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2편

추사체란 무엇인가/ 추사 김정희

김현거사 2016. 3. 23. 16:01

추사체란 무엇인가/ 추사 김정희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란 말이 있다. 시 글씨 그림 세 가지에 뛰어난 인물이란 뜻이다. 옛 선비들은 대개 시와 글씨와 그림을 함께 갖추었다. 글씨는 시가 주 내용이고, 그림에도 시가 있었다. .

추사체(秋史體)는 김정희(金正喜)의 서체이다. 추사라는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유최진(柳最鎭,1791,정조15?)은 조선 후기의 서화가다. 자는 미재(美哉)이고 호는 학산(學山), 산초(山樵), 정암(鼎庵) 등이며 본관은 진주다. 벼슬은 직장을 지냈고, 어려서부터 집안의 고화법서(古畵法書)를 보고 서화를 배워 조희룡(趙熙龍) 이기복(李基福) 정지윤(鄭芝潤) 등과 사귀었으며, 김정희(金正喜)를 따라 명승지를 편력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1843(헌종9)에 지은 <병음시초(病碒詩艸)><초산잡저(樵山雜著)>가 있다.

[

'잔서완석루'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선게비불(禪偈非佛, 사진왼쪽)'과
  '판전(板殿)'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괴이함'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선게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파격이라 하기 보다는 어린애 글씨같은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추사는 어떤 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자에 들으니 제 글씨가 세상 사람의 눈에 크게 괴(怪)하게 보인다고들 하는데 혹 이 글씨를 괴하다고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소. 요구해온 서체는 본시 일정한 법칙이 없고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며 괴와 기(氣)가 섞여 나와서 이것은 금체(今體)인지 고체(古體)인지 나 역시 알지 못하며, 보는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것은 그들에게 달린 것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요." 

 

그의 글씨체는 당년에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대의 안목들은 추사 예술의 진가를 잘 알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동시대 문인인 유최진(柳最鎭) 추사를 두둔하여 이렇게 말했다. 


"추사의 글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유최진(柳最鎭)의「추사체 특질론(秋史體 特質論)」

 


 

  추사(秋史)와 동시대(同時代) 인물(人物)인 초산 유최진(樵山 柳最鎭 : 1791~1869)이「추사(秋史) 글씨 편액(扁額)에 부쳐[제추사영편(題秋史楹扁)]」라는 글에서 추사체(秋史體)의 특징(特徵)을 다음과 같이 설명(說明)하였는데, 이 글은 추사(秋史)의 예술세계(藝術世界)를 가장 극명(克明)하게 요약(要約)한 최고(最高)의 비평문(批評文)이라 할 수 있음

     추사(秋史)의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者)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者)들은 황홀(恍惚)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妙)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書藝家)란 법도(法道)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法道)에 구속(拘束)받지 않는 법(法)이다. 글자의 획(劃)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怪異)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縱橫)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추사(秋史) 선생(先生)이 소사(蕭寺)에서 남에게 써준 영어산방(穎漁山房)이라는 편액(扁額)을 보니 거의 말[두(斗)]만한 크기의 글씨인데, 혹은 몸체가 가늘고 곁다리가 굵으며, 혹은 윗부분은 넓은데 아래쪽은 좁으며, 털처럼 가는 획(劃)이 있는가 하면 서까래처럼 굵은 획(劃)도 있다. 마음을 격동(激動)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理致)를 따져본다는 게 불가(不可)하다.

    마치 머리를 산발(散髮)하고 의복(衣服)을 함부로 걸쳐서 예법(禮法)으로는 구속(拘束)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감히 비유(比喩)해서 말하자면 불가(佛家)ㆍ도가(道家)에서 세속(世俗)을 바로잡고자 훌쩍 세속(世俗)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 당장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충분히 곱씹을만한 글이다. 하지만 추사체에 대한 설명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을 요약이라도 하듯 박규수(1808-1876)는 추사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가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당시의 모더니즘이라 할) 동기창(董其昌)체에 뜻을 두었고, 중세(24세)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옹방강(翁方綱)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나 소동파(蘇東坡), 구양순(歐陽詢) 등등 역대 문필들을 열심히 공부하고 익히면서 대가들의 신수(神髓)를 체득하게 되었고 만년(54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마침내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었으나,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래서 내가 후생 소년들에게 함부로 추사체를 흉내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박규수(朴珪壽)의「추사체 변천론(秋史體 變遷論)」

 

  환재 박규수(瓛齋 朴珪壽 : 1807~1876)는 추사체(秋史體)의 형성(形成)과 변천 과정(變遷 過程)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證言)하였음

     ……완옹(阮翁 : 추사(秋史))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 : 스물네 살에 연경(燕京)을 다녀온 후)에는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 : 1733~1818)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秋史)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劃)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와 미불(米芾)을 따르고 이북해(李北海 : 당(唐)의 이옹(李邕))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창울경건(蒼鬱勁健)]해지더니……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의 신수(神髓)를 얻게 되었다.

    만년(晩年)에 (제주도(濟州道)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傾向)이 다시는 없게 되었고…… 여러 대가(大家)의 장점(長點)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潮水)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추사체(秋史體)의 미적 특질(美的 特質)


추사의 글씨는 예서(隸書)에서 출발하고 있으면서 예서의 변형인 한대(漢代)의 필사체(筆寫體)를 충분히 익혀 부조화스러운 듯하면서 조화되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천성(天成)으로 터득하고 있다. 즉 선의 태세(太細)와 곡직(曲直), 묵(墨)의 농담(濃淡) 등으로 글자 하나 하나에 구성과 역학적인 조화를 주었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서축(書軸)을 이룬다. 이것은 획(劃)과 선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에 의한 예술로서 추상(抽象)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예술이다. 작가의 호를 붙여 명명된 것으로 한대(漢代)의 예서체를 기본으로 하여 개발되었다.

불계공졸(不計工拙)

 

  추사(秋史)는 과천 시절(果川 時節)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신(自身)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이재 권돈인(彝齋 權敦仁 : 1783~1859)에게 자신감(自信感)을 표(表)하였으며, 그 경지(境地)를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 하였는데, 이 말이야말로 ‘추사체(秋史體)’의 본령(本領)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추사(秋史)가 강상 시절(江上 時節)에 글씨에서 새롭게 발견(發見)한 경지(境地)는 ‘괴(怪)’의 가치(價値), 즉 개성(個性)의 구현(具顯)이었지만 과천(果川)으로 돌아온 시점(時點)의 추사(秋史)는 ‘졸(拙)’을 말하고 있었던 것임

  ‘불계공졸(不計工拙)’은 기교(技巧)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교(技巧)를 감추고 졸(拙)함을 존중(尊重)하는 것이니, 이는 곧 노자(老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 큰 재주는 졸(拙)해 보인다)’의 ‘졸(拙)’이며, 후학(後學)들이 추사(秋史)의 글씨를 꾸밈이 없다고 한 이야기는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인데, 따라서 추사(秋史) 글씨의 본질(本質)은 ‘괴(怪)’와 ‘졸(拙)’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만 ‘괴(怪)’는 작위적(作爲的)이고 의식적(意識的)인 ‘괴(怪)’가 아니라 자연(自然)스럽게 우러나온 개성(個性), 즉 ‘허화(虛和)’여야 한다는 것임

 

추사서평2

책의 내용 : [신위(申緯)는 서예라는 말을 처음 쓰면서(글씨를 쓰는데 반드시 진(晉)이나 당(唐)의 고법(古法)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내가 구상하고 있는 것을 붓으로 표현하였을 때 감상자가 어색하게 느끼지 않으면 족하다.)고 하였다. 중략...조선이라는 지역적 특성과 아울러 중국과는 구분이 가능한 우리만의 문화 양식을 강조한 말이다. 또한 근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조선후기의 사회계의 영수라고 할 수 있는 김정희와는 다른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중략... 조선 중인들의 사회적 위치를 대변하고 있는 인물인 조희룡을 두고 문자향이 없는 무리라고 비하하였다. 추사의 서예이론은 조선이라는 지역적 배경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추종자가 많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시대 구분의 기점인물로 삼자는 주장은 무리가 따른다. 말년에는 조선 진체라는 특유의 서체를 쓴 이광사를 수용하였고 자신도 고졸미가 넘치는 글씨를 쓰면서 변화를 꾀하였다. 그가 남긴 글에 예서의 법은 차라리 고(古)와 졸(拙)할 망정 기(奇)와 괴(怪)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변화보다는 고법을 중시하는 기본사고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반론 : 신위가 반드시 진,당의 고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면 추사와 마찬가지로 당시 원교서결 등으로 진과 당의 서법이 횡행하던 시기에 이를 마땅찮게 여겨서 한 말일 수 있다. 조선진체(朝鮮眞體=東方眞體)의 실체부터 밝혀보자. 진체(眞體)는 진서(眞書)라고도 하며 위의 종요와 진나라의 위부인(衛夫人), 왕희지에의해 체계가 완성되어 진나라와 당나라 때 크게 성행하던 해서(楷書)체를 말하는데 원교가 이를 기리며 본받아 서결(書訣)을 집필하여 유행시키면서 이를 조선진체 또는 동방진체라 하였다. 따라서 조선진체는 저자가 말한 조선이라는 지역적 배경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신위는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진체류에 대한 일종의 경고성 발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조희룡을 비판한 것이 마치 사대부인 추사가 조선 중인들을 멸시 천대한 것처럼 왜곡하였는데 추사의 실학사상은 중인 신분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얻은 사상이다. 중인들을 멸시하였다면 어찌 중인을 스승으로 두겠는가. 또 중인 신분의 많은 예술가들을 칭찬하고 그 솜씨를 천품이라고 까지 극찬하였다. 원교에 대해서도 그가 가진 글씨적 천품(天稟)을 인정하고 아까워하였다. 사대부와 중인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졸렬한 발상으로 실상을 호도하고 있다. 추사의 서예이론이 조선에 뿌리를 두지 않아서 시대구분의 기점인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누가 조선에 뿌리를 두었단 말인가. 저자가 시대 구분의 기점인물로 삼은 이광사는 그의 서결에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 이어온 우리나라 서예에 대하여 [고루(固陋)하고 편고(偏枯)하다.]는 말로 매도하고, 위부인과 왕희지 필체와 필진도(筆陣圖)를 흠모하여 서결로 칭송하여 기리고 조선진체라하여 이를 유행시킨 것이 조선이라는 지역적 특성에 뿌리를 둔 것인가. 추사는 사절로 청을 방문하여 문인들과 교우하며 얻은 서법에 대하여 우리고유의 것과 많이 달랐다고 하였으나 이를 칭찬하거나 맹종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청조(淸朝)에 유행하던 금석문학(金石文學)이나 고증학(考證學)을 받아들여 이를 실학사상이나 학문에 활용하고, 이를 서예나 서법, 서평 등에 인용하거나 활용하였으나 맹신하거나 추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를 더 발전시켜 서한예서(西漢隸書)의 독특한 필체에 기괴함을 더하여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하였다. 동강 조수호는 [추사는 한국은 물론 중국서예사상 이왕(二王=왕희지,왕헌지)을 비롯, 역대의 명가를 초월하여 기상천외(奇想天外)의 괴(怪)라는 추사체를 창조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로 봐서 지금의 현대서예나 전위서예 정도로 혁신적이어서 당시에도 기괴하다고 비판을 받기 까지 하였다.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르고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서체로 중국의 기괴한 서예대가로 거론되는 정섭(鄭燮)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하였는데 추사외에 서사(書寫)가 아닌 서예가로 그 시대구분의 기점인물이 있단 말인가. 서사가 아닌 진정한 글씨를 문자조형예술(文字造形藝術)로서 창작한 서예가는 우리나라에서 추사가 유일하다고 본다. 또한 추사는 말년에 이광사를 수용한 것이 아니고 서원교필결후라는 비판서를 쓸 때부터 그의 천품(天稟)을 인정하고 그의 그릇된 판단이 그의 잘못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추사의 고졸미(古拙美)는 타고난 것이고 초기 글씨에서부터 나타난 것이지 말년에 얻은 것이 아니다.

추사는 서법론에서 [예서(隸書)쓰는 법은 반드시 모지고 굳세며 예스럽고 졸박(拙朴)한 것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나 그 졸박한 것은 또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가슴속이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뜻은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않으면 팔뚝아래와 손가락 끝에 드러나 피어날 수 없으니 보통 해서와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피력 하였다. 책에서와 같이 기괴(奇怪)하지 말아야 한다는 표현은 없다. 오히려 추사글씨가 그 당시에는 기괴한 글씨로 치부 되었다. 추사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다. 추사가 김병학에게 보낸 편지에[근자에 들으니 제 글씨가 크게 세상 사람 눈에 괴이(怪異)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 글씨도 혹시 괴이하다 헐뜯지나 않을지 모르겠소. 이는 당신이 판단할 일이외다.(추사가 김병학에게-완당전집 제2권 14족)]고 하였다. 제자 심희순에게[요구해온 서체는 본시 처음부터 일정한 법칙이 없고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怪)와 기(氣)가 섞여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들에게 달린 것이니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괴(怪)하지 않으면 글씨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추사가 심희순에게-완당전집 제2권44쪽)] 동강 조수호는 그의 저서[서예술의 소요]에서 유최진이 추사체를 평하기를[김정희의 예서나 해서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진실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樵山雜著필사본] 이어서 중국인이 쓴 추사방견기에는 [그러나 추사예서(秋史隸書)는 예스러운 멋이 있고 법식에 합하여 참으로 대가(大家)였다. 이를 중국에 두어도 족히 대가라 칭할 만 하였다. 김정희의 글씨는 넉넉히 판교 정섭과 자웅을 겨룰만하다. 김정희와 정섭은 다 중국과 동국의 기괴(奇怪)한 글자의 대가요 비조(鼻祖)다.]라고 기술하였다. 또 동강은 [추사체가 오늘날에 있어 새로운 것은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위상은 물론 서법미의 핵심적인 괴(怪)라는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왕희지나 안진경의 서법이 고전적으로는 모범이지만 예술적인 흥취와 멋 그리고 현대성에 있어서는 추사에 미치지 못한다.]고 역설하였다. 부언하자면 추사글씨가 오늘날의 현대서예에서 추구하는 극단적인 미술성 내지 문자조형성에 걸 맞는 글씨라는 것이다. 당시에 세간에서 기괴하다고 했다는 것은 그의 글씨가 이미 기괴하였으며 기존의 서사(書寫)적인 글씨와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서예창작(書藝創作)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말로 전산(傅山)의 영추론(寧醜論)에 졸할지언정 교하지 말고(영졸무교-寧拙毋巧)

추할지언정 미하지 말고(영추무미-寧醜毋媚)라는 말은 있다. 제발 아무거나 같다 붙여 왜곡 호도하지 말자.  여기서 더 무슨 [변화(變化)보다 고법(古法)을 중시했느니 고졸(古拙)할망정 기괴(奇怪)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느 니, 시대구분의 기점인물이 아니라느니...우리나라 서단에 피해를 입혔다느니...]라는 왜곡(歪曲)과 폄하(貶下)로서 일관한 저자의 인식과 안목에 대하여 할 말이 있겠는가. 서예가가 아니라 했으니 누구에게 전해들은 말 일터인데...도대체 누구냐. 선전선동으로 진실을 왜곡하여 혹세무민하는 무리가...

김정희는 소년시절부터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박제가(朴齊家)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청대의 학예일치사상과 금석학 등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게 되었고, 1809년 베이징[北京]에 가서 옹방강완원(阮元) 등을 통해 금석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서예 원류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옹방강 일파의 서론에 입각하여 처음에는 동기창체 등을 익히다가 서법의 근원을 한대 예서체에 두고 이것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청조의 서예가들도 염원했던 이상적인 추사체를 이룩했다. 졸박한 이 서체는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몹시 심하고 또한 힘차면서도 거칠어서 마치 유희적인 선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필획들이 제각기 개성 있게 배열되어 매우 독특한 구성미를 자아낸다.

이러한 추사체는 그의 문인화풍의 근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신헌·이하응(李昰應)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에 의해 일세를 풍미했다.

▷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자는 원춘. 호는 완당, 추사 등.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 판서 김노경의 아
들로 태어나 24세 되던 해에 청나라 연경
(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들로부터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이미
스승 박제가로부터 들어 연경 학예계의 동
정을 소상히 알고 있던 추사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신예한 관점에 경도된 완원(阮元)과
사제지의를 맺고 금석학에 대한 진귀품을
열람하고 많은 도서를 기증받았다. 이에 감
복한 추사는 자신의 별호를 완당(阮堂)이라
하여 사제관계를 분명히 했다. 또한 연경학
예계를 대표하는 옹방강(翁方綱)의 금석(金
石) 8만권이 소장되어 있는 석묵서루(石墨
書樓)를 방문했다. 추사의 천재성과 기백
넘치는 학구열에 감복한 옹방강은 "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고 즉석에서 휘호하여 제자로
삼고 자신의 학통을 전수하려 했다.

추사는 청조 학예계의 중추들과의 인연으로 자신의 학예수련에 더욱 매진하
게 된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경학, 사학 및 불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와 천문,
지리, 음운, 산술에까지 널리 통하고 시문 서화에 능한 것은 물론 금석고증과
서화골동의 감식에도 뛰어났다. 특히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고 비의 글자를
고증하였으며 경주 무장사비 단편을 찾아내는 등 금석고증에 열중하여 1832
년(47세)에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한때 규장각 시교·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
를 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학문
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
를 완성시켰으며, 특히 예서 ·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글과 그림에 능했
던 추사는 말년에 제주도 귀양을 살았었는데 그 때 그린 그림 가운데 '세한도
(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길에 해남 대흥사에 머물게 된 적이 있는데 당대 유명 서예
가인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글씨를 촌스럽다고 내리게 하여 자신의 글씨
를 달았다고 한다. 그 후 9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다시 그 절에 들렀을 때, 김
정희는 당시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인정하며 다시 자신이 쓴 현판 글씨를 내
리게 하고 예전의 이광사 작품을 걸게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저서로는 <완당집>, <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등이 전한다.

▷ 세한도(歲寒圖)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
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
(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
栢之後彫也)"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즉, 시류나 이익만을 쫓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굳게 지켜나가는 이
상적인 선비정신을 의미한다.

허름한 집, 엉성해 보이는 구도, 휑한 허허로움의 세한도에는 잣나무와 함께
늙은 소나무와 젊은 소나무 두 그루가 그림을 채우고 있다. 소나무는 이 땅에
자라는 1천여종의 나무 중에서 문학과 예술의 소재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
는 나무다. 소나무는 장생을 염원하는 해, 달, 구름, 산, 내, 거북, 학, 사슴, 불
로초와 더불어 우리 조상들이 늘 곁에 두고 아껴왔던 십장생이었다. 지조와
절개, 강인한 생명력과 같은 민족적 정서로 승화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나
무이다. 추사 고택 옆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이 한 그루 서 있다. 이 백
송은 나무가 하얀 색을 띄고 있는데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다녀오면
서 가지고 와 고조부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의 백송은 많이 말라있지만 그 순백의 신비함은 여행객들을 오래도록
붙잡아 놓는다.

▷ 추사의 유배지

헌종 6년(1840) 안동 김씨와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 가게된
추사는 초기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후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현재 추사적거지로 지정된 곳은 1948년 4.3항쟁때 강도순의 집이 불
에 타 없어져서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어진 곳이다.
대정읍성 동문 안쪽에 자리잡은 이곳은 기념관과 함께 초가 4채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기념관에는 시와 서화 등 작품 탁본 64점과 민구류 142점이
전시되어 있다. 제주시에서 모슬포행 버스로 50분, 서귀포에서는 40분 정도
면 도착할 수 있다.

▷ 추사의 생가

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 났다.
또한 추사가 쓴 백파선사비가 고창 선운사 부도밭에 세워져 있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에 있는 그의 적거지에는 추사관이 있다.

秋史는 ‘書示佑兒’라는 글에서 그의 書法論의 골자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隸書 是書法祖家

若欲留心書道 不可不知隸法矣,

隸法必以方勁古拙爲上 其拙處 又未可易得,

漢隸之妙 專在拙處 …… 必先從此入 然後可無俗 ……

旦隸法 非有胸中淸高古雅之意 無以出手,

胸中淸高古雅之意 又非有文字香書卷氣 不能現發於腕下指頭

예서는 서법의 원조이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머물고자 한다면 예서의 법을 모르고는 불가능하다.

예법은 반드시 방경고졸을 최고로 삼지만 그 졸처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 예서의 오묘함은 오로지 그 졸함에 있다. ......반드시 먼저 이것을 따라 들어간 연후라야 속된 기운을 없앨 수 있다.

단 예법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한 뜻을 품지 아니하면 손으로만은 쓸 수 없다.(약간 의역).

가슴 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한 '문자향 서권기'를 지니지 아니하면 팔을 통해 손가락 끝으로 발현할 수 없다.

여기에 지적된 文字香書卷氣는 곧 秋史 書法의 根幹으로, 漢隸로써 俗氣를 제거하고 淸高古雅한 性品을 닦지 않으면 書藝의 眞髓가 이룩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그 정신을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書藝가 단순히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技藝가 아니라 豊富한 學識과 孤高한 人格을 갖출 때 비로소 書藝다워짐을 말하는 것이다. 淸朝 翁派의 名家 중에 秋史에 미치는 인물이 없고 秋史書派의 弟子 중에도 出藍의 人物이 나타나지 못했음은 秋史의 藝術的 天才性을 除外하고 본다고 할지라도 秋史만큼의 높은 識見과 古雅한 人品을 갖춘 人物이 없었다는 것을 傍證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秋史는 24세 때에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가서 청조 고증학의 거장이었던 翁方綱과 玩元 등을 面學함으로써 그들의 學藝一致의 주장에 크게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書道 修鍊 과정을 거치는데 있어 秋史가 基礎를 삼고 있던 것은 前述했듯이 金石學이다. 金石의 文字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도 비교적 原形을 보존할 수 있지만 帖으로 된 것은 臨摹를 거듭하다 보면 본래의 筆意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書法의 원류를 밝히고 그 진수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漢魏 이래로 전래되어 오는 수천종의 金石 資料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金石資料를 구하여 보고 書法으로 응용함에 있어서는 金石學의 理論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鑑識眼이 필요하다는 것이 秋史의 持論이라 하겠다.

진정한 書를 익히기 위해서는 書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學習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翁派의 이론 바로 그것으로서 董其昌, 文徵明(1470~1559)을 거슬러 올라 趙松雪, 米芾(1051~1107), 蘇軾(1036~1101)을 거쳐 楷書의 極則인 구양순의 化度寺碑와 九成宮醴泉銘, 그리고 저수량, 우세남을 익히고 六朝의 北碑와 南帖을 터득한 뒤 다시 漢隸와 古篆의 묘리를 통달하는 書道 修鍊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書의 眞髓를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藕船 李尙迪은 譯官으로 淸을 왈래하면서 淸의 諸名流와 秋史의 交遊를 적극 주선하면서 秋史 學藝 成就에 막대한 공헌을 한 秋史의 首弟子이다. 특히 秋史가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할 때 淸의 新刊書籍을 계속 공급하여 秋史로부터 유명한 歲寒圖를 그려받기도 하였는데, 書藝는 上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여 스스로도 書家로서 自處하기를 꺼리었다.

小癡 許維는 秋史의 畵論을 傳授받아 특히 畵法에 뛰어나 ‘破除東人陋習’(주13)이라고 秋史가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다.

朴齊家 등이 先鋒이 되어 받아 들인 淸朝 考證學의 學藝一致 思想이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時代 背景 아래 일찍이 박제가와 學緣을 맺었고, 또 24세의 젊은 나이로 淸의 巨儒들을 面學한 秋史 金正喜는 종래의 東國眞體에 대하여 全面 否定하면서 翁派가 주장하는 理想的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書를 순수한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이에 조선 내에서는 同時代의 前輩로부터 同年, 後學에 이르기까지 무릇 書에 뜻을 두는 인사는 秋史를 좇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淸에서도 秋史를 배우는 경향이 생겼다.

燕京學界의 환대와 호기심 속에서 秋史는 諸名流와 面交하여 學緣을 맺게 되었는데 秋史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 翁方綱(1733~1818)과 阮元(1764~1849)이다. 秋史가 가장 즐겨 사용한 阮堂이란 號의 ‘阮’ 자가 阮元의 姓字이며 翁方綱의 號인 覃齋를 秋史가 그대로 이어 받아 覃齋, 寶覃齋로 쓴 것만 보아도 秋史가 이 두 사람을 얼마나 존경해 마지않았던가를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당시 연경학계의 巨儒로서 翁은 元老였고 阮은 壯年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翁方綱은 당시 書藝와 金石學의 1인자로서 秋史와의 첫 번째 면담에서 즉석에서 “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할 만큼 秋史에 감탄하여 온갖 金石眞蹟을 보여주며 그의 鑑識眼을 뜨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秋史는 燕京에 머무르는 5개월 동안 翁의 서재에 무단출입하면서 그의 제자들과도 깊은 학연을 맺었고 특히 翁의 아들인 樹培와 樹昆과는 兄弟의 義를 맺게 되는데 이것들은 뒷날 秋史가 中國의 여러 新籍을 접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阮元 역시 淸朝 經學의 正統을 잇는 巨儒이며 또 금석학에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自家 著述의 많은 經學, 金石學 관계의 서적 및 시문집 등을 秋史에게 기증하는 등 아낌없는 情誼를 베풀었다.

翁方綱과 玩元은 經學니나 金石學, 書法 등에 있어서 秋史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翁의 經學인 漢宋不分論(주1)이 秋史 經學의 基本을 이루고 있다.

첫째는 박제가(1750~1815)와의 만남이다. 秋史가 6세 되던 해 그가 쓴 立春帖을 京邸인 月城尉宮 대문에 붙였는데 그 당시 北學派의 旗手였던 박제가가 이를 보고 魯敬을 찾아가 “이 아이가 장차 학문과 예술로써 세상에 큰 이름을 날릴 것인데 내가 장차 잘 가르쳐 성공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魯敬은 秋史가 15세 되던 해에 박제가에게 보냄으로써 그의 학문 방향은 자연히 北學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조선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秋史의 예술과 학문의 基礎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秋史가 魯敬을 따라 燕京에 갔을 때 淸의 숱한 文人名士들로부터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귀중한 資産이 되었던 것이다.

秋史 金正喜(1786~1856)는 正祖 10년(1786)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 말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던 桑村 金自粹의 후손이다. 桑村은 朝鮮이 建國되자 고향이던 안동으로 내려가 太宗의 부름을 거절하며 은둔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당시의 隱遁 士大夫들처럼 이 집안도 朝鮮朝에 出任하게 되어 桑村의 死後 하급 관리로 시작하여 曾孫인 僖 때에는 太宗의 4男 謹寧君의 사위가 되어 宗戚家門이 된다. 그리고 秋史의 7代祖 弘郁에 이르러 서산 한다리를 중심으로 하는 막강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충청, 황해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그의 가문은 甲族으로 성장하였다. 그 후 弘郁의 子孫은 크게 번영하고 왕실과도 戚分을 맺게 되는데 弘郁의 증손자인 興慶(1677~1750)은 領議政을 역임했고 興慶의 末子 漢盡(1720~1758)은 英祖의 가장 사랑 받던 長女 和順翁主의 남편이 됨으로써 月城尉에 封해진다. 그래서 英祖는 현재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일대를 月城尉家에 別賜田을 내리고 각 고을의 守令에게 명하여 五十三間의 집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月城尉가 39세로 夭折하고 和順翁主 역시 殉死함으로써 月城尉의 長男인 漢楨(1703~1764)의 三子인 頤主(이주 1730~1797)로 뒤를 잇게 하여 國王의 外孫으로서 淸要의 職을 거치게 하니 그의 長子인 魯永(1747~1797)은 禮曹參判, 次子魯成(1754~1794)은 수원 判官, 四子 魯敬(1766~1837)은 吏曹判書, 그리고 조카인 魯應(1757~1824)은 兵曹判書에 이르른다. 뿐만 아니라 弘郁의 末子 계통에서는 그의 玄孫 한구(1723~1769)의 딸이 英祖의 繼妃(정순왕후)로 책봉되어 그는 鰲興府院君(오흥부원군)이 되고 그 형제 자손이 朝廷의 要職을 거치면서 瑞山 한다리 김씨 가문은 老論 僻派의 중심으로서 思悼世子를 제거할 만큼 세력이 성장하였다. 秋史는 이처럼 名門巨族이 된 경주 김씨 한다리 가문 중에서 왕실의 외척인 月城尉家의 혈통을 이어 받아 吏曹判書 魯敬의 長子로 月城尉의 鄕邸인 예산 龍宮에서 태어났다.

 

秋史 金正喜의 字는 元春이며 號는 秋史 이외에 阮堂, 覃齋, 寶覃齋, 禮堂, 老果, 果坡, 勝蓮老人 등 수십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