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원일의 노래

김현거사 2016. 11. 20. 21:05

   원일의 노래 


  사람은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와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누군가와 헤어지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평생 잊지못할 사람도 있다. 최근에 나는 가락동성당에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 장례식 문상객 명단에서 최옥녀란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옥녀란 이름을 본 순간 50년 전에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갔다. 

 그는 자살한 내 친구 여동생이다. 나는 문학을 동경하던 철수가 자살하자, 세상을 살아갈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사하라 주둔 프랑스 외인부대처럼 살벌하여 거기서 목슴 끊을만한 곳이 어디 일까. 나는 그런 곳을 찾아 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부산에서 가장 기압이 심한 한 수송자동차대대에서 자살에 실패하자 2년간 남해와 욕지도 같은 섬을 헤매다녔다. 나는 수도원 신부처럼 사회와 단절된 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거나 신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보려 했다. 파도 소리 들려오는 밤에 혼자 촛불을 켜놓고 성경을 읽다가 흐느껴 울기도 하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기 위해 술을 먹고 절벽 중간에서 잠들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 추구도, 자살도 실패하자,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가장 심오한 사상이라 믿었던 실존주의는 종이쪽지처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그건 말만 현학적이지 실제 상황에선 아무런 해결책을 못주는 허접쓰레기 였다. 대신 노장과 불교철학에 매달려 보았다. 거기를 생의 마지막 목적지라 생각하여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 그야말로 목슴을 걸고 매달려 보았다. 그 후 불교신문 기자 되었고, 경제신문 기자 되었고, 재벌 회장 비서로 들어가서 자서전 써주고 밥벌이 하는 사람 되었다. 마지막에 대학 겸임교수와 수필가 되었으니, 직업이 기자, 자서전 작가, 교수, 수필가인 셈이다.

 나는 철수 자살 이후 별난 인생을 살았다. 자살할려고 군에 입대했고, 자살할려고 섬으로 돌아다녔다. 서울로 와서 불교와 도교에 심취했고, 평생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았다. 옥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송파에 혼자 산다고 한다. 아직도 그는 자살한 오빠의 친구를 원망하고 있을지 모른다. 철학한다고 실존주의니 뭐니 하면서 써보낸 내 편지가 철수 자살의  원인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간 사람은 간 사람이지만,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1960년대에 최무룡이 부른 '원일의 노래'라는 유행가가 있다.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순정을 옥녀야 잊을소냐 헤어질 운명. 차거운 밤하늘에 웃음을 팔더라도 이제는 모두 잊고 내 품에 잠들어라.' 노래 가사처럼 옥녀하고 나는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 걸면서 약속한 적 없고, 옥녀가 차거운 밤하늘에 웃음을 파는 그런 여자도 아니다. 

 군인이었을 때 나는 옥녀를 찾아 서면 로타리 뒷골목으로 간 적 있다. 거기 옥녀는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 철수 어머님은 그때도  미남에다 공부 잘 하고 운동 잘 하여 배건너 사람 모두 부러워하던 아들을 잃은 이유를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철수 대신 옥녀 오빠가 되겠다고 말하려고 갔지만, 그날 그 집을 눈물 바다로 만들어놓고 왔다. 오빠 닮아 얼굴 해맑고 갸름한 미인이던 옥녀와 많은 이야길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섰다. 

 이제 옥녀는 칠십 노인이다. 그에게 오래 전에 죽은 오빠 친구의 해명은 이젠 필요없을지 모른다. 새삼 '원일의 노래' 비슷한 걸 부르면서 옥녀 앞에 나타나는 건 부자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옥녀에게 못다한 이야기가 있다. 내 젊은 날의 자서전 같은 청춘 고백을 이미 써놓았다. 인연이 닿는다면 이 글을 옥녀에게 보내고 싶다.



  

 나는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철수 사망. 급히 하진 바람.' 경택이가 보낸 그 전보 한 통이 내 인생을 통채로 바뀌어버렸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 있다. 철수 죽음이 내게 그런 것이었다. 그와 나는 '배건너 삼총사'로 불리던 단짝 친구다. 법대 진학한 경택이는 달랐지만, 철수와 나는 문학을 좋아했다. 그래 나는 철학과엘 들어갔고, 철수는 재수생으로 진주에 남았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 날 철길을 혼자 걸어가 주약동 터널에서 열차에 투신 했다. 자살 이유가 다분히 나와 관련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철학교수들한테 직접 강의를 듣자 신이나서, 편지마다 키엘케골의 '생의 무의미한 의지', 쇼펜하우엘의 '자살예찬론', 니체의 '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무슨 성경 구절처럼 나풀거렸다. 그러자 철수도 지지않고 염세주의 글을 보내다가 선수 치듯 먼저 자살한 것이다.

 사춘기 갓 넘은 청년들 철 없는 불작난인 것이다. 사실 그때 우리 두 사람은 가정도 학교도 전혀 심각할 일 없었다. 그런데 우린 남에게 심각하게 보일려고 했고, 염세주의자로 보이고 싶었다. 사건 발단의 이유는 단지 그 때문이다.

  경택이 편지 받자 나는 즉각 기차를 타고 진주로 내려갔다. 그때가 마침 중간 시험 기간이었다. 나는 학교 시험 같은 건 속물들이나 신경 쓸 일이라 생각했다. 삼랑진에서 기차 갈아타고 진주역에 내리니, 마치 보리 익는 철이라 사람들이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 전체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친구를 잃어버린 그 순간에도 너무나 평화로웠다. 세상은 나하고는 전혀 다른 질서로 움직이고 있었다. 상가에서는 죽은 아들과 불순한 편지 주고받은 친구는 상주가 보면 않된다고 했다. 먼 발치에서 하얀 상복 입은 철수 어머님과 머리에 십자 모양의 하얀 꽃을 단 옥녀 모습이 너무나 청초하다는 생각하면서 쫒겨났다.

 경택이가 말해주었다. 자살한 총각은 무덤을 만들지 않아 철수는 화장했고, 재는 남강에 뿌렸는데, 그 중에서 뼛조각 몇 개 골라, 우리가 여름에 따이빙하고 놀던 '메기통'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소나무 가지에 끼워놓았다고 한다. 거기 가서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밭 샛노란 원추리꽃처럼 한 청춘의 끝이  흔들리고 있는 걸 보았다. 지금 생각나는 건 그것 뿐이다. 

 

 군 입대


 그날 이후 나는 자학(自虐)의 길로 걸어갔다. 우선 학교를 무단 중퇴하고 군에 입대했다. 나는 '햇볕이 눈 부셔 살인 했다'는 까뮈의 소설 '이방인' 주인공처럼 되고 싶었다. 

 까뮈의 <이방인>이란 소설을 보면, 주인공 뫼르소는 어느 날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을 받고 시골의 초라한 수녀원에 가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는 어머니를 본다. 장례식을 마치고 뫼르소는 애인 마리아와 함께 해수욕장에서 사랑은 나누고 저녁에는 영화를 본다. 그리고 아파트 이웃 사람이 졸라대는 바람에 그와 친구가 되고, 그 친구와 반목하고 있는 아랍인과 마주쳐 대치하다가 대낮의 사정없이 내려쪼이는 햇볕 때문에 눈이 아물거려서, 아랍인이 칼을 뽑자 건네준 권총으로 아랍인을 사살한다. 이 우발 사고의 재판은 살인이 계획적인 것인지 아니지에 따라서 유죄 무죄로 갈라진다. 뫼르소는 자기의 행동과 검사가 재구성한 범죄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생각한다. 방관자 같은 모습으로 배심원이 사형이라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어 사형선고를 내리자, 뫼르소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처한 부조리를 생각하며, '내가 사형 집행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씨니컬한 생각을 한다. 나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까뮈의 <이방인> 주인공이 보여준 실존의 의미를 믿었다. 인생의 본질은 부조리며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 세계에서 명확한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세계의 침묵 앞에 번번히 좌절 당한다. 때문에 우리는 과연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 빠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구절도 절절이 믿었다. 22세 청년으로서는 노벨상 수상작가의 사상은 판단의 대상 아니었다. 무조건 믿고 존경할 대상이었다.


 나는 훈련소에서 의무병과가 나온 걸  일부러 기관병에게 부탁하여 수송으로 기루까이 했다. 해운대에서 9주간 운전교육 받은 후  제3 항만사령부 229 수송자동차대대 운전병 되었다. 229대대는 운전교육대 운전병들 사이에서 '지옥 대대'로 알려진 곳이다. 나는 사하라 주둔 프랑스 외인부대 같은 냉혹한 곳을 동경했다. 인생을 철저히 절망하다가 자살하고 싶었다. 

 229자동차 대대는 군함이 3부두에 싣고온 군수물자를 기지창에 날라주는 부대다. 기지창 마다 철조망 밖에 전문 '도꾸따이'가 진 치고 있었다. 척하면 삼척이다. 물건을 철조망 밖으로 넘기면 고무줄로 묶은 돈뭉치가 운전석 창문에 날라온다. 요령 많은 운전병은 고향에 논을 산 경우도 있다. 그 중 탱크 베어링과 자동차 부품이 값나가는 물건이다. 베어링은 철사로 묶어 연료통 안에 숨겨서  돌아와 철사 당기면 베어링이 달려나온다. GMC 인젝션펌프는 덩치 큰 물건이다. 한번은 양풍길 병장이 인잭션펌프 신품에 까만 구리스를 칠해 중고처럼 만들어 엔진에 달고 나왔다. 초소 헌병이 본넷트 열고 그걸 보고 '이게 뭐냐'고 묻자, 양병장이 세상 무식한 놈 첨 본다는 식으로, '헌병이 그것도 모르냐? 노후 차량은 인젝션펌프 두개 달아야 된다'고 공갈치고 달고나온 적 있다.  나는 대학 물 먹었다고 부두에서 운전병이 '도꾸따이' 할 물건 고를 때 품목 해석해주고 번역료 챙겼다. 내무반 고참들은 그날 부산 진해 등 어느 기지창에 갔다면 무슨 물건 날랐는지, 선적 서류 안보고 훤히 알았다. 휘발유 경유 등 기름과 목재는 떡값 정도 나오는 것이라 대충 넘기지만, 병기창 물건 수송한 날 밤에는 작전 다녀온 운전병 엉덩이에 불이 붙었다. 빳다는 도깨비 방망이다. 치면 칠수록 돈이 나온다. 빳다 대신에 고무호스 애용하는 고참도 있었다. 침대마후라는 소신껒 후려치면 부러진다. 그러나 물 적신 고무호스는 낭창낭창 부러지는 법 없다. 아무리 쳐도 뼈 상할 일 없고, 살속 깊이 파고들어 더 효과적이다.

 밤에 3부두 작전나가면 영도에서 '뗀마' 타고 건너오는 여인들이 있었다. 군수품 싣고오는 미국 선적의 배는 항해일지가 있다. 몇 달 항로 다니려면 날짜 지난 음식은 부두에 버리고 간다. 군용 레이션과 캔에 담긴 닭고기들이 집채만한 3부두 쓰레기통에 산처럼 쌓인다. 모두 우리에게 최상의 음식이다. 그걸 얻으러 온 것이다. 간혹 군용 옷감, 자동차 부품 같은 고급 군수품 가져갈려면 자기가 저어온 작은 배 위에서 육체를 제공한다. 달빛 아래 배 위에서 벌이는 짚씨여인의 행위 보면서 나는 혼자,

'죄 많은 이 가슴에 멍을 들이고, 추억은 안개처럼 사라져 갔네. 뒷골목 그늘에서 눈물 지우며 내일 없이 살아가는 여인이지만, 태양이여 나에게 빛을 주소서.' 당시 유행하던 '검은 머리'란 노랠 부르곤 했다.  

 운전병들로 구성된 자동차 대대 내무반엔 벼라별 인종 다 있다. 영도 밀수업자도 있고, 인천 부두 깡패도 있다. 남한산성이나 부산 15P 감방에서 별 단 전과자도 서열이 있다. 간혹 그들끼리 싸움 벌어진다. 실탄 장진한 칼빈으로 총질하며 내무반 안팎 이리저리 쫒고 쫒기며 쏘다니면 서부영화 장면 같다. 그때 불쌍한 졸개들은 관물함에 얼굴 쳐박고 엎드려 있다. 나는 이 '지옥대대'가 맘에 들었다. 거기가 생을 마감할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세상 일 항상 뜻대로 되질 않는다. 우리는 탄약과 실탄을 지금 해운대 신시가지가 된 장산 밑 탄약 창고에 날랐는데, 마침 수영 부두에서 탄약 하역잡업 할때 나는 칼빈 실탄 이십 여발을 빼돌려 내가 몰던 GMC 호르 속에 감춰두었다. 자살할 때 쓸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걸 ROTC 소대장 홍소위가 발견한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차량점검 하던 홍소위가 이걸 발견하자 전 중대에 비상이 걸렸다. 사병이 실탄 빼돌린 일은 군에서 큰 사건이다. 

 홍소위는 일단 일요일 밤에 내가 귀대하자 밀실로 데려갔다.

'왜 실탄을 빼돌렸느냐?'

'저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 필요할 때 쓸려고 그랬습니다.'

홍소위는 K대 내 선배다. 나는 자동차 대대 유일의 대학생 운전병이다. 

'실탄은 어디서 구했나?'

'수영 부두에서 구했습니다.'

 그때 나는 대학 선배 잘 만났다. 홍소위가 K대 선배 아니었다면, 당장 영창에 갇혔거나 '불명예 제대'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선배는 선배였다. 그가 전방에서 사고 친 후 남한산성에서 벽돌 굽다가 후방으로 모인 사고자들 모아놓고,

'김일병이 내 대학 후배다. 소대장인 내 얼굴 봐서 생각해달라.' 

 한마디 하는 바람에 나는 제대할 때까지 완전 내무반 '열외'로 지냈다. 한번도 완전군장하고 영점 5초 내로 연병장에 집합한 적 없고, 내무반 침상에 두다리 걸치고 철모에 맨대가리 박는 원산폭격 해본 적 없다. 

 그런데 행운은 항상 쌍으로 온다. 어느 토요일 오후다. 모두 관물함에 모셔둔 A급 피복 갈아입고 외출준비 하는데, 김대지 병장만 쌓아놓은 매트리스 위에 쓸쓸히 누워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해방 후 일본서 여동생과 귀국해서 사회 밑바닥에 살다가 여동생을 수녀원에 맡기고 홀홀단신 입대했다. 군에서는 사고 치는 바람에 남한산성 군형무소에 들어가 총감방장까지 했지만, 그 세월에 여동생이 어느 수녀원 흘러갔는지 소식도 모른다. 사고자 중 왕초라 내무반의 왕이지만, 외출해서 갈 곳이 없다. 마침 그날 나도 외출증이 없어서, 

'김병장님! 제가 PX에서 막걸리 한 잔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김병장에게 말을 걸었더니,

'뭐? 네가 막걸리 산다고?'

 벌떡 일어나 내 손목부터 잡는다. 술이 들어가자 그는 우리 중대원 모두 알고있는 자기 신세타령 반복했다. 일본서 귀환선 타고 온 이야기, 수녀원 여동생 이야기, 이북 출신 대대장 차 운전하다가 봉급을 떼먹고 탈영한 이야기.


 3병원 병원장 운전수로 보내졌다가 김병장 데려가라고 하소하는 바람에 도로 친정 복귀한 이야길 했다. 지루한 이야기 다 듣자, 

 '나는 사회 밑바닥 인생이다. 너는 사회 나가면 대학 다닌 사람이다. 그런 네가 술 사서 고맙다.'

 그러면서 애초에는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 하더니 술 더 들어가자 내 손 잡고 엉엉 울었다. 김대지가 김일병 손 잡고 울었다는 소문은 금방 부대에 퍼졌다. 그 이후 나는 800 중대 내무반 초 VIP로 대접받고 살다가 제대했다.

 나는 주량이 센 편이다. 중대 막걸리 마시는 대회에서 한 말 마시어 2등 한 적 있다. 1등은 한 말 반 마신 인천 부두 깡패 정봉율 상병이다. 간혹 작전 다녀오면 ROTC 장교들이 주보에서 나를 불렀다. 대대 유일의 대학생 운전병 주량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럴려고 군에 입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철수와 의리를 지키고싶었다. 사하라 주둔 외인부대를 기대했다. 냉혹한 군대에서  자살할 생각을 했다. 그 시덥잖은 문학 때문이다. 그래서 훈련소에서도 기관병에게 돈 주고 부탁해서 의무병과를 수송으로 기리까이하지 않았던가.

 외출 나가서는 위험한 곳을 드나들었다. 서면 '하이에리어' 미군 부대 주변 사창가가 그곳이다. 한번은 거길 배회하다가 15P 헌병을 구타하고, 헌병 백바가지와 완장, 하얀 장갑을 빼앗아 착용했다. 휴가병 잡아 외출증 검사한다며 돈을 뜯었다. 나는 대학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다. 아무도 힘으로 날 제압할 수 없다. 부전동 철도골목에서 고래고기 안주로 몇 잔 하고 부대 들어갔더니, 그날 15P 헌병대 운전병 파견 나간 양풍길 병장이 와 있었다.

'지금 전 제부지구 헌병대에 비상 걸렸다. 빨리 그 증거물 없애라'

 그래 헌병 화이바와 완장 꾸겨서 난로에 쳐넣고 태워버렸다.

 사고 치고 싶었으나 사고가 나를 피해 다녔다. 운명의 신이 장난을 치는듯 했다. 자살할려고 준비한 실탄 때문에 나는 오히려 내무반에서 '열외'가 되었다. 하이에리어 부대 근처 사창가도 나만 가면 헌병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나를 실존주의자라 믿었지만, 실은 완전히 '싸이코패스'(psychopath) 였다. 

 

 남해에서


 철수 자살 후 나는 부모님 애간장 어지간히 태워드렸다. 자살한다고 집에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입대하질 않나, 대학을 무단으로 중퇴해버리질 않나, 제대해서 집에 오는가 했더니 어느 날 무조건 말 한마디 없이 집을 나가질 않나, 모두 제맘대로 였다. 나는 가방에 영문 성경 한 권과 원고지만 챙겨넣고 나왔다. 중앙로타리 옆 버스 터미날에서 무조건 아무 버스나 탔는데, 타고보니 하동 가는 차였다. 차는 서장대 밑을 지나 곤양으로 가면서 동네마다 서서 사람을 태우는데, 몸뻬 차림 아낙과 검정 두루마기 차림 남정네들은 타고내리는데 한참씩 꾸물거렸다. 가다가 부드럽기 비단 같은 바다가 보이고, 비토(飛兎)섬이  보였다. 거긴 고2 여름방학 때 나와 철수가 가본 섬이다. 바지락 미끼로 장어 잡아 고추장 발라 구워먹었던 곳이다. 

  이쪽 금오산과 남해 망운산 사이 노량 해협에 황혼이 지고 있었다. 짭쪼롬한 갯내음이 코를 스쳤다. '아! 여기서 외로운 갈매기처럼 섬을 헤매다녀보자.' 가파른 돌계단 내려가니 늠실늠실 푸른 파도가 발끝에 닿고, 곧이어 선체에 붉은 칠한 낡은 철선이 닥아온다. 배는 사람을 태우자, 탈탈탈 공중에 발동기 검은 연기 날리며 바다를 건너간다. 물살이 무척 거세다싶어 생각해보니, 여기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치른 바로 그 장소다. 

 배가 닿자 부르릉 남해읍 가는 버스는 시동을 건다. 들판은 황혼이 금실을 수놓았는데, 작물은 풍요롭고, 사람들은 표정도 순하고 말씨도 순하다. 해가 꼴깍 넘어가고 나서 읍에 닿자, 사람들 흩어진 터미널엔 어둠만 덮혀있다. 여관이 없던 시절이다. 잘 곳이 걱정되어 찾아보니, 국밥집에 국밥 먹는 장꾼 차림들이 보인다. 무슨 수가 있겠다 싶어 거기 앉아보니, 국밥 먹은 사람은 전부 그 집 뒷방에서 잠을 잘 수 있단다. 주변을 살펴보니 초가지붕 위로 삐쭉 나온 굴뚝은 사람 손 닿을만치 낮고 오랜 세월 연기에 그을러 시커멓다. 화장실 냄새 나는 방은 기둥에 걸린 남포등은 때묻은 유리를 통해 어슬프레한 불빛으로 실내를 비치고 있다. '좀 땡깁시다!' 왕년에 부산 서면 하이에리어 부대 근방에서 헌병도 구타해본 몸이다. 시골 봇짐장사 쯤이야 귀여운 존재다. '거기 재떨이도 이리 주소' 재떨이까지 챙겨 담배 물고 누워보니, 옆의 봇짐장사꾼 옹크린 모습 타향의 고독이 스며있다.

 사람 들락거리는 바람에 열어젖힌 문으로 들어온 찬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그 바람에 잠을 깨었다. 장꾼들은 희뿌연한 새벽에 세수하는라 들락거린다. 부얶 가마솥은 쎄쎄 소리내며 하얀 김 내품는다. 아궁이 군불 타는 소리 탁탁 들리고, 방안에 낼름낼름 뻘건 불빛 비친다. 오지그릇에 퍼담아주는 국밥 후루루 마시는데, 사는 형편이 좋아 그런가. 인심 좋은 오십대 아주머니는 인물도 곱상하고, 밥통을 아예 옆에 내놓아 장꾼들이 양껒 밥을 퍼먹는다. 칼바람 부는 부산 인심과 대조된다.

 제삿밥 먹은 셈치고 도로 방에 들어가 한참 누웠다가 이둠 걷히자 대합실로 갔다. 파리똥 시커멓게 묻은 노랗게 물든 남해 지도는 귀퉁이가 떨어져서 보이지 않는다. 지도에서 섬 끝머리 동네를 찾았다. 미조란 동네였다. 


 미조리


 우선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보니 차는 바다로 가는지 육지로 가는지 모르겠다. 바다가 육지로 파고들어온 것을 만(灣)이라 하고, 육지가 바다로 밀고나간 것을 곶(串)이라고 하는데, 차가 산굽이 황토길을 돌때마다 바다와 육지가 번갈아 나온다. 간혹 바다에 뜨있는 섬도 보이고, 산꼭대기에 제비집처럼 올라앉은 보리암도 보인다. 파도소리와 바람소리, 간혹 들리는 새소리 너무도 고요하다. 이곳엔 돈도 명예도, 공부도 필요없는 곳이다. 마음이 편해진다. 

 버스가 달린 끝에 마지막 선 곳이 미조리다. 버스 타고온 사람 서넛이 자기 집으로 가버리자 포구엔 덩그러니 나만 남는다. 싱싱한 담쟁이 잎에 덮힌 돌담 너머로 바다와 축대와 빨간 등대가 보인다. 당시 미조는 이런 돌담집 몇개 있던 한적한 포구다.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낮은 돌담 사이로 잠시 왔다갔다 하니, 누가 묻는다.

'누구 찾아왔소?'

서로 아는 사람만 사는 미조다. 거기 낮선 사람 출현한 것이다. 내 처지를 설명하니,

'아 그럼 금순이네 집에 가봅시다.'

한가한 어떤 영감이 숙박할 집을 구해준다. 집주인은 남편 없이 초등학교 1학년 딸 하나 데리고 사는 젊은 과부였다. 방에 들어가니 무화과 나무 가지 밑으로 갈매기 나르는 바다가 보인다. 액자 그림 같은 창틀에 걸터앉아 담배 입에 무니, 포구가 외국 잡지에서 보던 그런 항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다정하다.  벽은 싸구려 도배지로 도배했는데, 한쪽에 쥐가 쏠은 구멍 메꾸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멋있다고 오려붙였는지, 반나의 서양여인이 수영복 입고 웃고 있다. 천장은 손 뻗으면 닿을만치 낮지만,  창문 넘어온 바람이 내 머리칼을 날리고, 주인 여자 성격이 깔끔한지 장판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하얀 창호지 바른 창문 덕택인지 방은 밝다. 

 삼십대 젊은 과수댁은 볕에 탄 얼굴이지만 건강미 넘쳤고, 시선이 머주치면 귓볼까지 얼굴이 빨개지며 시선을 피했다. 도시 사람이 자기 집에 하숙하자 신이난 딸 아이 금순이는 귀엽고 이쁜 편이다.  방안을 들낙거리며 내 담배 심부럼 자청했고, 여인은 상을 방 앞에 놓고 기척만 내고 가버렸지만, 금순이는 상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그날 여인은 남편 사별 후 처음 손님 받아 그랬을 것이다. 잠시 집을 비우더니 저녂 상에 구운 갈치와 미역국, 홍합과 파래 무침 같은 걸 내놓는데, 조촐하지만 정성 가득한 것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 내 방을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놓고, 금순이 시켜 빨래감도 가져가 빨래 해주곤 했다. 혼자 사는 젊은 여자가 이러니 간혹 내가 그 집 주인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 밥 먹을 때 쯤 '망운산'호가 포구로 들어온다. 삼천포 갔다가 돌아오는 '망운산'호는 포구 근처 오면 확성기로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를 틀면서 들어온다. 남해서 제일 높은 망운산에서 이름을 딴 '망운산'호는 백조처럼 우아하지는 않지만, 음악을 틀면서 부드럽게 포구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모습이 항시 이국 정취 풍긴다. 배가 부두에 닿으면 선원이 배에서 뛰어내려 쇠말뚝에 닷줄 걸고, 우르르 나온 동네 사람들이 배 타고 온 사람 집에 데려가고, 그러고나면 선창은 적막에 잠긴다. 나는 배가 올 때마다 벌어지는 그 풍경을 매일 구경했다.

 밤엔 금순이를 데리고 등대로 나가곤 했다. 바다는 낮과 밤의 무드가 다르다. 낮은 눈부시고 생기차지만, 밤은 이십 초 간격으로 바다를 비치는 푸른 등대불이 고요하고 신비롭다. 수면에 반사되는 정박한 배의 불빛은 외롭다.

 간혹 원고지에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인생은 밤바다 물 위의 한 척 배 같이 외롭다. 바다가 어느 날 배를 폭풍으로 가라않히듯 나도 언젠가 허망한 폭풍으로 고독한 인생에서 침몰하여 해저에 가라앉을 것이다. 어쩌면 내 내부는 남태평양 어느 지점 바다처럼 폭풍을 잉태하고 있는지 모른다. 고독과 허무 때문에 나는 어느 날 모든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사라질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포도주처럼 숙성되는 인격은 원하지 않는다. 남자답게 짧게 멋있게 살다가, 철저한 고독과 니힐이 화약처럼 폭발하여 굉음 천지를 진동하는 그런 죽음을 원한다. 원래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다.'


 밤에는 주로 등대를 산책하거나 성경을 읽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태복음도 읽고, 야훼가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만들어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는 구약성서도 읽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애초에 나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리 성격을 열심히 읽어도 니체의 '초인'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인간은 황야의 늑대처럼 고독해야 한다'는 말처럼 맘에 드는 멋진 구절도 없었다.  

 내가 경험한 주변의 내 또래 크리스챤은 전부 온실 속 화초같은 녀석이었다. 야생이 아니었다. 찬송가 잘 부르고 착하다는 칭찬은 듣지만 생명력 약한 온실 속 화초였다. '저 새벽 이슬 내린 빛나는 언덕은 그대 함께 언약 맺은 내마음의 고향, 참사랑의 언약 내 잊지 못하리, 사랑하는 아니로리 내 맘 속에 살리라.' 아니로리를 그렇게 곱게 부르던 여학생이 있었다. 중학생 때 진주 칠암동 교회 그 이쁜 여학생 따라가 층층 신발장에 놓인 그의 신발 한짝을 감춰둔 적 있다. 나무꾼과 선녀처럼 해볼려던 참이다. 그러나 그때 그걸 방해하고 나선 한주먹감도 않되는 녀석이 있었다. 나는 계집애처럼 얼굴 하얀 그 키다리 안경잽이 멱살을 잡았다가 영원히 그 소녀한테 눈총을 받았다. 그래서 더 기독교와 멀어졌다. 어째서 기독교는 그런 약골을 보호하는가.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밝은 색만으론 명화는 그릴 수 없다. 명화는 밝고 어두운 색이 혼재할 때 가능하다. 나는 평범한 그림은 그리고 싶지않다. 그것이 내가 상식의 틀을 깨고 보통 사람이 피하는 어둠을 철저히 추구하는 이유. 끊임없이 인생을 비극으로 채색하는 이유이다.'   

요컨대 나는 대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고, 강열한 본능을 가진 야생마였다.


 나는 기독교 사상보다는 범신론(汎神論)에 흥미를 느꼈다. 신은 우주 속에 있고, 우주가 바로 신이라는 만유신론(萬有神論) 이다. 할일 없는 나는 혼자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야생꽃을 흔드는 산들바람 속에 섞인 신의 소리를 듣고싶었다. 섬의 산꼭대기를 목화송이처럼 부드럽게 휘감은 구름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간혹 해변을 따라 정처없이 가보곤 했다. 거기 어느 외진 곳에 헷세의 '유리알 유회'에 나오는 '카스탈리엔' 같은 동네가 있고, 유리알 유회의 명수 '요오제프 크네히트' 같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싶었다. 푸른 물결 밀려오는 해안과 아무도 없는 백사장을 혼자 걷다가, 황혼이 어둠으로 변하고, 밀물이 거친 소리를 내며 육지로 밀려오는 한밤중에 돌아오기도 했다. 

 송남(松南)이란 곳에 가보기도 했다. 넓은 백사장 옆에 솔밭이 있고, 솔밭 옆에 손바닥만한 작은 초등학교가 있었다. 모래 물 속에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서 발바닥으로 모래를 부비면 물속에 가리비조개 천지다. 껍질이 납작하고 빤짝이는 가리비조개를 바께스 채로 삶은 적 있다. 절벽 아래에서 소라와 해삼을 줏은 적도 있다. 근처 논 가운데 작은 연못에서 달밤에 팬츠를 벗고 헤엄을 쳐본 적 있다. 적당히 데워진 물결이 피부에 닿는 촉감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바다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집채만한 파도가 넘실거리며 달려와서 쾅 하고 벽력같은 소릴 지르며 암벽이 무너지라 덮치면서 십여 미터나 솟구치고 하얀 포말 남기고 물러나면, 뒤 이은 파도가 다시 달려와 바위를 덮친다. 해신(海神) 포세이돈이 영토를 넓히려 끝없이 달려오면, 대지의 여신 레아는 무성한 아열대 상록수림으로 그에 맞선다. 나무와 풀로 바위 틈 한 치 땅에도 뿌리를 내리게 하고,  바람에 날라온 야생초는 끊임없이 꽃을 피운다. 꽃은 끊임없이 열매를 맺고, 열매는 끊임없이 생명을 잉태한다. 

 바다와 육지가 서로 생명력을 경쟁하는 그 틈바구니 바위 틈에는  바닷물이 고인 작은 물웅덩이가 있다. 밀물 때 들어온 바닷물이 썰물 때 거기 남은 것이다. 바위에는 까맣게 홍합이 붙어있고, 톧나물과 미역 줄기가 너울거리고, 게가 기어다닌다. 물 속에는 손바닥만한 우럭과 노래미가 헤엄친다. 물 밑에는 소라고둥과 조개가 숨어있다. 이런 물웅덩이는 찾은 사람의 비밀의 작은 에덴동산 이다. 물웅덩이 미역 줄기 밑에 숨은 우럭과 놀 수 있고, 돌 밑에 숨는 소라고둥 잡을 수 있다. 근처 풀밭에는 야생 나리꽃이 군락으로 피어있었다. 

 나는 아무도 오지않는 나리꽃 군락에서 미인의 입술가 점처럼 화판에 요염한 검은 반점이 여럿 찍힌 키다리 나리꽃을 보았다. 그리고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한 소녀를 생각했다. 그가 어쩌다 호수처럼 신비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내 몸엔 갑자기 화살 맞은 표범처럼 수십만 볼트의 엄청난 전류가 짜릿짜릿 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그와 나는 서로 궁합이 맞는 한 쌍이었다. 그의 부친은 진주 모 대학 학장이었고, 우리 아버님은 진양군 교육감이었다. 두 분 다 동경 유학생 출신이고, 그가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다면, 나는 사립대 명문인 K대 재학생이었다. 그가 명작 속 소녀처럼 수줍고 아름다웠다면, 나 역시 건강하고 공부 잘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투루게네프의 '첫사랑'이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품'을 좋아하던 문학청년이었던 점이다. 나는 '샤롯테'를 사랑한 젊은 ‘베르테르’ 였고, '지나이다'를 사랑한 '페트로비치' 였다. 나는 그 앞에만 가면 노틀담의 꼽추 '콰지모도'처럼 되었고, 그는 짚씨 여인 '에스메랄다'가 되었다. 그 모두가 내 탓이다. 중3에서 시작된 짝사랑은 내가 군인일 때 끝났다. 그가 군의관과 혼담이 진행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단판을 내려고 육군 병장 계급장을 달고 나는 그가 근무하던 문산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수업 끝까지 기다려 같이 기차를 타고 진주역에 내렸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명작 속의 남자처럼 소심하여 한마디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앓다가 돌아선 것이다. 

 그와 함께 이 에덴동산 찾아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아담 그는 이브일 것이다. 나는 그를 생각하며 주변에 무수히 핀 나리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었다. 그리고 죽은 햄릿을 슬퍼하는 오필리아처럼 죽음 같은 고요가 담긴 수면 위로  꽃다발을 던졌다. 실연의 상처 안은 꽃다발은 쓸쓸히 물 위로 흩어져 갔다.


  


 욕지도에서


그러다 몇 달 뒤 욕지도로 건너갔다. 삼천포 떠난 배가 망망대해 몇 시간 건너가도 여전히 닿지 않는 먼 섬이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섬에 혼자 살고 싶었다. 외딴 수도원 신부님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고싶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이 있다. 거기 베네딕트 계열 수도원처럼 나도 청빈과 노동 의지하며 장미 키우며 살고 싶었다. 한번은 반나절 산길 걸어 어느 외진 바닷가 동네에 가서 한 여선생 만난 적 있다. 학교에 선생은 여선생 혼자였다. 아이들에게 철봉과 씨름 가르켜주자, 여선생은 날더러 거기서 같이 아이들 가르키자고 한 적 있다. 당시 낙도 외진 학교는 고졸이라도 교편이 가능하던 시절이다. 

 나는 이 당시 비로소 인생의 생살을 체험했다. 그 전에는 생살을 보호하는 위에 다른 피부가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잊혀진 사람이란 걸 알았다.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처럼 비참한 건 없다. 친구가 자살하여 군에 자원입대한 처음에는 주변에 걱정하는 사람 많았다. 형은 편지를 보냈고, 나는 파도 밀려오는 제3부두 데크에 주차한 GMC 운전대에서 답장을 쓰곤 했다. 남해에 있을 때도 편지가 왔다. 친구들은 철수 자살과 나의 입대, 그리고 섬으로 떠난 일련의 행적을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나를 잊어버렸고 소식을 끊어버렸다. 이때 비로소 나는 진짜 외롭게 된 것이다. 학교는 제적되어 있었다. 퇴로가 없었다. 고독이 뼈에 사무쳤다. 그 전 나의 절망은 전부 가짜였다. 낭만적 염세주의 였다.

 깊은 밤 혼자 펄럭이는 촛불 앞에서 눈물 흘리며 성경을 읽곤했다. 해무가 짙게 끼면 두 손을 앞으로 벌려도 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천지를 구분할 수 없는 그 해변을 무작정 걸어다녔다. 들려오는 것은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 울음소리와 파도소리 뿐. 잠 자다가 꿈속에서 '종암동 서울역 가요!' 하고 외치던 18번 버스 차장의 목소리를 들은 밤은 혼자 일어나 서러워 울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서울이 그리워 한없이 울었다. 나는 비로소 키엘케골, 쑈펜하우엘, 니체 같은 사상가들의 철학이 엉터리란걸 깨달았다. 지식인의 말잔치에 불과했다. 현학적이지만 실제 상황에선 아무런 약효가 없다.

 어느 날 모종의 결심을 하고 나는 동항리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주머니엔 소주 한 병과 유언장이 들어있었다. 밑엔 출렁이는 바다가 있었다. 중간에 소나무가 있다. 나는 그 소나무에 기대어 소주를 마시고 취해 잠들었다가 떨어질 심산이었다. '운명아 데려가고 싶으면 네 맘대로 데려가라'는 심보였다. 내 시신은 파도 따라 떠다닐 것이다. 유언장은 비닐로 싸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사람들은 유서를 읽어본 후 진주로 연락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운명의 여신이 작난을 쳤다. 내가 눈을 뜨자 거기가 저승이 아니었다. 바다는 진홍의 포도주 빛이었다. 해지기 전 구름은 찬란한 황금빛 이었다. 

'천지창조 했나?'

 씨니컬한 생각이 들었다. 자살이 실패한 것이다. 잠버릇 심한 내가 바다에 떨어질 것이라 믿었는데, 소나무를 붙들고 얌전히 깬 것이다. 

'그렇다면야 운명한테 더 이상 굽실거릴 필요 없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보다. 운명이 날더러 더 살아라면 살아보자.'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마치 백년 인생 다 산 사람 같았다. 마음은 식은 재처럼 싸늘했다. 절벽 위로 올라오니 빤짝이는 별이 보였다. 별을 본 순간 나는 니체의 '초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온 나는 냉정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수도승처럼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더 이상 키엘케골이나 쇼펜하우엘에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런 건 사춘기 아이들 작난이다. 나는 서양철학을 버리고 미친듯이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그 후 불교신문 기자가 되었다.

 

 최옥녀란 이름 앞에서 이렇게 깊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한 여인이 닥아왔다.

'오빠! 옥녀가 철수 오빠 동생인건 알지요?'

정애여사다. 그는 옥녀하고 동기다. 정애는 집이 사천인데, 여고 시절 동생 명애가 우리집에 하숙하여 자주 온 적 있다. 

'알지. 서울 사는 모양이네?' 

'아까 잠깐 보였는데, 집에 간 모양이네요. 남편하고 사별하고 송파에 혼자 살고있습니다.'

'옥녀 밑에 또하나 여동생이 있고, 철웅이라는 남동생도 있었는데?'

'네! 철수 오빠 밑에 철웅이가 있고, 지금 철웅이가 부산서 어머님 모시고 살아요.'

정애가 소식을 잘 안다.

'정애씨도 이젠 칠십 넘었으니 정애여사라고 부릅시다. 정애여사! 옥녀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오빠가 옥녀한테 그런 맘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고...철수 자살하고 나도 자살한다고 대학 중퇴하고 입대하고, 제대 후도 2년을 섬에서 살았어요. 그동안 옥녀 오빠 노릇 해줘야한단 생각도 많이 했고...해줄 이야기 많고.'

'그럼 오빠가 옥녀를 한번 보고싶긴 하겠다.'

'그래서 정애여사한테 부탁인데, 한번 자릴 만들어 주면 어떨까?'

'내가 죽전역 근처에 자리 만들어 볼께요.'

 정애여사는 만사 똑똑한 여자다. 그런데 소식이 없다. 혹시 옥녀가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50년 전에 자살한 내 친구 여동생이다. 나와 같이 문학을 동경하던 단짝친구가 자살하자, 나는 세상이 살아갈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대학 1년생이 첫학기 시험을 미루고 즉시 입대하여 자동차 대대 운전병이 되어 차에 실탄을 숨겨놓고 자살할 기회를 노렸다. 자살에 실패하자 제대하여 섬에 들어가  2년 살았다. 사회와 완전 격리된 거기서 나는 서양의 수도원 신부나 수녀처럼 살고자 했다. 신과 자연과 어떤 조화점을 추구했다. 그때 발견한 것은 기존의 철학이나 문학이 인생에 방향 제시를 못하는 허접쓰레기라는 것이었다. 허탈과 고독만 잔뜩 맛보았다. 파도 소리 들리는 밤에 혼자 촛불 앞에서 성경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흐느껴 운 적 많다. 사회로의 복귀는 멀고, 그 쓰라린 고독을 벗어날 탈출로는 자살 밖에 없었다. 생을 마감하려고 절벽 중간에 내려가 술을 먹고 잠든 적 있다. 그러나 신은 날 저승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래 내 운명을 이리 만들어놓았다면 네 뜻대로 해봐라. 나는 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마음이 차겁고 씨니컬한 청년이었다.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대학에 복학하자 겉만 번지레하고 아무 소용없는 서양철학은 종이쪽지처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동양철학을 선택하여 노장철학과 불교철학으로 기울었다가 그후 불교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후 경제신문 기자로 있다가 재벌 비서가 되었고, 거기서 밥벌이 하다가 퇴직했다.

 문학을 좋아한 철수는 자살했지만, 그 때문에 나도 폭풍노도 같은 청년 시절 5년을 보냈다. 인생 행로가 변했고, 사람이 변했다. 옥녀를 만나면 그 파란만장한 이야길 들려주고 싶었다. 철수 집에서는 철수 자살이 철학과 다니던 내가 서로 주로받은 편지 탓이라고 생각했다. 옥녀는 현재 남편과 사별하고 송파에 혼자 산다고 한다. 50년 전 일이지만, 그때 철수 자살 후 내 인생 행로를 설명하여 변명도 하고 싶었고, 사실 옥녀는 미인이다. 옥녀 얼굴도 보고 싶었다. 망인이 진주여고 출신이었다. 마침 문상 온 동기 정애에게 물어보았다. 정애는 여고시절 내 여동생과 친해 우리집에 자주 놀러왔다.  

그랬더니 정애가 대답했다.

'옥녀도 아까 얼굴이 보였는데 가버린 모양입니다.'

 '옥녀는 밑에 여동생이 있고, 철웅이라는 남동생도 있었는데...'

'네! 철수 오빠 밑에 철웅이가 있었어요. 철웅이가 현재 부산서 어머님 모시고 살고....'

정애가 근황을 안다.

'정애도 이젠 7십 넘었으니 정애여사라고 부릅시다. 옥녀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만나봐야 할 사람인데....'

'오빠가 옥녀한테 그런 맘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게 아니고. 철수 자살 후 내 인생이 엄청 흔들렸어. 대학 중퇴하고, 입대하고, 섬으로 돌아댕기고... 그후 취직하고 결혼하고 바쁘게 살면서 옥녀를 잊고 살았지만...서울 산다니 너무 밥갑고... 50년 전에 내가 옥녀 오빠 노릇 하겠다고 한 적 있어. 그 당시 서면 로타리 뒷골목에 살던 옥녀와 어머님을 찾아갔고, 그때 옥녀가 대문 밖까지 따라나와서 나를 바래준 것 같고.'

'오빠가 옥녀를 한번 보고싶긴 하겠다.'

'정말 보고싶지. 그래 부탁인데 한번 자릴 만들어 주면 어떨까?'

'그럼 내가 죽전역 근처에 자릴 만들어 볼께요.'

 이렇게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때가 1963년이니 지금부터 약 50년 전이다. 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한 통 전보를 받았다.

'철수 사망. 급히 하진하기 바람. 경택이가.'

철수와 경택이 나 셋은 늘 함께 다닌 친구다. 봄이면 망진산을 쏘다녔고, 여름이면 '메기통'이란 곳에서 따이빙도 하고 현인의 '신라의 달밤'을 부르고 놀았고, 해인대학에서 평행봉을 했다. 셋 다 학교성적도 좋고 체격도 좋아 친구들은 우릴 '배건너 삼총사'라 불렀다.

 

 철수와 나는 문학을 좋아한 편이다. 헬만헷세를 좋아했고, 니체나 키엘케골도 좋아했다. 그러다가 나는 대학 철학과엘 들어갔고, 철수는 재수생으로 진주에 남았다.

 나는 대학교수한테 직접 철학개론을 듣자 신이 났다. 하루 멀다하고 철수한테 편지를 보내어, 이미 철학자가 된듯 유세를 떨었다. 첫 학기는 철학개론만 있었다. 강의에도 없던 니체나 쑈펜하우엘의 염세주의 사상까지 퍼나르기 시작했다. 당시는 염세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이다.

 키엘케골의 '생의 무의미한 의지', 쇼펜하우엘의 '자살예찬론', 니체의 '신은 이미 죽었다'는 글을 마치 내가 그 내용을 잘 알기나 하듯 편지에 쓰기 시작했고, 철수는 내가 부럽던 모양이다. 그도 열심히 염세주의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 어느 여름 날 철수는 철길을 혼자 걸어가 주약동 터널에서 석탄연기 풍기며 달려온 열차에 투신자살한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된다는 말을 그때 나는 처음 실감했다. 세상 전체가 한쪽으로 팽그르르 돌아가는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 때는 중간학기 시험 때였다. 나에겐 더 이상 세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시험도 필요없고 학교도 필요 없었다. 절친한 벗을 보낸 입장에선 다른 모든 건 중요치 않았다. 시험이고 뭐고 당장 팽개치고 진주 가는 기차 탈 일만 중요했다. 나는 속물처럼 시험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경멸했다.

 

 그래 즉각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탔고, 삼랑진에서 차를 바꿔 탔다. 마침 보리가 노랗게 익는 철이었다. 사람들이 들판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또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세상 전체와도 바꿀 수 없도록 중요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끝없는 절망의 심연을 헤맨다 해도, 세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게 제 궤도를 태연히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장례가 치뤄진 상가에서 나는 예기치 않던 일을 당했다. 상가에서 쫒겨난 것이다.

사람들은 철수와 편지를 수없이 교환한 나를 어머님이 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집에서 나가라고 일러주었다.

 하긴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철수는 그 어머님에게 생명 이었다. 너무나 잘 생기고, 주변의 부러움 받던 아들이다. 그런 아들을 죽음으로 몬 친구를 보면 얼마나 가슴 찢어지겠는가.

 나는 먼 발치에서 하얀 상복 입은 철수 어머니와 옥녀 모습만 보았다. 어머님도 옥녀도 미인이다. 그때 본 두 사람의 하얀 상복만 기억에 남아있다.

 

 결혼 전에 자살한 총각은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한 재는 우리가 여름이면 강물에 따이빙하고, 현인의'신라의 북소리' 부르던 '메기통'에 뿌려졌다고 한다. 경택이가 나를 '당미'로 데려가더니 언덕 위 소나무에 올라가 뼛조각 몇 개를 들고 내려왔다. 그걸 '메기통'이 보이는 거기 소나무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풀밭에 노란 원추리꽃이 피어있었다. 강 건너 서장대에서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나는 건 그것 뿐이다.

 

 우리는 훗날 다시 여길 찾아오자고 약속한 후 헤어졌고, 나는 그때 나 자신의 자살을 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울 올라온 나는 또하나의 자살을 보게 된다. 진주 다녀온 내 이야기를 들은 한 방 하숙 친구가 새벽에 음독을 한 것이다. 그는 철학과 동기로 역시 문학을 좋아했다.

 둘은 돈이 떨어지면 세계문학전집을 들고나가 맡기고 우리가 쎄느강이라 부르던 제기동 K대 앞 '니나노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철수 이야기 많이 했고, 그도 염세주의를 무슨 사상처럼 알고 있었다.

 음독한 그를 발견하고 당황한 내가 이리에 살던 그의 어머님에게 전보 치고, 상경한 가족에게 그를 맡기고 떠나보낸 모든 일들이 꿈속의 일 같다. 

 

 이후 철수의 죽음은 내 인생을 사정없이 바꿔버렸다.

 나는 자학(自虐)의 심정으로 학업을 팽개치고 무작정 진주로 내려와 기원에서 소일하다가 11월 어느 날 입대했다. 동명이란 친구와 바둑을 두는데 밖에 나보다 2년 선배들 징집대열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 저거봐라' 둘이 배영초등학교까지 따라가서, 자원입대 가능성을 기관병에게 물어보고, '창원 훈련소 가서 물어보라'는 말을 듣자, 열차를 동승해 훈련소로 가서는, 머리 깍고 훈련병 된 것이다. 

 

 나는 그때 까뮈의 '이방인'이란 소설 주인공 비슷했다. 소설에 '햇볕이 너무 눈 부셔 총을 쏘았다'는 구절이 있다. 이런 걸 요즘엔 '싸이코패스(psychopath)라 부른다. 겉은 멀쩡하면서도 충동적인 행동을 하거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를 말한다. 

 당시 실존주의 문학에서는 그 걸 인간 실존의 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우리 둘은 훈련소에서 실시한 무슨 테스트에서 1-2등 성적을 얻어 병과를 의무로 받았다. 의무병과는 군에선 특과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붕대나 옥도징기 불출하는 한가한 의무병은 싫었다. 나는 '이방인'의 주인공 '뮈르소'처럼 되고 싶었다. 실존주의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 우리는 '훗날 사회에 나가면 돈 벌면 자가용 몰지 모른다'는 가설 아래 수송병과로 바꾸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수송병과가 가혹한 체벌로 견디기 어렵다는 것에 호기심이 끌렸다. 나는 군대 밑바닥 을 보고 싶었다.

 동명이 부친은 진주 미국공보원 원장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반장이고, 진주서 중학 마친 뒤 경남고를 졸업했다. 의붓어머니 문제로 부친과 알력이 심했고, 대학은 안중에도 없었다,

 

 기관병은 쓰다달다 말 없이 둘을 의무병과에서 수송으로 바꿔주었다. 아마 다른 훈련병에게 의무병과 두 자리 돈 받고 팔았을 것이다. 

  창원에서 610 수송병과 이등병들을 태운 기차는 해운대에 도착했다. 수영비행장 옆이었다.

 우리는 낮이면 기장 양산으로 GMC 적재함에 앉아 운전교육 받으러 나갔고, 피교육생은 간혹 교관에게 '아구통이 90도 방향으로 돌아가게' 주먹으로 얻어맞거나, 조교가 '한강다리 10분간 실시!'하면 '실시!' 복창한 후 영점 5초 내로 GMC 적재함에 두 다리 걸치고 철모 위에 맨머리를 박는 기압을 받았다.

 귀대하면 한겨울에 GMC 밑바닥 '시다마리'를 얼어붙은 손으로 물세차 했고, 간혹 단체로 12월 차디찬 해운대 바다 속에 들어가 입술이 새파랗게 얼도록 파도를 둘러쓰곤 했다.

 나는 밤에 수영비행장 푸른 써치라이트 보면서 달빛 아래 파도소리 들으면서 향수를 달랬다. 나는 거길 프랑스령 사하라 사막 주둔 외인부대처럼 생각했다.

 

 그 당시 나는 성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망으로 불리는 식욕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경험했다. 배고픈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동물이다.

 서대신동에 외삼촌 댁이 있었는데, 나는 토요일 외출 나가면 오로지 먹는 것만 챙겼다. 자고나면 누님이 웃으면서 건네주던 밥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한 끼가 보통 두 그릇이었다. 

 귀대할 때는 배가 임신부처럼 불렀다. 만원 뻐스 사람들이 그 배를 밀지못하도록 나는 두 손으로 앞을 가리고 배를 보호했다. 취침점호 끝나면 비행장 써치라이트 새파랗게 비치는 그 무서운 야외 화장실에서 설사하는 일이 자정 넘도록 계속되었다.

 

  쇠를 먹는 불가사리도 있지만 나도 그 비슷했다. 아무거나 먹어치웠다. 무우밭에 들어가 무우를 뽑아먹기도 했다. 건빵 다섯 봉지 한꺼번에 먹고 물 마셨다가 불은 건빵 때문에 배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새벽 2시에 취사장에 몰래 들어가 아예 두부를 상자 채 들고나와 주차장에서 보초 서면서 먹어치운 적도 있다.  

 

 그 후 나는 항만사령부 229 자동차 대대 800 중대 3소대로 전출되었다. 229 자동차대대는 군기가 센 곳이다. 부산에서 '지옥대대'로 소문난 곳이다. 나는 거기서 참 기발한 기압을 다 받았다. 

 고무호스는 물에 적셔서 치면 고무가 살속까지 파고든다. 침대마후라는 나무라 부러지지만, 고무호스는 아무리 세게 휘둘러도 호스가 부러지는 법 없고, 뼈를 상하는 일 없다.

 사고병은  내무반에서 서로 칼빈 총질을 하기도 했다. 내무반에는 부산 15P 헌병대 감방장 경력의 별을 다섯 개나 단 전과자도 있었다. 영도 밀수업자도 있고, 인천 부두 깡패도 있었다.

 우리는 군함이 내려주는 군수물자를 3부두에서 받아 각 기지창에 날랐다. 밤이면 빳다가 난무해 내무반과 주차장은 아비규환 이었다. 고참들 빳다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치면 칠수록 작전 다녀온 운전병 주머니에서 돈이 나왔다. 운전병은 모두 군수물자 절도범에 가까웠다. 고향에 논을 산 자도 있었다.

 

 여기가 자살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사고치기 알맞은 곳이다.

 나는 자살할 때 쓸 칼빈 실탄 수십발을 내가 몰던 GMC 속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장난이 심하다. 내가 항상 쓸수 있도록 준비한 그 실탄 때문에 오히려 나는 부대에서 '열외' 대접을 받고말았다.

어느 날 ROTC 중위로 3소대 소대장이던 K대 선배가 소대 차량점검 중 내 차에서 다량의 실탄을 발견했다. 아마 소대장이 기겁을 하였을 것이다.

 즉각 전 중대엔 비상이 걸렸고, 소대장은 문제아를 밀실로 데려가 면담했다.

'왜 차에다 실탄을 싣고 다녔느냐?'

'저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원래 인생이 '무의미한 생의 의지' 아닙니까?'

'실탄은 어디서 구했나?'

'수영 부두에서 해운대 장산 탄약창에 운반할 때 빼두었습니다.'

'어디 사용할려고 했나?'

'제 친구 둘이 자살했습니다. 저도 필요하면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두 사람이 K대학 선후배가 아니었으면 나는 영창에 갔거나 '불명예 제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대장은 내무반 고참 사고자들을 설득했다. 

'김일병은 K대학 내 후배다. 우리 229자동차대대 유일한 대학 재학생 운전병이다. 그는 철학과 학생이다. 나는 철학은 잘 모르지만, 한참 철학에 빠진 애송이들이 그런 경우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있다. 내 얼굴을 봐서 이해해달라.' 

 그 바람에 나는 그후 한번도 단체기압 받은 적 없다. 오히려 고참 사고자들 친구가 되었다.

 그 중 김대지 병장이 있다. 그는 남한산성 군형무소에서 총감방장까지 한, 이북 출신 육군 중령 대대장도 꺼려서 피하던 인물이다. 하루는 내가 PX에 모시고 가서 막걸리를 대접하자,

'나는 해방 후 일본서 여동생과 홀홀단신 귀국해 사회 밑바닥에서 살았다. 여동생 수도원에 맡기고 입대했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대학생인 자네가 술을 산 것이 너무 고맙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김대지가 PX에서 김일병 손 잡고 울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제대까지 나는 229 대대에서 초 VIP급  열외자였다. 

 아마 이때도 운명의 신은 혼자 희쭉이 웃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리 사고를 칠려도 해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가 모두 나를 피해 도망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사랑 만난다고 군복 바지 줄여입고 진주로 휴가 갔다가 적발되어 감방 간 적 있고, 토요일에 서면 '하이에리어' 미군 부대 주변 사창가 배회하며 15P 헌병 구타하여 전 부산지역 헌병대에 비상을 걸리게 한 적 있다.

 그 모두가 미미한 사건이다. 실존주의 문학에 나오던 그런 참사는 아니다.

 

 이렇게 군을 제대하자 나는 무작정 남해로 갔다. 거기서 2차로 끝장을 볼 심산이었다.

 남해 미조라는 곳에 있다가 욕지도 동항리로 갔다.

  이때부터 인생의 고독을 알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잊혀진 사람이란 걸 알았다. 세상에 잊혀진 사람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나는 학교에서 제적되어 있었다. 중간 시험을 놓쳤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걱정하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들은 처음에는 연락을 취하고 걱정하다가 시간이 경과하자 체념해버렸기 때문이다.

 모두 잠잠해지자 고독이 뼈에 사무쳤다. 들려오는 것은 갈매기 울음소리와 파도소리 뿐이었다.

 꿈결에 '종암동 서울역 가요!' 하고 외치던 18번 버스 차장 목소릴 들은 밤은 한없이 울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서울, 서울이 그리워 한없이 울었다. 펄럭이는 촛불 앞에서 눈물 흘리며 성경을 읽었고, 천지 구분할 수 없는 안개 덮힌 밤바다를 무작정 헤매었다.

 

 그런 어느 날 모종의 결심을 하고 나는 절벽 중간에 내려가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잠들어 버렸다. '운명아 나를 데려가고 싶으면 네 맘대로 하라'는 심보였다.

 절벽에서 떨어진 몸은 시신이 되어 물에 떠다닐 것이다. 그래 유언장은 비닐로 싸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비극은 그때도 나를 비껴 갔고, 그렇다면야 나도 운명의 신한테 더 이상 부탁할 일도 없다.

 어느 날 형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온 나는 마치 백년 인생을 다 산 사람 같았다. 붙 타던 마음은 싸늘히 식은 재가 되었다. 마치 수도승 같았다.

나는 미친듯이 공부만 하다가 불교신문 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부산서 군대 생활 할 때 한번 옥녀를 만난 적이 있었어요'

내 이야기가 다시 옥녀 이야기로 돌아가자,

'오빠가 부산서 옥녀를 만난 적 있다고요?'

'어떤 경로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옥녀가 서면 로타리 바로 뒷골목에 산다는 이야길 듣고 군복 입은 내가 찾아간 적이 있지요. 철수 대신에 오빠 노릇을 해야겠단 생각을 하고.'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순정을
옥녀야 잊을소냐 헤어질 운명 차거운 밤하늘에 웃음을 팔더라도
이제는 모두 잊고 내 품에 잠들어라.'

 

 그 당시 최무룡의 '원일의 노래'라는 유행가 아시나? 나는 가끔 이 노래를 불렀지만, 사실 주인공 이름만 옥녀지 노래 사연은 옥녀와 관련 없어요.'

'오빠! 옥녀 만나서 무슨 이야길 했는데?'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 어머님과 옥녀 두사람은 날 보자 초상집이 되고 말았지.'

'안갈껄 그랬어.'

'그렇지. 그후 제대하고 섬에 있다가, 복학 후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바쁘게 살면서 옥녀를 잊고 말았지만, 다 50년 전 이야기지. 기억에 그때 서면에서 옥녀가 대문 밖까지 따라나와서 나를 바래준 것 같긴 해요.'

'오빠가 옥녀를 한번 보고싶긴 하겠다.'

'그래서 정애여사한테 부탁인데, 한번 자릴 만들어 주면 좋겠어.'

'내가 죽전역 근처에 자리 만들어 볼께요.'

 

 정애는 만사 똑똑한 여자다. 훌륭한 언론인 남편에다 훌륭한 자식 두었다. 자식은 둘 다 압구정동에 살고, 정애는 내가 살던 삼성동 옆에 살다가 지금도 나와 같은 수지에 살고있다.

 한번 말하면 두 말 필요없는 여자다. 명함을 주었더니 며칠 뒤 연락이 왔다.

 

 옥녀는 머리에 하얀 백발을 인채 나왔다. 칠십 초반 여인이다.

'내 이름이 김00인데, 기억나십니까?'

 그 소리에 대번에 쌍거풀진 까만 눈동자 이슬 맺힌다. 오십년이 흘렀지만 옛날처럼 애련하다.

'오빠! 오빠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

'경택이란 이름도 생각납니까?'

'경택이 오빠 잘 계셔요?'

'고인입니다. 이제 배건너 삼총사 중 철수 경택이 둘은 가고 혼자 남았어요.'

'아! 그렀군요.'

그 옥녀가 빠안히 날 쳐다본다.

'옥녀씨도 7십 넘었으니, 이제 옥녀씨라고 호칭합시다. 내가 점심 살테니 정애씨와 둘이 차나 한잔 사요.'

 

 식사 후 세 사람이 죽전 역 근처 다방에 들렀다. 나는 그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옥녀도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어떤 사람이에요?'

옥녀가 물었다.

'인물도 미인이고 서울 언니지.'

정애가 옆에서 거들었다.

'행복하시지요?'

옥녀가 물었다.

'후회만 있지요. 진주서 여고만 나온 사람과 맺지 못하고 서울서 대학 나온 사람과 맺은.'

 내가 정애에게 물었다. 

 '정애씨! 내가 장례식장에서 했던 말 기억 납니까? 집안 주도권이 둘 있으면, 맨날 다투고 싸운다는 말? 회사 조직에서도 과 단위나 부 단위에 톱이 둘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견제 많고 능률 저하되고 불화가 나옵니다. 노년이 되면 모든 게 판가름 납니다. 이제는 모두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가고픈 생각만 납니다.'

'그래도 모든 남자들이 미인과 살고싶어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겠지....사람이 원래 그런거니까. 그러나 하나가 좋다 싶으면 반드시 하나는 댓가를 치뤄야 하는 게 인생이지요. 노년에 안사람이 맨날 밖에 나가서 혼자 대하는 밥상이 얼마나 쓸쓸한지, 같이 마트에 가서 낮익은 톳이나 파래 같은 해초를 담다가 아내가 도로 반납하는 무안을 당할 때 느낌이 어떤지, 카터만 끌고 뒤에 따라오라고 할 때 기분이 어떤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두 사람은 듣기만 했다. 

 '어릴 때 우리가 배 고파 부엌에 들어가면 나이 든 고모님들한테 사내대장부는 사흘 굶어도 부엌에 들어오면 안된다고 야단을 맞았지요? 그런데 지금 부엌 설거지 주로 누가 합니까? 거실 청소 주로 누가 합니까?

 같은 출생지 사람끼리 결혼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기사 진주 여인도 서울 오면 다른 사람 된다는 이야긴 있습니다만...'

'우리 남편도 진주 사람인데 어떤 면은 힘들어요.'

정애가 짧게 코멘트 했다.

 '내가 이런 말 해선 않되지만, 훗날 이 사람 세상 떠날 때, 여기 정애씨 옥녀씨 두 동생 꼭 찾아와 주세요. 남강물처럼 다정한 진주 여인 손 한번 잡아보고 떠나게.'

이때 정애가 끼어든다.

'오빠! 우리 나이는 저승가는 순서가 없어요.'

'하긴 그렇지. 그건 그렇고 나는 간혹 최희준의 '병사(兵士)의 향수'란 노래를 부릅니다.

 '내 고향 처녀들이 나를 불러주는데, 하루에도 열 두번씩 가고 싶은 내고향. 에헤야 가다 못가면 에헤야 쉬었다 가세. 내 님의 치마 한 감 사가지고 갑시다.'

 '왠지 쓸쓸하군요. 그때 제가 꼭 가서 오빠 손 잡아드릴께요.'

옥녀가 말했다.

 인생은 한 편 드라마 같은 것. 세 사람은 그날 식은 커피 남겨둔 채 죽전에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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