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2편

우리나라의 예언서들/ 정역, 격암유록, 정감록, 토정비결

김현거사 2016. 1. 14. 10:01

우리나라의 예언서들

 

정역, 격암유록, 정감록, 토정비결

 

  2012년에 지구 종말이 온다고 한 16세기 프랑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한때 세상이 떠들썩 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2012년이 지나가자 서양 사람들이 잠잠하게 되었다.

 우리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싶어 하고, 예언에 민감하다. 그래 아침에 일어나면, 하다못해 그날 일진을 알기 위해, '화투 점' '윷 점'을 친다. 

 옛날 선비들은 역학, 천문, 지리, 풍수, 복서(卜筮), 상법(相法) 등을 배웠다. 

 '역학'은 천지 운행을 의미하는 주역 팔괘를 통해 미래를 점치는 것이고, '천문'은 별을 관찰하여 천체 운행과 인간 길흉 성쇠를 알려고 한 것이다.  '지리'는 기후, 물산, 교통, 산과 강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며, '풍수'는 땅의 위치와 방위, 생김새로 길흉을 논한 것 이다. '복서'는 복(卜)이 주로 귀갑·수골(獸骨)을 태워서 그 균열이 생기는 모양으로 길흉을 알아보는 점법이고, 서(筮)는 산가지[算木]와 서죽(筮竹)을 이용해 그 숫자의 결합에 따라 괘(卦)를 세우는 방법이다. '상법'은 생김새를 보고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는 관상법 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과학적 요소도 있고, 미신적 요소도 있다. 믿을 수도 않믿을 수도 없다. 그러나 민중이 꼭 알고싶은 것이 미래다. 그래서 이들을 <미래예측학>이란 학문으로 묶어, 지금은 과학적 재조명을 해 볼 때다.   

 

 정역(正易)

 

 '역학'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역술인이다. 그러나 '역학'은 미아리 고개 점쟁이들 전유물이 아니라, 동양의 철학적·종교적 최고 원리로 인식되어온 학문이다. <주역>은 중국을 비롯해 한자 사용하는 여러 민족이 과거 수천 년 읽어 온 고전이다. 주나라 때에 형성된 <주역>은, 그 효사(爻辭)에 나오는 문구나 사건들이 은(殷) 왕조에 성행하던 갑골 복사(甲骨 卜辭)의 점(占) 치는 문구와 동일하다. 그런 점으로 보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론이다.

 퇴계나 서경덕 등 한국 성리학 중심 인물들은 모두 이 <주역>을 공부했다. 그 <주역>에서 살짝 벗어나 파생된 예언서가 '정역(正易)'이다.

 

 지금부터 백 년 전 계룡산 국사봉에서 20여 년 도를 닦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8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김재일(金在一), 후에 일부(一夫)라는 호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부선생은 선비 집에서 태어나 주역과 성리학을 연구하다가 인간 미래에 대한 완전한 비답(秘答)을 구하고자 계룡산에 입산했다. 그 후 20년이 경과된 어느 날, 기이한 현상을 보았다. 천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현상이 보이면서 만유의 이치를 상징하는 역괘(易卦)가 명확히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를 근거로 '정역(正易)'을 만들었다.

 그는 <정역>이 복희씨가 만든 팔괘나 문왕이 만든 후천팔괘도(後天八卦圖)를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동안 수천년 사용된 팔괘도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의 위치가 측면에 위치하여 세상살이가 혼란했는데, 정역(正易)에선 맨 위에 아버지, 맨 아래에 어머니, 좌우에 자녀들이 부모를 받들고 있는 구조로 앞으론 태평성대가 온다는 것이다. 

 정역 시대엔 지금 125도로 경사져 기울어진 지구의 상태가 바르게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다. 주역에서 말하는 이칠화(二七火)가 하늘에 있다가 땅 속으로 들어가 높은 열기를 뿜어, 빙산이 녹아내리기도 하고, 곳곳에서 화산이 터지고, 온천이 분출된다고 한다. 빙하가 녹아 바닷물이 넘치고, 일본 같은 섬나라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물에 잠기고, 땅이 갈라지고, 희말라야 산맥도 갈라져 평지가 된다고 한다.

 이런 시기는 약 2-3 백 년 지속되는데, 이것이 후천개벽(後天開闢) 시대가 열린 것이라 한다.

 복희역은 문자가 없던 시대에 만들어진 소박한 역(易)이요, 문왕역은 문자 시대에 만든 역(易)이다. 일부(一夫)의 역(易)은 전자들이 과거와 현재를 나타내는 역인 데 비하여, 미래 후천역이다

 어쨌던 유불선에 능통했던 탄허(呑虛)스님이 '정역'에 감탄하여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책자를 저술하기도 했다.

 

 6. 25를 예언한 격암유록(格菴遺錄)

 

 '남사고 비결(南師古 秘訣)'로 불리는 '격암유록'은 조선 명종 때 격암(格菴) 남사고(1509-1571)가 어린 시절 신인(神人)을 만나 전수받았다고 주장한 책이다.

 이 책 서두에는 저자에 대한 간략한 약력 소개가 있고, 예언서(豫言書)·세론시(世論視)·계룡론(鷄龍論) 등 논 18편, 궁을가(弓乙歌)·은비가(隱祕歌) 등 가사 30편, 출장론(出將論)·승지론(勝地論) 등 논 10편, 말초가(末初歌)·말중가(末中歌) 등 가사 3편이 있다.

 내용 중 특이한 것은 미래의 시기나 사건을 은어나 파자(破字),·속어,·변칙어 등을 사용하여 보는 사람들이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도록 한 점이다.

 한반도 미래를 예언했는데, 임진왜란, 동학혁명, 한일합병, 해방, 6.25, 4.19, 5.16과 이승만 박정희 출현을 예언했고, 2012년 박씨 성을 가진 여성 지도자(박근혜?)가 나타나 분열된 동서를 화합한다고 예언했다.

 '격암유록'은 천기(天機:하늘의 기밀)를 담은 책이라 비밀리에 자손들의 손에 보관되어 오다가, 1977년 이도은(李桃隱)이 필사본을 내놓아,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점에 가면 여러 출판사에서 낸 책이 있다. 몇 대목 살펴보자.

 

 <말운론>에서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서 인민이 죄 없이 살생된다'고 예언했다.

 또 백호(白虎)의 해에 병화가 있을 것이라 했는데, 호랑이 해 중 흰색을 상징하는 경(庚) 자가 든, 1950년 경인년(庚寅年)에 6.25 병화가 일어났다. 더 신기한 것은, 피난처는 부산이 될 것이라 예언한 점이다. 

 비결에 '목인비거후 대인산조비래(木人飛去後 待人山鳥飛來)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풀이하면,  '木人'은 두 글자를 합하면 박(朴) 이다. '飛去後'는 죽은 뒤란 뜻이다. '人山鳥'는 사람 인(人), 멧 산(山), 그리고 새 조(鳥=隹) 자로, 합하면 崔가 된다. 박씨 죽고나면 최씨가 나라 다스린다는 말로, 박정희 다음 최규하를 의미한다.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 통일의 시기는 언제 올까?

 '통합지년 하시(統合之年 何時), 용사적구 희월야(龍蛇赤狗 喜月也), 백의민족생지년(白衣民族生之年)'이라 하였다. 풀이하면, '통일의 그 해는 언제인가? 용이나 뱀의 해, 혹은 붉은 개의 해가 된다. 이는 병술년(丙戌년) 2006년, 병진년(丙辰年) 2036년, 정사년(丁蛇年) 2037년 이라는 것이다.

  남사고는 천문 지리에 박식하여 종6품 관상감을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별을 보고 자기 목슴이 다한 것을 알고, 벼슬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문 지리 능통한 남사고도 인간 수명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광해군 이후 역모사건 때 등장한 괴문서다. '국운이 쇠퇴했다', '한양의 지덕이 쇠했다'는  내용이 위정자에게 불온하였다. 그래 조정에서 금서령을 내리고, 위반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예언서다.

그 정감록이 조선 후기 민중들 사이에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 1920년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신봉자가 수백만에 달했다고 한다. 

 저자는 정감(鄭鑑) 혹은 이심(李沁)이라고 한다. 혹은 도선국사, 무학대사, 정도전이라는 설도 있다.

'정감록'은 10여 종류의 비기(秘記)를 한데 묶은 것이다. 각종 감결(鑑訣)과,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무학비결(無學秘訣)·삼도봉시(三道峰詩)·옥룡자기(玉龍子記)를 묶은 것이다.

 

 내용은 정감과 이심이라는 두 인물 대화로 시작된다. 

 첫 장에 자신이 사마의나 제갈량 보다 낫다는 구절이 나온다.

 주로 우리나라의 풍수를 논한다. 

 

 곤륜산에서 내린 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로 평양이 천 년 운수를 지녔으나, 개성 송악으로 옮겨졌다. 개성은 5백 년 도읍할 땅이지만, 요승이 난을 꾸며 땅 기운이 쇠하여 운이 한양으로 옮겼다. 그 맥이 내려가 태백산, 소백산에서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으로 들어간다. 계룡산은 정씨가 8백 년 도읍할 땅이다. 그 지맥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조씨가 1천 년 도읍할 땅이다.

 또 전주는 범씨가 6백 년 도읍할 땅이요, 개성은 왕씨가 다시 일어날 땅이다. 나머지는 상세치 않다.

 

 우리나라에는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다. 이곳은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않아 난을 피하기 쉽고,  흉년이 들지 않는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金鷄村)으로 소백산의 두 물골 사이에 있다.

 

 * 소백산 아래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이 그곳이다.1959년 한 발표에 의하면, 풍기로 전입한 주민들 이주동기 중에 8%가 정감록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부분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로 인삼과 과수를 재배하거나 소백산 기슭에서 밭농사를 하며 살았다. 근래까지 후손이 살았는데, 그 중 풍기의 십승지를 필사한 지도를 소장한 사람도 있었다.

 

 둘째는 화산(花山) 소령(召嶺) 고기(古基)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奉化)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甑項)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 다치지 않을 곳이다.

 넷째는 운봉(雲峰) 행촌(杏村)이다.

 

 * 운봉 사람 곽재영이 말하기를 '읍에서 25리가 지리산 반야봉 괘협처(掛峽處)인데, 석벽 높이가 몇 길이나 되는데 동점(銅店)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글자의 획이 어지러이 소멸되어 분간하기 어려운데, 예전에 구리를 캔 흔적이 있다. 동점촌은 땅이 평탄하지만 가운데 앉아 있으면 사방이 보이지 않고, 주위가 30- 40호가 거주할 만한 땅이다' 하였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金塘室)로, 이 땅은 난이 일어나도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維鳩) 마곡(麻谷)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 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 쪽 상류인데,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 하다. 그러나 수염 없는 자가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여덟째는 무주(茂朱) 무봉산 동쪽 동방(銅傍) 상동(相洞)이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萬壽峰)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십승지는 대개 산 높고 계곡 깊어 수원(水源) 충분하며, 토양 비옥하고 온화한 기후 조건 갖춰진 곳 이다. 농경을 통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적 환경조건을 지녔다. 

 

 이런 이상향 사상은 동서양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서양은 이스라엘의 선악과가 자라던 에덴동산, 베르길리우스가 읊은 그리스 중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카디아, 프라톤이 말한 화산 폭발로 바다 속에 사라진 그리스 산토리니 섬 부근의 아틀란티스, 토마스무어의 소설에 나오는 유토피아가 있다.

 중국은 <사기> '봉선서(封禪書)'에 나오는 발해만에 있다는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 三神山), 도교의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살고있는 옥천궁(玉泉宮),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 힐튼의 소설에 나오는 샹그릴라가 있다.

 인도는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상상한 수미산(須彌山), 쉬바(Siva) 신의 거주처 희말라야의 카알라사(Kailasa) 산이 있고, 티베트 전설에는 내륙 아시아의 어디엔가 있다고 전해지는 가공의 왕국 샴발라(Shambhala)가 있다.

 한국에도 경북 상주 근처 오복동, 대전의 식장산, 제주도 아래의 이어도, 지리산 청학동이 있어, 그곳을 낙토(樂土), 복지(福地), 승지(勝地), 길지(吉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라 불렀다. 

 

 토정비결(土亭秘訣)

 

 요즘도 인터넷에서 무료 제공되는 것이 '토정비결(土亭秘訣)' 이다. '토정비결'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조선 중기 학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다. 그러나 실은 토정이 쓴 것은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토정비결 보는 방법은 이렇다.

 상괘(上卦)는 나이와 해당 년의 태세수(太歲數)를 합한 뒤 8로 나눈 나머지 숫자이며, 나머지가 없으면 8이 된다. 중괘(中卦)는 해당 년의 생월 날짜 수(큰 달은 30, 작은 달은 29)와 월건수(月建數)를 합해 6으로 나눈 나머지 수이다. 하괘(下卦)는 생일수와 일진수(日辰數)를 합한 뒤 3으로 나눈 나머지 수이다. 이 세 자리수로 된 괘를 책에서 찾아보면 된다. 그 해의 운수에 대한 개설이 나오고, 월 별 풀이가 나온다.

 운세는 4언3구의 싯구로 풀이되는데, ‘뜻밖에 귀인이 내방하여 길한 일이 있다.’, ‘구설수가 있으니 입을 조심하라.’, ‘봄바람에 얼음이 녹으니 봄을 만난 나무로다.’ 등 이다.

 

 토정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다. 보령에서 출생했고, 영의정 이산해가 그의 조카다.

 젊어서 학문에 뜻을 둔 후로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여 경전에 모두 통달하여 과거에 응시하려 했는데, 마침 이웃에 과거 급제한 자가 있어 연희 베푸는 장면을 보고는, 그것을 천하게 여겨 그만두었다.

 외모는 키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고 골격도 건장했다. 얼굴은 검으면서도 둥글고 살집이 좋았으며, 발 길이가 거의 한 자나 되었고, 목소리는 맑고 우렁찼다. 

 자신 보다 남을 위하였다. 모산수(毛山守)의 딸에게 장가 갔는데, 초례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왔다. 사람들이 그가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니, '홍제교를 지나다가 얼어죽게 된 거지아이들을 만나 도포를 세 폭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고 하였다.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토정’이라는 흙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역에 능통한 그에게 사람들이 몸이 아파도 장사가 않되어도 찾아오고, 구름처럼 모여들어 며칠씩 순서 기다리며 운명을 봐달라는 통에 '토정비결'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토정비결'이 너무나 신통하게 맞자. 백성들이 일은 않고 약은 꾀로 살려고 해서, 절반만 맞도록 고쳤다고 한다. 

  행적은 기이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가족들에게 말도 없이 훌쩍 떠났다가 홀연히 나타나곤 했다. 열흘 걸어 다니며 생식(生食) 해도, 눈은 빛을 내고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길을 가다가 졸리면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몸을 굽인 채 머리를 숙이고 잤는데, 숨 쉬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항상 가난했고, 형색도 특이했다. 쇠를 두들겨 만든 쇠갓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목이 마르면 그 갓으로 물을 떠먹고, 배가 고프면 그 갓으로 밥을 해먹고, 세수할 땐 대야로 썼다. 

 그의 기이한 행적은 실록에 실릴 정도였다. 선조실록에,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초립(草笠)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城市)에 다니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어떤 때는 천 리 먼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하였고, 배를 타고 바다에 떠다니기를 좋아하여 제주도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 번도 위험한 고비를 겪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포천 현감으로 일할 당시는 고을이 빈약하여 곡식이 모자라자 국가에 상소, '바다에 물고기가 많고,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바다에 저렇게 많이 떠 있고, 해만 뜨면 소금이 만들어지는 이 넓은 바다를 두고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소인에게 소금 염전 사업을 주신다면 온 나라에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자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초야로 돌아갔다.

 

 토정이 남긴 저서에 국운을 예언한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 있는데, '우리나라 국운을 원숭이, 쥐, 용 해에는 병란이 있고, 범, 뱀, 돼지 해에는 혼란과 형살이 일어난다' 예언했다. 과연 용 해에 임진왜란이 있었고, 역시 용 해인 1926년 갑진년(甲辰年) 광주 학생 운동이 있었고, 뱀 해에 을사사화가 있었다.

 

 만년에 아산 현감으로 재직하다 갑자기 병으로 죽었는데, 그가 죽자 충청도 사람은 물론, 그가 살았던 마포의 백성들이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