎬)
(五五會)
日本지역: 李淳喜
1. 사범학교 시절의 은사 이야기, 한 토막
군사부일체(
그 중 표 교장님은 졸업장을 주셨고, 윤성용 교감님은 경남도 학무국 장학관으로 계실 때 내가 고교 교원 검정고시 합격 후 찾아뵙고, 내가 고등고시 준비 중이어서 고등학교로 전출되면 사퇴 또는 고시공부를 꺾어야 되기 때문에 고교 교사 발령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드린 적 있다.
(렸다. 내가 고등고시 준비 중이어서 고등학교로 전출되면 사퇴 또는 고시공부를 꺾어야 되기 때문이었다.)
(이 제자가 문교부 총무과 인사계장 당시에)
또 나의 담임선생님이셨던 김두평 선생님과 친족인 정회근 선생님은 내가 문교부 총무과 인사계장 당시에 문교부 장학관으로 부임하셨기에 중앙청에서 사제지간의 정다운 재회를 하였다. 그때가 박정희 대통령시대 초기인데,(여서, 또) 이 제자가 소견이 모자라고 째째해서, 술 한 잔 대접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다.
2학년 때 담임인 박해권 선생님께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 내가 제자로서 모처럼 정실인사 한번 저질렀다. (은 역시 내가) 인사계장 당시에 본인에게 생색내기로 비춰지지 않기 위한답시고 사전승락도 귀띔도 없이, 김해농고 교장에서 모교 진주사범 교장으로 전보시켜 드리고, 연이어 대학승격으로 진주교대 학장으로 옮겨드렸다(올려 들였다. 정실인사 한번 저질렀었다.)
심리학 가르치신 김정곤 선생님과는 뜻밖의 해후를 몇 번 한 적 있다.(하게 된다.) 내가 차관시절에 모교 방문 했을 때, 김 학장님과 같이 기념식수를 한 적 있고,(하게 하신 김 학장님,) 그 뒤 내가 서울교대 학장으로 부임한 그때, 김 선생님은 진주교대 학장으로 재임 중이셔서(었다. 그래서) ‘전국 교대학장회의’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서울교대 학장이 그 의장이어서 회의 때 마다 일반석에 앉아있는 은사님이(김 선생님이 내) 마음에 걸려 마뜩찮았고,(다.)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다.
2. 사범 6회 동기생 이야기, 반 토막
120여명의 동기생 중 4분의3은 떠나고 그 4분의1 가량이 네 곳에 흩어져서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일생을 교직에 봉사한 훌륭한 삶을 보내고, 거의 학교장으로 정년퇴임한 후 연금으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 중 특이한 두 사람이 있다. 김기홍과 이정우다. (사법고시 합격으로) 두 사람 모두 사법고시에 합격하여(으로) 대법관이 되었으며(에 이르렀으며), 이정우는 행정부로 건너와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행정과인 나까지 끼워 준다면 고등고시 합격자가 셋인 셈이다.
일일이 거명 않지만 사업에 성공하여 자손에게 훈훈하고 노후가 넉넉한 친구, 늙어서 부러움을 사는 벗들도 여럿 있다.
모두들 내가 몇 년 전에 수첩에 끼워다닐 수 있는 동기생 명부를 만들어 우송해 드린 걸 (바 있었는데, 모두들 이걸) 상시휴대하고 다니면서 전화 연락 하면서살아가고 있다.
2. 이 나라 이 사업에 뜻을 세우고 3. 신성한 조상들의 깨끗한 피를
튼튼한 몸으로서 씩씩한 우리 몇 천 년 이어오는 조촐한 겨레
우리는 남보다도 더 부지런히 귀여운 아들딸인 젊은 일꾼을
배우고 가르침을 익혀야 한다 참으로 지성으로 길러야 한다
영재가 모여드는 우리 학교는 이 길로 나아가는 우리 학교는
사범의 사범되는 진주사범 사범의 사범되는 진주사범
17. 누명 쓰고 억울한 귀양살이 1년
일생에 딱 한 번의 억울한 유배(流配)살이 경험은 (이 있다.) 권오병 장관과의 악연 때문이었다.
1568. 5. 21, 제18대 권오병 문교부장관이 부임했을 때(다.) 나는 그해 3월부터 문교부 총무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을 때였다. 또) 그 해 6월은(에는) 아버님(지) 경은공(耕隱公)이 별세하신 액운까지 겹쳐 슬픈 해인데,(였다.) 그 장례 보름 뒤(6월)에 갑자기 편수과장으로 좌천 발령을 받았다. 신임 장관이 오면 자기에게 맞는 새 총무과장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 나는 섭섭하지만 별 불만 없는 당연지사로 인식하고 감내하였는데, (다.)
그런데 (쪽박 쓰고 비 피하는 신세였다.) 좌천 4개월이 지나 11월이 되자 갑자기 경북대학교 부속병원 서무과장으로 이번에도 귄 장관으로 인해 두 번째 좌천을 영문도 모른 채 당하였다.
(전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번에도 권 장관으로 인해 두 번째 좌천을 영문도 모른 채 당한 것이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귀양살이, 아니 형벌을 받은 셈인데(이다.) 나로선 아무 잘못도 없었고 장관은 이유 설명도 없었다.
그래 박희범 차관을 찾아 그 사유를 따졌으나 그 분은 그저 위로만 하고 설명에는 입을 다물기에(었다.) 나는 홧김에 사직하기로 결심하고 항변하기 위해 장관 댁을 찾았다. 그러나 집 관리인이 나와 내 이름을 묻고 들어갔다 나오더니 장관이 안 만나겠다고 하신다며 대문을 쾅 닫아 걸어버린다. 그래 나는 화가 치밀어 고함치면서 대문을 여러 번 걷어차고(는) 별 수 없이 되돌아 온 적 있다.(오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생각을 바꿨다. 살아남아 다시 권토중래하겠다고 다짐하고) 대구로 내려가 새 임지에서 (부임하다.) 귀양살이 하숙생활 만 1년을 살았는데 그 반 년 쯤 뒤에 권장관이 재임 1년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권 장관 (분하지만 이유를 들을 수 없었는데) 퇴임 후 늦게야 나의 좌천사유를(가) 어슴푸레 알게 되었다. (들려왔다.) 기가 찰 일(사건)이었다.
전임 문홍주 장관 비서실에 근무하던 박 모 과장이 권 장관 장관실 추문을 청와대 대통령에게 투서를 냈(다)는데, (그 내용이 권 장관의 장관실 추문이었단다. )그걸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노하여 권 장관을 불러 주의와 경고를 날렸다는 것이었다. 그걸 권 장관은 (런데 그) 범인이 권 장관 부임 당시 총무과장으로 장관실을 자주 드나들던 정태수였을 거라고 짐작하고, (또) 편수과장으로의 좌천에 분노하여 투서를 한 것으로 추정하여(고) 나를 지방으로 축출시켰다는 거였다.
(추문이어서 좌천 사유도 설명할 수 없이 암묵적으로 처단하고 만 셈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 앙갚음의 엉뚱한 희생양이(에) 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당한 셈이다.
( 그럭저럭 나의 대구 유배생활 1년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나로서는 억울함의 극치였다.)
그 이듬해(1969) 4월에 권 장관이 해임되고 제19대 홍종철 장관이 부임하자, 태양은 다시 떠올랐다. (였다.) 억울한 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고시 선배 장인숙 국장이 홍 장관에게 나의 구제를 승낙 받아(고), 나는 1970년 1월에 문교부의 과학교육기획담당관이란 새 자리로 복귀하였다.
( 1년의 억울한 귀양살이, 지방 좌천근무를 무사히 감내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되는 집은 암소가 세 마리라 한다. 돌아온 나에게는 줄줄이 행운이 따라왔다. (역경을 참고 중도하차하지 않고 인내하기를 잘한 셈이었다.) 서울복귀 5년 뒤에 나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사회교육국장이 되고, 권 장관은 58세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만다. 어릴 때 들은 ‘오살(五殺) 맞을 놈’이란 욕이 떠오른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사람, 자기 눈에서는 피눈물 난다는 속담(도) 생각난다.
(*나는 그 억울함을 따지고 한풀이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24. 고등고시 제4부(교육행정)의 부활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제12회 고등고시 제4부에 홀로 합격하여 교육행정에 1961년부터 종사하였다.(게 된 사람이다.)
그런데 이 12회를 끝으로 제4부가 폐지되어버려 후배들이 끊어지고 말았으니,(다.) 말하자면 내가 「교육고등고시」 제도의 막내가 되고 만다.
(그렇지만 어찌할 길이 없어 자손이 끊어진 가문처럼 되고 만 것이다. 못내 아쉬웠다. 그 무자손 세월이20여년이나 흘러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20여 년 후 내 입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981년 봄에 문교부 차관에 부임하여 국무에 관하여 건의, 의결하는 장관들 모임인 국무회의 자료를 먼저 심의 결정해 올리는 차관회의 멤버가 되자 어느 정도 포부를 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즉, 국무에 관하여 건의하고 의결하여 장관들의 모임인 국무회의 자료를 먼저 심의 결정해 올리는 차관회의 멤버가 된 것이다.)
나는 평소의 불만사항이던 (을 해결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등고시 제4부를 복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1960년을 마지막으로 이 교육고등고시가 없어졌으니 1980년 당시까지에는 약 20년간의 후배 없는 세월이 흘러가고 만 시기였다.)
먼저 차관회의 간사인 김용래(金庸來) 총무처 차관을 개별적으로 만나 교육행정의 중요성과 고등고시 4부의 부활을 설득했(다. )더니, 김 차관은 부친이 (그의 아버지가) 교육자여서 쉽게 동의해 주었다.
다음으로는 (행정고기) 관계부서인 이춘구 내무, 김흥기 경제기획원, 노재원 외무, 정해창 법무, 금진호 상공, 박윤흔 법제처 등을 개별 접촉하여 양해를 구했다. 새로(이) 신설하는 것이 아니라 문교부가 손해 본 것을 복구하는 일이라 역설하니 모두가 수긍해 주었다.
그리하여 1981년 가을에 총무처에서 「행정고시 제4부 신설의 건」으로 차관회의에 상정하게 되었는데, 당시(다. 나는) 내가 (당사자인) 고시 4부 막내라는 애소를 하면서(와) 20여년의 단절이 교육행정의 동력을 잃게 되었다고 역설하며 전원 동의해 줄 것을 호소하여 (였다. 그 결과 찬동발언이 나오고)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안건은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마침내 부활되었다.
(하도록 되고 만다.)
(그리하여) 나의 차관 제2년차인 1982년부터 고시 4부가 복구되어 모집하게 되고 그 첫 합격자 9명이 배출되었으니,(기에 이른다. 그것이) 행정고시 제26회로서 그 후 지금까지 합격자를 내고 있다.
나는 1983년 초의 어느 날 문교부에 발령되어온 그 첫 9명의 고시 4부 합격자를 모두 모아( 담소를 나누었다.) 내가 고시 20년 선배라는 사실과 여러분은 대가 끊어진 4부를 이은 첫 아우들이란 혈연관계를 감회 깊게 설명한 적 있다. (하고, 이 막내의 공로를 자랑삼아 사자후 한 일이 있었다.) 참으로 속이 시원한 일(대성공)이었다.
이 고시 출신 모임은 2016년 오늘날까지 34년간 지속되고 있다. 며칠 전에 그 26회 아우 합격자 이현목 국장과 통화를 하면서 그가 옛날을 회상하는 추억담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들이 문교부에 발령된 얼마 후 당시의 정 차관께서 우리 후배들 9명을 불러 고시 4부를 잇는 경위를 설명하고 형제간처럼 상부상조하면서 교육행정의 발전에 기여할 것을 역설하면서 점심을 대접받은 그 날이 뿌듯했었다”는 소감이다.
(까지 듣게 되어 늘그막에 즐거움 하나를 더한 일이 있었다.)
새로 개설된 제26회 고시 4부에 합격하여 1983년에 문교부 수습행정사무관으로 배치된 9명은 다음과 같다.
강영웅(대학 교수) 권문홍(체신청장,보험공사부사장) 김명훈(부교육감)
권진수(부교육감, 고교장) 김종률(문체부 실장) 이학춘(대학교수)
이현목(대학 사무국장, 교육부 과장) 황호진(대학 사무국장)
신형철(기획재정부 국장) 이상, 부처간 교류와 교육현장 진출이 많음
27. 청와대에 '세 사람이 살 길'(三人圖生)을 조언 하다
「천포(泉浦) 이상주 박사 회고록」이 우송되어 왔기에 이를 읽다보니(가) 나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어, 기억이 새로워져 이 항목을 떠올렸다.) 이 박사는 서울대 사대 교수 출신으로 교육부장관 겸 부총리에 오른 사람이다. (그의 회고록 중) 나와 관련되는 부분(p.229~239)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1981년 연말경의 일이다. 내(*이상주 자신)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정신문화연구원장 임명문제가 대두되었다. 나는 3인을 선정하여 이를 당시의 이규호 문교부 장관에게 보여 의논한 뒤, 전두환 대통령에게 상신하여 K씨로 낙점 받았다.”
② “이규호 장관은 다른 사람을 내정하고 그 사람에게 그 내정사실을 통고해버린 때여서 난감하게 된 상황이었다 한다.”
③ “이규호 장관은 그 K원장이 전직 대학총장 시절에 비상계엄선포를 반대한 사실로 해임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비선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이는 그의 배신과 잔혹함이 살아난 사건이었다”).
④ “이 사달로 인하여 그해 연말의 청와대 비서실 인사 정리에 내가 포함되게 되었고, 결국 교육문화 수석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김경원 비서실장, 우병규 정무수석, 이웅희 홍보수석과 함께). 44세 때였다.
⑤ “전두환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이상주 수석을 보낼 자리를 하나 구해보라’ 했는데, 이에 한국방송통신대 학장 자리를 추천했던 모양이었다. 이를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의논드리니 ‘다른 대학을 찾아보라’해서 김경원 실장이 정태수 문교부 차관에게 한 번 더 찾아보라고 지시하게 되고, 정 차관이 다음해 2월 말에 공석이 될 두 대학 중의 하나인 강원대학 총장 자리를 추천하게 되어 그곳으로 낙착되었다.” 참고로 부연하면 그 당시의 방통대는 독립된 대학이 아니라 서울대 부설형태여서 위상이 낮다고 본 것 같다.
이상주님의 윗 서술은 거의 정확하다. 그러나 이 회고문 중의 앞부분인 이상주 수석의 경질 원인에 관해서는 나로서는 상세히 모르는 부분이다. 다만 이규호 장관과 이상주 수석 간의 마찰음은 이 장관을 통해서 어슴푸레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청와대 김경원 비서실장이 문교부 차관인 나에게 전화 걸어 이 수석의 전출처를 모색해오라는 전화는 아(이)예 없었던 일이다. 나와 김경원 실장은 일생 말 한마디 접촉도 없는 사이다. 이규호 장관이나 이상주 수석의 부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순전히 나 스스로의 셈법에 의한 것으로써, 알력과 고민거리인 이번 인사처분으로 인하여 남게 될 관계자 3인의 손실을 3인의 승리로 귀결 지을 수 없을까 하는 순진한 나의 발상일 뿐이었다.
내가(기) 이 인사안에 개입된 연유는 사적인 마찰과 감정으로 생긴(붉어진) 작은 사단이, 대통령 보좌관인 교문수석, 국가 원수와 문교부 수장 세분 모두가 세상의 조롱꺼리가 되는 하나의 사고를 예방해보려는 순수한 생각에서였다. 누구의 사주나 지시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닌 자발적인 발상이었다는 점을 (여기에) 보완해 두고자 한다.
나는 이규호 장관으로부터 이상주 교육문화 수석과의 마찰음이 발생하여 그 전출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권고한 결과, 이 수석이 추천된 방통대 학장 자리를 거부하는 바람에 본래 직장이었던 서울대 사범대학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라는 전언을 들었다. 이에 대한 나의 기본입장은 업무상 아무 잘못이 없이 개인감정 충돌로 쫓겨나는 억울한 이상주 수석을 조금 도와야겠다는 생각과, 사후에 해코지 꾼이란 악평을 받을 이규호 장관을 미리 구제해야겠다는 마음, 거기다가 이상주 교수를 발탁하여 수석비서관으로 임용해 쓰다가, 본인의 과오가 아니라 밖으로부터 고자질류의 퇴출 건의를 듣고, 아무 잘못 없는 자기 부하를 원대복귀해 버린다면 그것 또한 대통령의 패덕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 문제로 생각되었다. 세 분 모두의 상처로 남을 것이 내 마음에 걸렸었다. 그리하여 이왕 엎질러진 물이지만 이를 말리거나 대응방법을 완화함으로서 헤어지더라도 좋게 작별하게 중재해야겠다고 마음먹기에 이른다.
나는 그 열쇠가 이규호 장관 자신의 손에 쥐어져있다고 단정하였다. 문제를 일으킨 것도 그 수습 방향도 오로지 이 장관의 몫이라 여겼다. 이 수석도 대통령도 모두 수동태이며 피해자인 셈이다. 그래서 이 장관에게 말했다. “장관님, 제 소견입니다만 이 일을 잘못 수습하면 세 분 다 피해를 입게 됩니다. 당사자인 이상주는 버림받은 사람으로 쫓겨나는 셈이어서 사후에 불만을 퍼뜨릴 것이고, 대통령은 유능하다고 사람을 불러 쓰고는 특별한 잘못도 없는데 내쳐버렸다는 부덕한 사람이 되고, 이 장관님은 당사자의 원한을 살 뿐 아니라, 서울대사범대 패당세력으로부터 증오를 받을 것입니다. 서울사대는 우리나라 교육계를 안팎으로 휘어잡고 있는 실질적인 세력집단입니다. 은연한 그 집단반발은 길게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처리는 그대로 하되 3자 공생하는 길은 이상주를 영전시켜 주는 길 뿐입니다. 그 길을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어쩌시렵니까?” 라는 요지의 간언을 드렸다. 이 장관은 즉석에서 “차관님, 고맙습니다. 그리해보세요”라는 답이 나왔다.
나는 총무과장을 불러 전국 국립대 총장 빈자리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 답은 “지금은 없다”였다. 차선책으로 두어달 후인 내년 2월 말에 임기만료 총장 자리 찾아오라“ 재 지시했다. 두 군데가 나왔다. 하나는 충북대 정범모 총장과 강원대 이민재 총장 자리였다. 그런데 정 총장은(을) 초임 4년 완료상태이며, 이 총장은 8년 재임을 마친 상황이었다. 보통의 경우 3임은 없으니 강원대학교에 주목하였다. 이민재 총장은 문교차관 선배여서 죄송스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상주 수석을 그리로 추천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이규호 장관에게 결과보고하고 권유하였다. 이 장관은 반색을 하며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개선장군처럼 그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렇게 되어 44세의 이상주씨가 생애 처음으로 국립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강원대학교로 부임하게 된다.
이상주 수석은 그 후 울산대 총장, 한림대 총장, 정신문화연구원장,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 교육부장관 겸 부총리로까지 승승장구하였다.
이상주 장관과의 인연은 내가 사회교육국장 시절인 한 5년 전인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산덕 장관을 모시고 파리의 유네스코총회에 참석했을(한 때에 갔을) 때였다. 서울사대 조교수 이상주를 통역관으로 위촉하여 동행했었다. 나는 47세 그는 패기 넘치는 41세 때의 일이었다. 미국 유학 경력이 있어 통역도 회의 심부름도 아주 잘했다. 그 첫 인연으로 간혹 인사 오는 사이였고 세미나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봐온 터였다. 부산사범(법)학교 출신이어서 나하고는 「사범」이라는 동질성 동감성이 통하는 사이였다. 그 인연으로 이번의 좌천인사에 관여하게 됐고 어린 총장이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후일담이지만 그도 나도 퇴임한 뒤에 마지막 인연이 생겨나게 된다. 2004년의 일이다. 나의 망처의 묘와 나의 합폄 묘에 수당비(壽堂碑)를 세울 때다. 나는 내 생전에 이 비를 세우면서 이상주씨의 이름으로 된 비문을 남기고 싶어 그에게로부터 협조 승낙을 받았다. 그리하여 비 문안 초고를 넘겨 그의 검토 수정과 붓글씨 서명을 받았다. 포천에 있는 우리 가족묘역의 내 수당비문에는, 그 말미에 「부총리겸교육부장관 철학박사 泉浦 李相周 근찬」이라는 자필 서명이 있어, 우리 두 사람이 영원한 벗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38. 매화는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일생의 자계(自戒), 탐관오리(貪官汚吏)-
매화는 봄 꽃 피우기 위해 긴긴 엄동설한을 견디지만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 不賣香) 한다. 우리 집안 젊은이들은 누구나 농포공 정문부 선조 이야기를 듣고 자랐(란)다. 한양(서울)출생, 왜장 가등청정을 몰아낸 함경도 의병장이지만, 그 올곧음과 위국 충정의 삶을 칭송한다. 특히 전주부윤 시절의 일화는 빠지지 않는다. 즉 부윤으로 부임하니 나라 곡식을 빌려 먹고는, 형편이 좋은데도 이를 되갚지 않고 떼어먹으려 하는 자가 있어 옥에 가두고 법에 따를 것을 요구하셨단다. 그런데 그 사람의 뒷배가 인조반정 공신인 중앙의 고관이어서, 그 죄인을 풀어주라고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왔지만 이를 거절하고 끝까지 빌려 먹은 나라 곡식을 갚게 했다는 내용이다.
내가 성인이 되고 국사 공부에 집착하다가 저절로 가문의 역사에도 미치게 되어 위의 농포공의 일화가 사실(史實)이라는 것과 그 일로 결국 옥사와 매질에 돌아가시게 되고 또 그 어른의 유언으로 두 아들이 서울살이를 접고 진주로 낙남(落南)하게 되었다는 그 내력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을 우리 농포공파 후손들이 원통해 하고 이 이야기가 대대로 400년을 전해 내려왔구나 하고 늦게야 알게 되었다.
모든 공직을 물러서고 여든을 넘은 후에 뒤돌아보니 올곧고 맑고 청렴하게 살아오신 선조님의 삶을 본받으려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과연 그러했는지는 두렵다.
(야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길이라는 정신이 신조가 되어 몸에 배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저절로 농포공의 삶을 본으로 삼고 닮아보려는 한 평생을 살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내 일생의 신조는 ( 한 마디가 떠오른다.) 「청백리(淸白吏)까지는 못되더라도 탐관오리(貪官汚吏)는 되지말자는 것이다. ‘탐관’은 벼슬에 탐욕을 부려 인사청탁을 하는 벼슬아치이며, ‘오리’는 부정한 돈을 잘 받아먹는 벼슬아치를 뜻한다. ‘청백리’는 되고싶지만 지켜낼 자신감이 없는 사회라 완벽하게 대응할 자신이 없어 이렇게 표현한 것 같다. 사실 나는
(*부득이한 식사 대접은 받되 아무리 큰 시혜의 사례라 하더라도 10만 원 이상은 절대 받지 않았다.)
「부정청탁 안 받고 안하기」 「부정한 돈 안 받고 안주기」라는 고집스러운 자존심으로(기본에 순치된 꼿꼿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고집스러운 자존심이기도 하다.)
해방과 건국,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시대로 일컬어지는 90평생의 국가 발전과 사회적 변천 속에서 일어나는, 경쟁 혼탁 비방 모략 청탁 부탁 호소 애걸 웃음 울음 속에서, 비굴하거나 비루한 일 없이 살아볼려고 노력 하였다.(온 과거가 다행이었다고 스스로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이 모두 가난한 선비가문의 내림이자(인 동시에)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의) 영향이(리)라 싶(생각해본)다.
사실 나는 수많은 인사이동과 승진 영진을 거쳐 왔지만, 인사 부탁을 위해 권력가들의 사저를 방문하거나, 직장에서도 일부러 찾아가서 전보나 승진을 부탁해 본 일이 없었다. 나를 문교부 차관으로 낙점해준 대통령에게도, 나를 대학교육국장으로 영전시켜주고 1급인 중앙교육연수원장으로 또 차관 후보자 명단에 올려 청와대에 들고 간 장관에게도 그랬다(말이다.) 그 앞의 과장 국장 승진 뿐 아니라 인사이동의 계절에까지도 이 자세는 언제나 일관되게 유지했(되었)다. (사실 영진 영전 시켜달라는 말을 입 밖에 뱉어본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이 살아온 것이다.)
마무리 단계의 교원공제회 이사장직도 교육대학총장도 대진대학총장직도 모두 (나를 아는) 타인으로부터의 권고나 추천으로 된 것이지 내가 부탁해본 적 없다. (이 그 동기가 것이 사실이다.)
내가 살아온 한 시대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의 수동적 생활태도나 고요함을 깨고 역동적인 반세기였다. 그래서 누구나 활동적 자세를 칭송하는 분위기이기도 하였다. 그런 사회적 풍조가 개인 생활에도 파급되어 도전적이고 발랄한 인간상을 칭송하게 되고, 이자세가 자기 출세에도 적극성을 띄게 되어 부귀영화를 탐하는 본성에 보태져서 오도되면서 적극적 청탁이 횡행하기까지 이르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잘 적응하고 활성적으로 대응하면 이득과 영달도 따르는 것이 전반적 통례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풍조가 오도되어 결국에는 보기 흉한 청탁과 부정한 풍조가 만연해나가자, 최근에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제안되고 성립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법이 나오기 전에도 스스로 자기 규제법이 마음속에 잠재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법이 나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법이지만, 더 일찍 입법되었어야 했다고 여기고 있다.)
이 법이 통속화 생활화되면 아마도 우리 사회는 진일보할 것이다.
( 반면 까칠한 사회분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나에게 마음 열고 함부로 말하는 친한 친구로부터 내가 좀 까칠한 친구라고 말해오는 걸 보니 말이다.)
내가 단 한번 부탁을 해본 일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위에서 언급한 단 한 가지 예외라는 것은, 이미 앞 구절에서 언급한 일로,) 25~26세의 교사 시절에 교육감실을 찾아가 부산 전출을 간청한 사건이다. 그것도 학교 연구수업에서 그 교육감님으로부터 칭찬 받은 것이 용기가 되(었)고, (그냥 교육감이 아니라) 사범학교 때의 은사였음이 동력이 되어, (그것도) 댁을 방문 간 것이 아니라 교육감실로, 그것도 빈손으로 찾아뵙고 어리광스럽게 부탁드린 그 사건이었다. (흔히 하는 청탁처럼 숨어서 할 만큼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은사 김성봉 교육감님은 토닥이며 웃으면서 즉석 허락을 해 주셨고, 나는 곧 부산으로 전출함으로서 그 뒤의 새로운 내 생애가 전개되었는데, 그 후 선생님께 (게 된다. 그러나) 감사인사 드릴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해) 일생의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게 된다.)
뇌물과 사례금 안받고 세칭 좋은 자리로의 청탁 안하고를 관통하는 인생을 사는 자는 가정적으로는 궁핍을 감내하는 노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박봉의 산업화시대 공직자들이 모두 공감하는 사항이다. 즉, 일상적인 절약이 그것이다. 물 한 방울도 순간의 전기 방전도 아끼는 절용이 관습화하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뇌물을 탐하는 자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최후를 당하고 후회하는 말년을 맞게 된다. 특히 교육(욱)관계 종사자는 뒷소문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런)
청렴 일변도의 생활태도는(로 말미암아) 손해 본 것도 있게 마련이다. 바른 자세이기는 하나 인생의 지향점을 향한 열정을 다했다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 아니었나 싶다. 차관 시절 내가 대통령의 댁을 (방문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고 그 첫 방문을 계기로) 명절 때 만이라도 찾아뵙고 친근감을 표했더라면 차관 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 아닐까 하는 가상도 해본다. (틀린 말도 맞는 말도 아니지만 말이다.) 생각을 역으로 돌려서(보면) 분수에 넘치게 (또 너무 지나치게) 출세 감투를 쓰게 되어 제 힘으로 감당 못할 일을 당하여 패가망신하는 예도 더러 있었으니, 나는 (그 착한) 고집이 있어 작으(마하)나마 유종의 미를 거두지 않았느냐고 역시 자위해 본다.
이런 내 생각을 자식들에게 비춰보면 (내 아집 걱정거리로 비춰지기도 한다.) 자식 넷이 모두 환갑 나이 전후여서 이제 그 걱정할 시기는 지났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이 애비 성향을 닮은 것 같다. 더 잘 됐으면 하는 자식 욕심에서 능소능대한 처세술로 입신양명 했으면 좋으련만… 하는 바램도 있고, 동시에(고 바라지만,) 좀 부족하더라도 정도를 걸어갔으면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임을 (가는 자식들에게서 안도감을 느낀다.고) 감히 자백한다.
(*어떻든 지나온 나의 기본자세에 행복감을 스스로 잠기면서, 또 자위 자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논문 소개 밑에 넣었으면 싶습니다.31. 박사학위 논문 심사 보고서
-쓰쿠바(筑波)대학 학위심사위원회-
전 문교부차관 정태수씨가 지난 3월 25일 일본 쓰쿠바(筑波)대학에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정 박사는 「한국교육법의 성립과정에 관한 연구-교육권의 인식과 보장의 관점에서」라는 논제의 박사학위 논문을 전기 대학에 제출한 바 있었는데 이 논문이 통과되어 기보한 바 권오봉씨와 함께 지난 3월 25일 동 대학에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정태수 박사는 1931년생으로 경남 진양 출신, 단국대 법과와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문교부 대학교육국장, 문교부차관 등을 역임하고 중화민국 국립중흥대학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바 있다. 동씨의 논문은 본원 사업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교육 분야에 관한 것으로 특별히 논문 심사보고서를 입수, 번역 소개한다. 1986년 5월 15일 퇴계학회 소식지(5월호) |
논문제목 : 한국교육법의 성립과정에 관한 연구
- 교육권의 인식과 보장의 관점에서 - < 번역문 >
참고 논문 3편
쓰쿠바(筑波)대학 학위심사위원회
1, 논문 심사 요지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논문요지)
서 장 이 연구의 과제와 방법
제1장 민족교육권의 원류(源流)
제2장 식민지기에 있어서의 민족교육권 운동
제3장 민주적 교육제도의 수용(受容)
제4장 건국 헌법과 교육조항의 성립
제5장 「1949년 교육법」의 성립과정
제6장 「1949년 교육법」의 심의와 의결
제7장 해방 후 교육개혁과 교육법 제정시의 인적 구성
종 장 이 연구의 성과
이상 합계 957쪽의 본문과 참고문헌, 연표 61쪽, 도합 1,018쪽(모두 400자 원고지)로 구성된다.
서장에서는 「연구의 의도」, 「연구의 대상」, 「연구의 시점(視點) 및 방법」, 「선행연구의 음미」의 4절을 통하여 이 연구가 해방 전의 전사(前史)에 이어지는, 한국 해방 후부터 1949년 교육법 제정에 이르는 과정을 대상으로 하여 이것을 교육권(敎育權)의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연구한 것이며 미개척의 연구 분야에 도전하는 논문임을 기술하고 있다.
제1장에서는 「근대민족 교육의 맹아(萌芽)와 개화(開花)」, 「근대민족교육 제도의 수립과 발전」, 「민족교육에 대한 인식과 요구」의 여러 절을 마련하여 17세기로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근대교육제도의 확립과정과 그 배경을 고찰했다.
제2장에서는 「민족교육제도에 대한 억압체제」, 「식민지내에서의 민족교육권(民族敎育權) 운동」, 「국외에 있어서의 민족교육 재건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의 교육법제」의 4절을 두어 일본식민지 하에서의 민족교육권의 구상상황과 그 회복운동을 탐구하고, 그 시기에 이미 교육권의 제도적 골격이 구축되어 있었던 사실을 밝혔다.
제3장에서는 「미 군정의 대 한국정책」, 「교육개혁의 진전과정」, 「민주적 교육제도의 수용」, 「미 군정기에 있어서의 민족교육권의 내용 충실화 운동」, 「미 군정기 지도계층의 교육권 운동」의 5절을 두어 미 군정 하의 교육개혁이 한국인의 주체적 활동에 의해 확립되어 미국식 민주교육의 수용과 민족교육의 회복이 그 기축(基軸)을 이루고 있음을 밝혔다.
제4장에서는 「건국헌법(建國憲法) 교육조항의 성립」, 「건국헌법 교육법제의 계보(系譜)와 내용」, 「건국헌법의 교육권 구조」, 「교육권 보장의 발전단계」의 4절에 의해 헌법의 교육조항의 성립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는 동시에 그 교육권 구조를 해방 전의 그것과의 관련 및 구미에 있어서의 발전단계의 대비, 이동(異同)을 고찰했다.
제5장에서는 「정부안과 국회안」, 「건국기에 있어서의 주체의식」, 「외국교육제도의 수용과 변용(變容)」의 3절을 통해 1949년 교육법안이 하나로 통일되는 복잡한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고 그 배경을 고찰했다.
제6장에서는 「교육법 심의의 배경」, 「교육법안 심의과정과 그 내용」, 「교육법 심의에 있어서의 논의」, 「교육법제 성안(成案)에 있어서의 교육권 인식」의 4절을 두어 1949년 교육법안의 국회 심의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고 입법자들의 교육권 인식의 수준을 고찰했다.
제7장에서는 「미군정기의 교육개혁에 참여한 주역」, 「건국기의 교육개혁에 참여한 주역」의 2절로 나누어 한국 해방으로부터 1949년 교육법의 제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이니시어티브를 잡았던 사람들의 경력이나 활동을 상세히 분석하고 해방 후 교육개혁의 배후에 있는 사상적 조류를 분명히 했다.
종장(終章)에서는 「본 연구의 성과」를 정리하여 「금후의 연구과제」를 명확히 했다.
「본 연구의 성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7세기로부터 시작되는 근대사상의 조류가 한국에 있어서의 근대교 육제도 확립의 원천이 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다.
2) 일본의 식민지 정책 하에서 민족의 교육권과 인권론으로서의 교육권 의 확립의 필요성이 자각되어 이 시기에 이미 해방 후의 교육법제에 계승되는 교육권적 여러 원리가 확인되고 있음을 밝혔다.
3) 미 군정기의 교육개혁이 미군정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한국인 의 주체적 활동에 의해 전개되었음을 밝혔다.
4) 미 군정 하의 교육개혁의 과정 및 건국헌법의 교육조항과 1949년 교육법의 성립과정을 관련 자료의 발굴에 의해 상세히 분석하고 종 래에 불명으로 되어있던 점을 밝혀냈다.
5) 대상으로 한 시기의 교육권 인식에 관하여
① 헌법과 교육법의 배후에 있는 교육권 인식이 상당히 높은 이론적 수 준에 달하고 있었던 사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경제·문화적 사정으로 국가의 감독권의 강조 등의 한계와 입법자들의 인식의 차이가 드러 난 점.
② 한국에 있어서의 교육권 인식에서는 민족교육권이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는 점.
③ 구미에 있어서의 교육권 인식의 발전단계와 한국의 그것과를 비교하 면 공통성과 동시에 특이성이 보인다는 점 등을 밝혔다.
6) 건국기의 교육법의 역사적 의의는 ①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민족교 육을 보장하는 교육제도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② 「교육 받을 권리」를 명문화한 현대교육 법제가 성립하여 이 점에서 이후의 교육법제의 기초가 된 점 등에서 찾을 수 있음을 밝혔다.
2. 비 평(批評)
결론부터 말하면 이 연구는 대단히 수준이 높아 학위 청구 논문에 걸맞는 것으로 판정할 수 있다.
우선 첫째로, 본 논문은 역사적 실증주의의 입장에 서서 한국 해방 후의 교육법제의 성립과정을 면밀히 해명했다. 논문 작성자가 기술하였듯이 이 테마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선행연구는 한국에 있어서도 드물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료 부족에 의한 것이었다. 이 점, 논문작성자는 공식 문서나 의사록 등의 검색은 물론이고, 당시의 신문·잡지를 폭넓게 참조하여 당사자들과의 인터뷰·서신 문의 등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이 노력으로 수많은 새 자료를 발굴하여 종래의 연구에 있어서 불명확했던 점을 밝혀냈다.
둘째로, 명확한 연구의 골격을 설정하여 역사해석의 축으로 삼았다. 즉 일본에 있어서의 교육권 이론에서 배우면서 주권으로서의 교육권(민족교육권)과 인권론으로서의 교육권(구조)이 해방 후의 교육법 성립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밝히려 시도했는데 이 시도는 성공했다. 이 골격에 의한 연구는 한국에서는 초유(初有)의 시도이고 ① 한국에 있어서의 교육법제에서는 민족교육권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점. ② 건국헌법이나 1949년 교육법의 역사적 역할. ③ 구미 제국과 비교해서 한국의 교육법제의 독자성 등을 발견할 수가 있었고 나아가 이 연구를 일국의 역사연구에 그치지 않고 교육권 이론이나 외국과의 비교 연구에도 적응 가능한 것으로 했다.
셋째로, 형식면에 있어서 거의 오류가 없고 도표에 의한 표현을 고찰하는 등 세심한 주의와 끈기가 필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점으로 미루어 이 연구는 한국에 있어서의 연구로서 자료·연구방법의 측면에서 독창적일 뿐 아니라 일본의 연구에도 시사(示唆)를 주는 의의가 있고도 수준 높은 연구로 판단된다. 외국인인데도 탁월한 일본어로 대부분의 논문을 완성한 것도 칭찬을 받을 만하다.
끝으로 욕심을 말하면 역사적 현실과 이론적 골격과의 연결, 인물경력 조사법의 의미부여, 교육현장의 실정 파악 등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위의 평가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3. 학력의 확인
신청자의 학력, 경력에 관하여 신중히 심사하여 「교육학박사 논문 심사 실시 요령」의 13(2)-(6)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그 학력을 확인했다.
4. 구술시험
「교육학 박사 논문 심사 실시 요령」의 14에 근거, 1월 22일 오전 10시부터 구술시험을 행한 결과 극히 우수하여 합격으로 판정되었다.
5. 결론
상기 논문 심사, 학력의 확인 및 구술시험의 결과에 의거, 신청자 정태수씨는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다.
1986년(昭和61년) 1월 24일
주사(主査) 쓰쿠바(筑波)대학 교 수 眞野宮雄
쓰쿠바(筑波)대학 교 수 石部元雄
부사(副査) 쓰쿠바(筑波)대학 교 수 下村哲夫
쓰쿠바(筑波)대학 교 수 高野淸純
쓰쿠바(筑波)대학 교 수 成田十次郞
쓰쿠바(筑波)대학 조교수 桑原敏明
32. 서울교육대학교의 회역사는 길다. 구한말의 대한제국 고종황제 때인 1894년에 칙령으로 창설되었으니 120여년의 학교사를 지닌 유구한 학교다. 이를 요약해 보면 전사(前史)와 현사(現史)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사 : 한성사범학교 시대 16년간(1894~1910)
경성사범학교 시대 35년간(1910~1945)⇛서울대 사범대로 이관
현사 : 경기사범학교 시대 4년간(1946~1949)…초등교원기관 별도신설
서울사범학교 시대 13년간(1949~1962)
2년제 교육대학 기 18년간(1963~1981)
4년제 교육대학 기 36년간(1981~ 현재) 그 중 초기 2년여 재직
취임식에서 '초등교육 교단인 양성'이란 목적대학론을 강조한 기억이 남아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새 학장의 이 생각에 대다수의 교수는 새삼 동의하지만 일부 교수는 원칙적으로는 옳지만 반감 가진 교수도 제법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반대자는 그 첫날부터 나를 절대로 수용하지 않고 등을 돌렸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취임 얼마 후에 이러한 분위기를 차차 감지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재학생들의 마음과 자세문제였다. 두뇌는 상급인데 가정의 빈곤으로 교육대학으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그 장래는 사회가 하대하는 초등교사라는 좌절감이 팽배하여, 교문을 나서면 교대 배지를 떼고 다니며 불만 가득한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일부학생은 밖에서 그룹 이념교육을 받아 반정부 반국가적 성향(양)을 간직하고 상
서울교육대학이 2년제에서 4년제로 승격된 지 5년이 되던 1985년 초에 문교부 간부로부터 뜻밖의 질문전화가 왔다. 서울교대 학장으로 추천코자 하는데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낮에는 대한교직원공제회 이사장, 밤에는 단국대 교육대학원 교수로 역시 두 길을 뛰고 있을 때였다. 나는 내가 거론된 이유와 상황을 물어보고 이에 동의했는데,(와 환영의 답을 보냈다. 당시 손제석 문교부 장관의 사전 동의가 있었다는 암시도 받았다. 그리하여 제8대 학장(뒤에 총장)(1985.4~1987.7)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55세로 차관 퇴임 후 2년 뒤의 일이었다.
나는 (의 행복감은 절정이었다.) 득의의 시절이 왔다고도 생각하였다. 유년의 희망이 ‘선생님’이었고, 사범학교라는 교원양성 교육을 받고 10년의 교단 경력이 있는데다 교육고등고시와 문교부 20여년을 겪었으니, 이제야 내 인생의 본 궤도에 오르는구나 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더구나 2년제 교대를 4년제로의 격상에 전심전력을 다한 자긍심이 있는데다, 문교부에서의 ‘교단 중심의 교육행정론’과 ‘교실개혁론’을 주도했지 않았던가.
또한 전국 총·학장 회의가 개최된 때에는 교대 학장들이 대학 일반문제에 휩싸여 교대만의 교원양성 문제에 대한 토의가 전무하였던 문교부 시대에 교대만의 문제를 시달협의하기 위하여 차관으로서 ‘교육대학장 회의’를 별도로 소집하여 우리나라 초등교육교원 양성문제에 대한 지침과 의견교환을 한 특이한 일도 있지 않았던가.
이런 연유로 내 일생 제대로 제자리를 찾아왔다는 사명감에 불탄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고 지금도 절로 열이 오르기까지 한 것은 타고난 팔자소관인가.)
서울교육대학의 학교 내에서 선량한 친구들을 오도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 운동권은 군사독재 반대, 민중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친북 지향성까지 지니고 있었다.
교수들의 문제도 감지되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나의 의욕적인 개혁의지에 찬동하고 동참해 주었다. 그러나 (으나,) 나의 주장이 원칙적으로 긍정하면서도 심적으로 극력 저항하는 세력이 내재하고 있었다.(어) 그 분들은 재학생의 열등감 소외감에 동조하면서 자기도 교대 교수의 불만감에 연결지우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교육대학을 중등교원 양성기관이나 학문탐구 수준으로 높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는 지향성, 즉 )사범대학화 문리대학화 지향성을 갖는 심정으로 강의하고 지도하는 교수들 심정에 '초등교육 교단인 양성'을 강조하는 신규 취임 학장 주장이 탐탁할리 없었다. ( 상황들이었다.)
이러한 우리나라 사대 교대의 문제점은 문교부에서 이미 겪어본 바 있는 일이었다. 당시 이규호 장관의 새 교원양성대학 설립 정책의 발상 의도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서울대 사범대학을 필두로 모든 사대가 중등교원 양성이라는 목적대학 노선을 등한시하고 문리대 지향성을 가지게 된 방향성을 통탄하고, 교원양성과 현직교원 재교육을 지향하는 목적대학을 이루기 위해 「한국교원대학교」를 신설한 바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서울교대에서 내가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러한 교수 학생들은 소수였지만 새 학장의 우수한 초등교원 양성을 위한 목적대학론에 정면 대립하는 세력으로 나타났고, (위치함은 이미 정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굴할 수 없었다.
사실 교육 선진국인 미국에선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박사 학위 가진 권위있는 선생님이 많다. 유아와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교수회의를 자주 열어 교육대학 목적대학론과 협조를 요청하였고 「나는 훌륭한 초단 교단인이 된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학생 집회가 있을 때에는 학부형 회의에서도 이러한 교대교육 지향점을 강조하였다. 신입생 사전교육제도를 새 플랜으로 3일간으로 늘려 짜고 초등교원 긍지론과 목적대학론을 강조해 나갔다.
한 1년의 시간이 흘러 쇄신되어가는 분위기도 감지되었다. 학생들도 자신감과 자긍심을 회복해 가는 것이 느껴지고 교수들도 대부분 변모하여(는 모습도) 즐거운 분위기로의 전환도 보였다.
희망적이었다. 서울교대에 부임한 지 열흘 후에 전국 교육대학 학장협의회가 열려 거기에서 내가 그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된 바 있었는데 그 후 간혹 열린 전국교대 학장회의에서 「교육대학의 초등교사 양성 목적론」을 펴고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이 전국적 확대를 기대한 조치였다.
그 밖에 서울교대 개교 39주년 기념행사를 크게 열고, 3·4학년에 야간제 계절제 학생모집으로 현직 교원의 학력보충을 도모하고, 학생회관 신축 개관과 교내에 지하수 개발, 수영장 착공, 제2기숙사 신축 등을 추진하였다. 평생교육과 국악교육 도입도 시작하였다.
마침 서울사범 서울교대 창립 40주년을 맞아 교수들의 협조를 받아 「서울교대 40년사」도 편찬 발행하였다. 서울사범 이래 처음의 역사기록사업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처음으로 「한국초등교육(욱)학회」를 설립하고 서울교대를 중심으로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초대회장(1986.12.30.)에 선출되어 활동을 개시해 나갔다.
다만 섭섭한 것은 교육대학 4년제 승격을 대통령께 건의하고 그것이 포함된 7.30 교육개혁을 만들고 추진한 이 사람의 「초등교육 사랑, 교육대학 사랑」에 (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었다.그런데) 수난의 계절이 들이닥친 것이다(쳤다.)
서울교대 학장 부임 3년차였다. 6월 항쟁이 일어난다. 그해(1987) 초부터 소요가 일어 6월 한 달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6월 10일부터 29일까지는 격심하였다. 박종철 고문 사건 이한열 최류탄 사망 등의 여파로 서울교대도 데모에 휩싸였다. 학내 동요에 학생지도를 강화했다. 학생처장과 지도 담당자의 고생은 우심하였다. 그러나 지도 결과가 미흡하더라도 퇴학처분은 가능한 한 자제하고 지도에 지도를 강화해나갔다. 어떤 학생은 “나는 혁명의 길로 나가겠다”면서 자진 퇴학한 경우도 있었다. 학생처와 교수들의 고생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학장 스스로도 운동권 학생을 가정 방문하여 타이른 적도 있었다. 끝까지 지도 중심 방침을 고수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 때 일부 교수들의 자세는 매우 섭섭한 바 있었다. 운동권 학생 주동으로 강당에 모인 전교생을 해산시키기 위해 학생처가 노력하여 학생들을 밖으로 유인하고 닫아버린 강당 문을 다시 입실하려는 운동권 학생과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어느 한 교수가 자기 물건 찾으러 가겠으니 문을 열라 하는 바람에 문이 열리고 그 틈에 전학생이 다 강당농성을 재개하게 한 그 교수, 참 원망스럽기도 하다.
이 때 그는 5천년래의 가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경제입국의 기치를 내세운 박정희 대통령 영도하에 이룬 한강의 기적은 아무 소용없었다. 그 후에 밝혀진 바 있지만, 소위 그들이 사랑한 것은 구호로 그친 민주주의 문민주의였다. 그러나 그걸 구호로 내세운 정권들은 말잔치는 근사했지만 결국 IMF로 이 나라를 파경에 처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는 운동권 학생들 인끼만 중요했을 것이다. 역사를 읽는 안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운동권에 모이고 그들이 사상을 가진 것처럼 활보하는 것이 그 당시 유행이었지만 이 나라를 후퇴시킨 흐름이다.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나의 국보위 전력과 문교부 차관 전력을 모두 군사정권 협력자로 규정짓고 학장 퇴출 시위를 강화하였다. 그 뒤에 일부 교수가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나의 이 전력은 그들의 학내 투쟁 특급자료로 활용되고 각종 유언비어도 만들어내며 올바른 교수들과 학생처의 지도도 불가능하기에 이르렀다.
교육대학 4년제 성취나 초등교육 진흥에의 열정과 공적은 도리어 적으로 간주되고 만다. 원망스럽고 몹시 섭섭하였다. 교육대학에 애정을 갖고 열성을 다한 내가 도리어 교육대학생의 적이 되다니… 마침내 나는 억울한 사표를 내고 물러나오고 말았다. (적반하장 그것이었다.) 교대를 너무 사랑했기에 떠나야 했다는 건 유행가 가사 같았다. (너무 실망스러웠다. 상대를 진실로)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수 없어...., 사랑하다가 배신으로 실연당한 심정이었다.
소위 민주화 운동 속에도 많은 비리가 숨어있다. 어느 여학생 하나가 목을 매고 죽은 적 있다.(었다고 들려왔다.) 광주 출신의 재학생이었는데 학생처에서 알아보니 문제 서적을 읽고 있어 학생처에서 한번 지도 받은 바 있었을 뿐인 학생이었다. 경찰에 그 사인을 알아보니 타 대학 남학생과 연애 중에 중도거절당해 죽었다는 회답을 들었다 한다. 그 어머니가 학장실에 찾아와 학교 당국의 지나친 학생지도로 인해 죽었다며 불평 항의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전해진 바에 의하면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되어 5.18묘지에 안장되고 보상금도 받는다고 하였다.
광주사태는 1980년에 일어났고 그 학생은 7년 뒤의 1987년에 자살하였는데 어떻게 그 두 가지 사건이 연결되었는지 지금까지도 이해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어머니가 학교와 학장실을 1987년에 찾아와 분탕질한 그 사건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의아(하고 억울)하기만 하다.
내가 교육대학을 떠난 두 달 뒤에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국교직원 노동조합 전신)이 발족하였다. 우리 학교 졸업생들은 이 단체와 관련 없이 교육에 전신전력을 쏟고 있을까. 전국의 교육대학은 그 설립 목적대로 가고 있는가? 학생들의 사기는 올라가고 초등 교단인이 되겠다는 기본은 구축되어가고 있는가? 교대 교수님들은 교육대학의 설립목적을 재인식하고 교대 교수다운 자세 전환은 되어졌는지? 그 곳에 몸 담았던 인연이라 지금도 궁금하고 조바심이 남아있다.
간난의 그 시절에 함께 고생한 여러 교수님들이 있지만 그 중 세 분은 오랜 만남을 유지하고 있고 부부동반으로 여행도 다니면서 친목을 이어오고 있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학생 대표 한 무리도 때때로 만나고 모임을 유지해 오다가 근래에는 업무에 쫓겨 느슨해지고 있다. 모두의 행운을 기원한다.
이 부분은 연구논문 광복3년 한국교육법제사 원고들 밑에 들어가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36. 대한민국 학술상, 받을 뻔
(학술원 회원, 될 뻔)
학문하는 사람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상이 ‘대한민국 학술원상’이며, 예술 하는 사람이 가장 받고 싶어 하는 상이 ‘대한민국 예술원상’이다. 그리하여 종신 ‘학술원 회원’ 또는 ‘예술원 회원’으로서 여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에 학술원(워)과 예술원이란 기구가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그 심사 대상에 올라 예심에 통과했으나 최종본심에서 낙방한 바 있었다. 다 지나고 난 다음에 그 아쉬운 소식을 듣게 된다. 내가 문교부에 수습행정관으로 첫 출근한 1961년 당시에 문교부 차관으로 계셔서 첫 인연을 맺은 바 있는 서명원(徐明源) 학술원 회원으로부터 결과통보를 받은 것이다.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내가 정 총장을 학술원상 후보로 추천하여 심사에 들어갔는데, 결과적으로 아쉽게 낙방되고 말아 애석하다. 서울대 한전숙 신용하 두 교수가 천거되었다”는 전화였다. 그러면서 “학술원상을 받으면 학술원 회원이 되어 나와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도 하셨다. 사실 웬만한 학자로서는 심사는커녕 추천에 오르는 일만으로도 영광스러운 대사건이 아니던가. 나는 깜짝 놀라 희비쌍곡을 왕복하다가 감사에 겹감사 인사를 드리고 간신히 평상심으로 돌아온 기억이 난다.
서명원 선생은 서울대 교수·부총장, 문교부 사무차관, 숙명여대·충남대·경원대 총장, 문교부장관을 거친 분으로 학술원 회원 당시에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뒤에 알아보니 서 장관께서 나를 1998. 1. 16일에 추천서를 제출함으로서 인문·사회과학부에는 총 11명이 접수되었었다. 나는 그 제1분과 3몀 중에 포함되었고 예비심사에서 11명 중 나를 포함한 6명이 선정되어 본심에 올라갔었다.
이때에 추천된 주저서는 「광복3년 한국교육법제사(1995.12.10., 예지각. 573PP)였고 관련저서는 「미군정기 교육사자료집(상·하)」로 각 1521PP, 490PP의 방대한 자료집이었다. 이 자료와 주저서는 사실 우리나라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기 교육법제사 연구서로서는 처음으로 출간된 유일한 저작들이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그 자료집은 내가 문교부에 근무할 당시에 주미대사관에 근무하시던 김영춘 장학관에게 부탁하여 그분께서 워싱턴국립도서관에 수차 방문하여 미군정기의 주한미군 관계자료를 섭렵하여 보내준 희귀한 자료 두 권을 1995년에 출판하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3년에 걸쳐 연구분석한(안) 뒤에 본 저서를 출판한 것이었다. 이 집대성은 사실 우리나라 유일의 출판물이라 감히 자부하고자 한다. 지금까지도 유사한 경쟁도서는 없는 형편이기도 하기에 나로서도 화룡점청(畵龍點晴)이라 생각하고 있다. 김 장학관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대학자이신 서명원 장관으로서 예사로 천거하셨겠는가도 여겨진다.
그리하여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본심 즉, 종합심사위원회(4.8~6.5)에서 3차에 걸친 심의 결과, 그해 6월 5일에 2명으로 최종 축소 선정되었는데 이때에 나는 탈락하였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억울하기도 하거니와 학술원 회원 합격이 얼마나 큰 고개인지를 실감하는 큰 사건이었기에 그 당시 학술원의 이현목 과장에게 부탁하여 그 경위와 자료를 얻어 비망록으로 여기 남긴다.
예비심사 통과자로 본 심사에 오른 대상자는 다음 6명이었다.
제1분과; 서울대 한전숙 명예교수(철학, 저서, 현상학)
대진대 정태수 총장(교육학, 광복3년 한국교육법제사 외 1편)
제2분과; 인하대 최인학 교수(문학, 저서, 한국 민담의 유형 연구)
제주대 정대연 교수(사회학, 저서, 사회과학 방법론 사전)
제3분과; 서울대 신용하 교수(문학, 조선후기 실학파의 사외사상 연구)
국민대 최태호 교수(국제학, 저서, 근대 한국경제사 연구 서설)
이 6명이 추천되어 심사한 결과, 한전숙 교수와 신용하 교수 두 분이 최종 선정되고, 그 밖에 따로 자연과학분야에서는 3명이 선정되었었다. 나는 비록 탈락은 하였으나 예비심사 합격 뿐 아니라 추천 자체만으로도 학문적 인정을 받은 것이어서 섭섭하면서도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어떻든 이 일은 옛 한림학사(翰林學士)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된 것만큼이나 가문의 영광이 될 뻔한 대사건이었다. 참고로 중앙대 정재철 교수와 연세대 김인회 교수의 서평(書評)과 서명원 총장의 추천서를 기념으로 남기고자 여기 첨가하기로 한다.
이 글도 주요논문 밑에 넣으시면 좋겠습니다. 태수 저, 「광복3년, 한국교육법제사」에 대한 서평
정재철 (중앙대 교수)
이 책은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사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에서, 미군정이 오늘의 한국교육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여러 교육법제의 틀을 어떻게 짰는가에 대해서 많은 그리고 희귀한 원자료를 활용하여, 아주 세치(細緻)하게 연구·서술한 것이다. 그동안 이 시기의 교육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부진, 태무했던 바 정 박사의 이 『한국교육법제사』가 나옴으로써 쌓여 온 연구 부진이 한꺼번에 씻겨졌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장차 이 시기를 연구할 후학들의 길잡이가 될 결장정의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
신국판 573쪽, 총 6개장, 26개절, 부록으로 구성된 이 책은 미국정기에 새 제도 도입을 주도한 세력, 교육이념, 교육내용, 단선형 학제, 의무교육, 교육자치제. 중앙교육행정과 지방교육행정, 초등·중등·대학 등 각급 학교별의 법제, 사립학교법제, 한미 간의 교육협력, 미국유학, 현장교육 등 교육법제의 성립과정 전반을 총망라하여 역사적 실증주의의 입장에서 면밀하게 해명했다.
그간 저자는 이 분야에 관한 연구를 정력적·집중적으로 천착해 왔다. 그 결과로 1958년부터 1996년 사이에 「韓國敎育法の成立過程に關する 硏究-敎育權の認識と保障の觀點から-」(1985.9.1., 日本 筑波大學 敎育學博士論文) 『미군정기한국교육사자료집(상)·(하) 1945~1948』(1992.12, 편저), 『광복3년 한국교육법제사』(1995.12), 『한국교육기본법제성립사』(1996.1) 등의 노작 역저를 속속 출간했다. 이 『한국교육법제사』는 위에 쓴 저자의 박사학위 청구논문을 더욱 확대 심화시켜 그 전반부를 엮은 것이며, 『힌국교육기본법제성립사』는 그 후반부를 상재한 것이며, 노다공소(勞多功少)한 『미군정기한국교육사자료집(상)·(하)』는 매우 입수하기 어려운 희귀한 국내외의 자료들을 힘들여 모은 이 시기 연구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서 이 책을 저술하는데 기초가 된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자료 부족으로 본격적인 연구가 부진했던 이 시기의 연구를 극복하고 연구를 궤도에 올려놓은 점이다. 저자는 이 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회의록·속기록·답신서·연감·일지 등의 탐색은 물론, 신문·잡지 등을 참고했고, 당시의 자원 인사들을 면접하여 자료를 발굴하는 등,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리하여 다수의 새로운 자료를 찾아내어 종래 불분명했던 점을 밝혔다.
책의 내용 중 세치하고 특이한 몇몇 예를 보면 아래와 같다. 미군정기의 「교육법제를 주도한 세력」을 논함에 있어, 저자는 미군의 진주 이전에 이미 오천석(吳天錫)을 비롯한 미국유학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3단계에 걸쳐 회합을 갖고 장차의 한국교육을 논의했고, 미군진주 직후 미 군정청의 교육국장 라카드와 오천석의 협의에 따라 한국인 7명으로 구성된 ‘교육위원회’가 발족되었으며, 이후 한국교육계의 대표적인 한국인 인사 70여명과 10개 분과위원회에 1명씩 배치괸 10명의 미군 장교 그리고 2명이 미국인 자문위원으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주동이 되어 광복 후의 한국교육을 정초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광복 후의 한국교육에 대해서 저자는 “자주성 결여론과 미국강요론을 매개로 하여 미국 식민지 교육 체제화과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그와 같이 단정하는 것은 적어도 교육정책 분야에 있어서는 부당하다고 보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논리와 불가피성 그리고 미국식 학제 내지 교육제도의 근대성 민주성·우수성·보편성 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미국화를 표방하는 미국식 식민정책이 교육을 가장 중시하고, 따라서 미국식 학교제도의 이식을 통해서 미국화된 주민을 길러, 궁극적으로는 미국시장의 확대를 꾀한다는 미국식 식민지주의의 특성만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저자가 당시의 상황 하나하나를 얼마나 치밀하게 검색, 고증했는가에 관해서 미군이 진주하기 전 3단계 회합 가운데 제2단계의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미군진주가 확실해진 1945년 8월 하순 어느 날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어느 집…에서 몇 사람의 교육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이 모임을 스스로 천연동회의(天然洞會議)라고 불렀고…” 라고 하고 있는 바, 이 모임을 1947년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나바(稻葉繼雄)는 그의 글에서 그 모임을 교육간담회라고 이름 지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부분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동 회의에 참여했던 오천석을 1984년 5월 25일에 면담하여 ”그 당시부터 참석자들은 자연스럽게 천연동회의라고 불렀다“라는 오천석 박사와의 담화내용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그 모임을 「천연동회의」라고 그의 논문에서 수정하여 학계에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민족교육이념의 정형화」에서, 저자는 1945년 12월 20일 오후 2시의 ‘조선교육심의회’ 전체 본회의에서 확정된 홍익인간이라는 교육이념을 동 제1분과위원회에서 누가 처음으로 제의했는가에 관해서 이인기·오천석·고황경 등 심의위원들과의 면담 안재홍·백낙준·정인보·백남운 등 심의위원들의 사상적·문화적 배경, 신문기사 등을 소상하게 검색하여 밝힌 다음, 정인보시창설(鄭寅普始唱說)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또한 「교육자치 3법의 초안자에 대한 추구」에서 저자는 이 법을 구상한 사람과 직접 기초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3개의 연구논문, 주일연합국군 총사령부 전화번호부, 재미 미군정기 문서 들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종래의 암스트롱, Amstron, Amstroug, H.C.Armstrong' 등의 보고를 수정하여 Hugert C.Armstrong으로 확정지었으나, Hugert C.Armstrong의 이력이나 그가 법령을 기초하는데 동원했던 자료 등에 관한 기록을 찾지 못해서 유감이라는 것이다. 이상은 미시적 접근의 몇몇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세계질서 속에서의 광복3년 교육개혁의 성격과 위치, 일제의 민족교육권의 박탈과 억압 법제, 광복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법제와 광복 후의 교육현장 등을 논하면서 이 시기의 교육을 거시적으로 접근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미군정기의 한국의 교육 실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데 매우 유익하고 견실한 연구서적이라고 하겠다.
----사단법인 天園기념회 『천원기념회소식』(2), 1998.9.15., p,10~11
이 글도 저서 밑에 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정태수 저, 「미 군정기 한국교육사자료집 (1945~1948)」에 대한 서평
김 인 회 (연세대 교수)
오늘의 한국 교육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저간의 우리 학자들은 과연 미 군정기의 교육을 얼마나 철저하게 연구해 왔던가하는 물음 앞에 서게 되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의 미군정기 교육 연구는 교과서 수준에서이건 석·박사 학위논문에서건 피상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의 연대사적 서술과 상식적인 여론의 정리 이상의 수준으로 깊이 파고드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연구자들의 주류가 바로 미 군정기의 교육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경력을 지닌 이른바 역사의 주역 세대들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이런 경우의 연구물들은 그 자체로서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할 고전으로서 자료적 가치를 더해가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와중에 몰입되어 있던 연구자의 주관적 시각과 사관의 한계 또한 시간의 진행과 더불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둘째는 미군정기 교육과 관련되는 모든 공식 문서와 일차 사료들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미 군정청에서 통용된 모든 내부 문서를 비롯한 교육관련 일차 자료를 학자들이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은 미국의 ‘정보자유법’이 개정·공포된 1975년 이후 부터다. 그 이전까지 국내와 학자들은 미 군정시대와 관련된 문서 중 간접적으로 공개된 극히 제한된 범위의 단편적 자료 밖에는 접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국내 학계에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미군정 관계 1차 자료를 입수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86년 여름에 ‘미군정 정보 보고서’가 영인되어 나왔다. 그리고 1990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길상 교수가 수집해 온 ‘미군정 활동 보고서’가 영인되어 나왔고, 뒤이어 1992년 3월에는 이 교수가 편집한 ‘해방 전·후사 자료집’이 미군정 준비 자료 편과 미군정 교육 정책 편으로 나뉘어 두 권으로 나왔다. 한정된 부수를 찍어 몇몇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나눠 가질 수 있었던 이 보배스럽고 비밀스런 자료집들은 거의가 원문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미군정 관계 연구를 전공하는 전문가들에게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 자료들임에 틀림없지만, 현실적으로 영인 출판된 사료의 원문을 자유자재로 독파하고 이용할 수 있는 소수의 전문가들 수준으로 독자의 범위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1992년 10월에 정태수 박사가 편저한 「미 군정기 한국교육사 자료집」 상·하권이 홍지원에서 정식으로 출판된 것이다.
이 자료집은 그 속에 담겨있는 자료의 종류와 그 내용의 사료적 가치 및 책의 편집 체제만으로도 편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문자 그대로 ‘환상의 교육사 자료’라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이 미 군정기 교육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대학원생 및 학부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자들에게 ‘환상의 문서’로서 ‘꿈같은 자료의 구실’을 톡톡히 하게 될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확신하게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선, 이 자료집만이 지니는 훌륭한 가치로 첫 손가락을 꼽지 않을 수 없는 특징은 바로 이 책에 실려 있는 모든 영문 자료들이 번역문과 원문의 대역 형식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편저자의 말처럼 원문을 영인 출판 했더라면 80년대 말경에도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5년이나 걸린 정리와 번역의 과정을 거쳐 한영 대역 체제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 자료집은 앞으로 엄청난 학문적 기여를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이 책의 내용상의 특징과 사료적 가치다. 이 책의 내용은 제1편 미 군정청 내부의 교육정책 문서, 제2편 미 군정기 교육정책 월례보고 문서, 제3편 고르돈 바울즈 문서, 제4편 계성학교 문서, 제5편 1946년도 문교 행정 개황 등의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편마다 첫머리에는 그 사료의 출처와 구득 경위 및 자료의 가치를 설명하는 편저자의 해제가 실려 있다. 이 책 제1편과 제2편의 자료들 중에는 기왕에 출간된 자료집들의 내용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제3편 부터는 이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귀 사료들이다. 제3편의 내용은 1946년 당시 일본과 한국의 상황을 직접 관찰·비교할 수 있었던 전문가로부터 편저자가 직접 제공받은 자료들이다. 제4편은 미 군정기 때 일선 학교에 배포된 공문 서류로서는 국내 유일의 자료다. 제 5편은 1947년 1월 1일자로 미 군정청 문교부에서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육 백서인 동시에 공식 기록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 실린 자료들을 만날 때 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희열을 느꼈다고 편저자는 고백했지만, 그의 그러한 체험은 이 책이 출간됨으로 해서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 체험될 것이 틀림없다. 열정을 가지고 우리 교육을 연구하는 일에 헌신코자 한다면 그가 누구이건 이 자료집의 목차만 보고서도 온몸으로 전율과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귀한 자료일수록 공개하기를 꺼려했던 지난날 학계의 폐쇄적 권위주의의 풍토를 생각할 때에 편저자가 이렇게 소중하고 귀한 자료를 공개한 사실에 대해 뭐라 고마운 말을 찾을 길이 없다. 놀랍고 감탄스러울 뿐이다. 드물게 활달한 인품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달인의 경지에 이른 전문가일지라도 금강석의 원석 같고 노다지 광맥 같은 이 자료집을 그리도 친절·자상하게 정리·편집하고 게다가 번역까지 하여 출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료집이 출간됨으로서 한국교육사 연구 분야에는 하나의 큰 획이 그어진 셈이다.
'정총장님 자서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나무를 읊는다 (0) | 2017.08.26 |
---|---|
마지막 부록 부분에 대한 의견 (0) | 2017.01.03 |
마지막 부록 (0) | 2017.01.03 |
저서전 31-35(158페이지) (0) | 2016.12.17 |
자서전 26-30번 (0) | 2016.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