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2편

제주에서 난 용마/ 이제마의 <사상의학>

김현거사 2015. 11. 11. 08:22

 

  제주에서 난 용마/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

 

 허준의 동의보감이 나온지 2백년만에 이제마(李濟馬, 1837~1900)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이 나왔다.

 동의보감은 사람을 일반으로 분류하여 처방을 한데 비해,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의 사상의학은 인체의 생리적인 구조에 따라 사람의 체질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그에 따른 치료를 제시하였다.

 즉 사람은 태양인(太陽人)·소양인(少陽人)·태음인(太陰人)·소음인(少陰人)이 있는데, 태양인은 폐대간소(肺大肝小), 소양인은 비대신소(脾大腎小), 태음인은 간대폐소, 소음인은 신대비소(腎大脾小)이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장부허실(臟腑虛實)이 있고, 이에 따른 희노애락의 성정(性情)이 작용하여 생리현상을 빚는다. 따라서 사상 체질에 맞는 음식과 양생법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체질에 대한 논의는 서양의 히포크라테스시대부터, 동양의 황제내경(黃帝內經)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고대 그리스철학은 우주의 구성이 화(火)·수(水)·풍(風)·토(土)의 네 요소로 되었다고 보았다. 인체 형성도 혈액,·점액(粘液),·담즙(膽汁),·흑담즙(黑膽汁)의 사액체(四液體)로 구성되었다고 본 것이 히포크라데스의 체액병리설(體液病理說)이다.

 이를 기초로 갈레노스는 기질설(氣質說)을 내놓았는데, 기질설은 다혈질,·담즙질,·우울질,·점액질로 분류한다. 다혈질은 온정적이요 정서적이며 명랑하고 사교적이지만 흥분을 잘한다. 담즙질은 인내심이 적고 정서적이요 흥분을 잘하고 단기(短氣)지만 용감하고 객관적인 사고를 한다. 우울질은 인내심이 강하고 지속적이며 우울하고 보수적이며 주관적이다. 점액질은 냉담하고 고집이 세며 감정이 느리고 조용하며 인내심이 강하고 부드러운 데가 있다.

 이런 네 기질의 특성으로, 다혈질에는 실업가가 많고, 우울질에는 학자가 많고, 담즙질에는 영웅·호걸·충신이 많고, 점액질에는 종교가·도덕가가 많다고 하였다.

 

 사상의학

 

 동의수세보원은 4 부로 나누어져 있다. 첫부분은 사상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나머지 세 부분에서는 사상의 각 체질과 각종 병 증세를 사상에 의해 치료하는 처방전이 나온다.

 

 그럼 사상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체질은 네 가지로 나뉜다. 사람이 날 때 타고난 장부는 서로 같지않은 네 가지가 있다.

폐가 크고 간이 작은 자를 태양인이라 하고, 간이 크고 폐가 작은 자를 태음인이라 하며, 지라가 크고 콩팥이 작은 자를 소양인이라 하고, 콩팥이 크고 지라가 작은 자를 소음인이라 한다.

 

 

 태양인

 

 태양인 체형은 폐가 크고 간이 작기 때문에 목덜미의 일어난 기세가 웅장하고, 허리 아래는 외롭고 약하다. 노여위 하는 성질이 몹씨 급하여 그 기운이 간을 격동시켜서 간이 더욱 깍이어 간이 적다. 보통 이마가 넓고 관골이 나왔으며 눈에는 광채가 있다. 또한 간이 작으므로 척추와 허리가 약하며,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기대어 앉거나 눕기를 좋아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 오래 걷지 못한다.

 여자인 경우에는 몸이 건강해도 자궁 발육이 잘 안 되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성격은 직선적이고 말이나 행동에 거침없다. 남들과 잘 어울리고 과단성·진취성이 강하다. 또한 머리가 명석하고 창의력이 있어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연구한다. 반면에 계획성이 적고 대담하지 못하며, 남을 공격하기 좋아하고 후퇴를 모른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창조적인 면이 강하므로 연구직, 음악가 등에도 적격이다. 

 이 태양인은 더운 것보다는 차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뜨거운 음식을 오래 먹게 되면 위가 상하거나 식도경련, 식도협착증 같은 것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폐로는 숨을 내뿜고 간으로는 빨아드린다. 간이나 폐는 공기와 혈액을 호홉하는 문호인 것이다.

 

 소양인

 

 소양인은 슬퍼하는 성정이 몹씨 급하여 기운이 콩팥을 격동시켜서 콩팥이 작다.  

 체형은 지라가 크고 콩팥이 작으므로 흉곽이 발달되고 허리 아래 관골부(寬骨部)가 약하다. 대개 가슴이 충실하고 발이 가볍다. 머리는 앞뒤가 나오거나 둥근 편이고, 얼굴은 명랑하다. 눈이 맑고, 입은 과히 크지 않고 입술이 얇으며 턱이 뾰족하다. 피부는 희지만 윤기가 적고 땀이 별로 없다. 말소리는 낭낭하다.

 쓸데없는 이론을 싫어하며, 말할 때는 논리적이지 못하다. 무슨 일이나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내기 때문에 실수가 많고, 싫증을 내기 쉬워서 용두사미격이 된다. 판단력이 매우 빠르나 계획성이 적으며, 일이 안 될 때는 체념을 잘한다.

 여자는 다산을 하지 못하고 남자는 양기부족이 많다. 

 성격은 굳센 기상이 장점이고, 사무에 재간이 있어 직장 내에서 감찰업무를 정확히 해낸다. 명예를 중시하고 외향적인 일을 좋아하므로 교육사업이나 사회사업에 적격이다.

 항상 열이 있으므로 체질상 더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겨울에도 냉수를 좋아한다.

 

*지라는 받아드리고 콩팥으로는 내보낸다. 콩팥과 지라는 음식을 출납하는 창고인 것이다.

 

태음인

 

 태음인은 즐그워하는 성정이 몹씨 급하여 그 기운이 폐를 격동시켜서 폐가 더욱 깍이게 된다. 간이 크고 폐가 작으므로 허리가 발달하고 목덜미 위가 약하다.

 골격이 굵고 키가 크며 살찐 사람이 많고 특히 손발이 큰 편이다. 얼굴은 윤곽이 뚜렷하여 눈·코·귀·입이 크고 입술이 두텁다. 턱이 길고 두터워 교만하게 보인다. 몸에는 늘 땀기가 있고 활동을 하면 땀이 잘 흐른다. 찬밥을 먹을 때도 땀을 흘린다. 땀을 흘려도 건강에는 이상이 없고 도리어 신진대사가 잘 되므로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눈매가 시원스럽고 남자의 경우는 눈끝이 치올라가서 범상하고 또 성난 사람 같은 인상을 준다. 

 성격은 겉으로는 점잖으나 속은 음흉하여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이 넓을 때는 바다와 같고, 고집스럽고 편협할 때는 바늘구멍 같이 좁다. 자기 주장을 말할 때는 남들이 좋아하거나 말거나 끝까지 소신을 피력하는 끈질긴 성격이다.

 태음인은 식성이 좋고 대식가가 많으나 성격상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므로 때에 따라 폭음폭식을 하여 위를 손상시키는 일이 많다.

 

소음인

 

 소음인은 기뻐하는 성정이 몹씨 급하여 그 기운이 지라를 격동시켜서 지라는 더욱 깍이게 된다. 비위(脾胃)가 허약하고 신방광(腎膀胱) 부위가 발달되어, 상체보다는 하체가 실하지만 위아래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용모가 잘 짜여 있어 여자는 오밀조밀하고 예쁘며 애교가 있다. 피부가 매우 부드럽고 밀착하여 땀이 적으며 겨울에도 손이 잘 트지 않는다. 몸의 균형이 잡혀서 걸을 때는 자연스럽고 얌전하며, 말할 때는 눈웃음을 짓고 조용하고 침착하며 논리정연하다. 

 성격은 겉으로는 유연해도 속은 강하다. 작은 일에도 세심하고 과민하여 늘 불안한 마음을 갖는다. 머리가 총명하여 판단력이 빠르고 조직적이며 사무적이다. 자기가 한 일에 남이 손대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남이 잘하는 일에는 질투가 심하다. 늘 불안정한 마음을 가지므로 신경증 환자가 많다.  

 직장 내에서 기획부서나 인사부서에 적합하고, 소극적인 편이므로 프로젝트 자체를 결정하는데는 적임이 아니다.

 소음인은 먹은 것이 소화가 잘 안 되고 장이 약하다. 소음인에 이로운 음식은 닭·양·염소·노루·꿩·대추·사과·귤·복숭아·시금치·미나리·양배추·찹쌀·조 등이다.

 

*슬퍼하는 기운은 곧게 오르고, 노여워하는 기운은 가로 퍼지며, 기뻐하는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고, 즐거운 기운은 밑으로 내려간다. 위로 올라가는 기운이 지나치게 많으면 상초(上焦)가 상한다. 

 

사상의학은 각 개인의 체질을 구체적으로 더욱 세분한 우수한 측면을 갖고 있으나, 정확한 체질은 주관적 판단에 의존한다는 점, 또 4가지의 체질이 때론 서로 중복되는 측면이 있는 점이 단점이다. 

 그러나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상의학은 사람의 활동능력과 적응능력을 지배하는 반응능력을 설명하고 유전생물학적인 차이점을 규정한 독창적 이론이다. 또한 체질적 측면과 개체의 특성을 논하여 생리적·심리적인 면을 연결하는 한의학의 전체적 개념을 잘 구현한 학설이라 볼 수 있다.

 

사상체질의 인구 수

 

  보통 한 고을에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인을 살펴볼 때 인구를 만 명으로 가정하면, 태음인 5천 명, 소양인 3천 명, 소음인 2천 명, 꼴이며 태양인은 극히 드물어 한 고을에 3-4명 정도 된다.

 

 그러나 정확한 체질을 알기란 퍽 어려운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제마의 다음 일화가 있다.

 한번은 어떤 처녀가 중한 병으로 찾아왔는데 아무리 뜯어봐도 체질을 알 수 없어, 비상수단을 쓰기로 하였다.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에 단 둘이 있는 데서 옷을 한 가지씩 벗으라고 명하니, 처녀는 의사의 명이니 거역할 수 없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씩 옷을 벗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속옷만 남자 마저 옷끈을 풀고 일어서라 하니 처녀는 어쩔 줄 몰라 쩔쩔 매었고 이제마가 처녀의 옷을 잡아챘다. 처녀는 수치심을 참을 수 없어 악을 쓰며 반항을 하였는데, 이러는 사이에 그의 본성을 알 수 있었으므로 이제마가 옳다 알았다 이제는 옷을 입어라 하고 소양인체질로 단정하고 약을 써서 불치의 병을 고쳤다 한다.

 또 서울에 사는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이 그를 찾아왔을 때도 최린의 손발을 만져 보고 글씨를 써 보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는 마루 옆에 쌓아 놓은 장작을 마당으로 옮겨 놓으라고 했다. 천도교의 거물인 최린도 체신을 돌보지 않고 장작을 한 아름씩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시키는 대로 옮겨 놓았다. 이제마는 최린의 행동을 마루에서 내려다보며 그의 체질을 파악한 뒤 그만 들어오라고 하여 소음인으로 진단 내리고 처방했다.

 

사상의학의 동기

 

 이제마가 사상체질을 창안하게 된 것은 자신이 오랜 신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해역증(解㑊症)과 열격반위증(噎膈反胃症)이라는 병증세가 있었다.

 해역증은 상체는 완건(完建)한데 하체가 무력하여 오래 행보를 못하는 것이다. 원인은 간신(肝腎)의 기능이 허손되어 생긴 것으로  피를 공급하지 못하는 것이다.

 열격은 음식물을 먹은 즉시로 토해 내는 것이요, 반위는 열격증보다 완만하여 아침에 먹은 것은 저녁에 토하고 저녁에 먹은 것은 아침에 토해 내는 것이다. 이 병의 원인은 태양인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거나 분노와 비애를 자주 일으켜서 간신의 기를 상하게 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이 두 가지 병을 앓은 경험 때문에 많은 의서를 탐독하게 되었고, 고전에 의거한 여러 가지 약은 병이 낫지 않으므로 여기서 사람은 각기 체질이 다르다는 세 이론을 깨달았다고 한다. 

 

제주에서 난 용마

 

 이제마는 함흥에서 전주 이씨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진사 이반오가 어느날 술에 취해 주막에 묵게 되었는데, 이 주막에 늙은 주모가 과년한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그 딸은 인물이 박색일 뿐만 아니라 본래 사람됨이 변변치 않아 시집 보낼 생각조차 못하고 있던 중이었다. 

 주모가 이진사의 방에 딸을 들여 보내 동침을 하게 했는데, 이 일이 있은지 열달이 지난 후 할아버지 충원공이 제주도에서 용마를 얻는 꿈을 꾼 후, 어떤 여인이 강보에 쌓인 아이를 안고 들어오므로, 꿈을 생각하여 이들 모자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아이 이름을 제주도에서 말을 얻었다고하여, 제마(濟馬)라 명명하였다.

 

 제마는 어릴 때 글을 배웠지만, 조선의 인재등용 정책에서 배제되던 함흥 사람이었다. 거기다 서자라, 벼슬은 차마 생각치 못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더 재미를 붙이다가, 15세의 나이로 훌쩍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 방랑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자기 몫의 재산을 모조리 빈민들에게 나눠 주고 집을 나서서 기인의 생활을 했다.

  만주로 건너가 부호 홍씨 집에 덧붙어 살면서 홍씨의 많은 책을 쌓아 놓고 섭렵 했고, 정평(定平) 가는 길에 한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 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아무렇게나 발라 놓은 벽지에 눈길이 갔다. 그는 벽지를 보다가 깜짝 놀라 주인을 깨워 벽지로 사용한 책종이가 어디서 난 것이냐고 물었더니, 집주인은 돌아가신 아버지 한석지(韓錫地)가 지은 《명선록(明善錄)》인데, 쓸모가 없어 벽지로 발랐다고 했다. 이제마는 그 벽지를 한 장 한 장 뜯어내서 책으로 묶고 자세히 읽었는데, 책 내용은 고루한 성리학을 매도하고 유교적 관념의 세계를 신랄하게 비평한 것이었다. 이제마는 그 책에 푹 빠져 한석지를 마음의 스승으로 받들며 그의 제자로 자청했다.

 또 장성에서 당시 독창적인 성리학 이론으로 제자들을 기르고 있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만나 학문을 익혔다. 스승이 있다면 먼저 죽은 한석지가 있고, 그 다음으로 기정진 이다.

 훗날 이제마는 서울의 무장 김기석의 눈에 들어 그 집 식객 노릇 하다가  50세에 진해현감·벼슬자리에 앉았지만, 오랜 방랑생활을 한 탓인지 위궤양에 시달렸고, 병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아, 1894년 명저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완성하여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말년에 이 책을 더 보완하며 만세교 옆에 ‘원기를 보존하는 곳’이란 뜻의 보원국(保元局)이라는 약국을 열고, 그를 찾아오는 병자를 무료로 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