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마시는 것에 대해서/ 동방문학 2016년 2월호

김현거사 2016. 2. 17. 15:30

  마시는 것에 대해서

 

 요즘 은행에 가면 자판기에서 커피를 맘대로 뽑을 수 있다. 기원에도 무료 자판기가 있다. 

70년대는 출근하면 모닝커피란 걸 시켰다. 그러면 지분 냄새 풍기는 다방 아가씨가 한 손엔 커피 주전자, 한손엔 커피 잔 담은 보따리 들고 사무실에 나타난다. 기자들은 평기자나 데스크나 마찬가지다. 다방 레지 오면 낄낄 거리며 농담 던지는 일로 하루 일과 시작한다. 모닝커피는 계란 노른자가 동동 떴고, 쌍화차는 대추와 계피가 들어있다. 그러나 나는 쌍화차는 비싸고, 커피는 맛을 몰라 녹차만 시키곤 했다. 그랬더니 한 10년 지나자 내 몸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어느새 얼굴빛이 어린애처럼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해진 것이다. 불교신문 시절 화계사 스님한테서 차의 좋은 점을 귀 따갑게 들었지만, 차가 그렇게 좋은 줄 예전엔 미쳐 몰랐다. 

 

 막걸리는 대학에서 배웠는데, 내가 다닌 데가 막걸리대학 이다. 교수고 학생이고 막걸리 잘 마시는 사람을 존경했다. 응원가도 '막걸리 찬가'란게 있었다. 국어 가르치던 조지훈 교수는 전작으로 강의실에 얼굴이 불콰해서 들어왔다. 

 이 학교에 들어가서 아무 재주 없던 나도 주목 좀 받았다. 미식축구 부원끼리 도봉산 야유회 가서 촌놈이 막걸리 한 말을 마셔버린 것이다. 한 말이면 열 되 아닌가. 맹물도 열 되면 힘든다. 서울 친구들은 입만 까졌지 몸은 대채로 약골인데, 여기에 질려버렸다. 그래 존경과 질시를 반쯤 섞어 나를 '지리산 곰'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군에서도 술 실력은 인정 받았다. 나는 항만사령부 자동차대대 운전병인데, 항만사령부는 미국서 오는 군수물자를 부산과 진해의 기지창에 날랐다. 언젠가 한번 중대 내무반에서 술 대회가 열려, 내가 백여명 중대원 중에서 주량 2등으로 뽑혔다. 1등은 인천 부두 깡패 출신 정봉율 병장이었다. 그게 자랑인진 모르겠으나, 대학 선배인 ROTC 소대장 홍소위가 대대 5백여 운전병 가운데 유일한 대학생이라 가끔 나를 장교 주석에 초대하곤 했다. 별다른 재주 없던 내가 술에서 자아정체성을 발견한 것, 이건 기억해둘만한 일이다. 그 막걸리가 유산균과 항암성분이 맥주나 와인에 비해 2백배나 많다는 건 예전엔 미쳐 몰랐다.

 

 연기도 마시는 것이니 담배도 일종의 마시는 것이다. 그걸 배운 데는 군대인데, 거기서 나는 국가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지급하는 담배란 걸 만났다. 그건 입는 것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모품이다.

 그런데 나는 국가가 하는 일에 이렇다 저렇다 딴지를 거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래 콜록콜록 기침하며 열심히 협조하던 끝에 드디어 훈련소 9주 기간 중에 담배의 묘미를 체득한 것이다. 땀 뻘뻘 흘리며 PRI 훈련 받다가 '10분간 휴식' 소리 들릴  때, 칼빈총 메고 달빛 아래 수백 대 GMC가 늘어선 주차장에서 혼자 보초 설 때, 나는 화랑담배가 약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허공에 사라지는 담배연기 보면서, 나는 고통 끝에 오는 휴식의 즐거움 알았고, 고향의 의미 깨달았다. 담배는 향수 자극하는 물건이요, 현실의 고통 잊게하는 약이었다. 그 담배가 정신 건강에 그리 좋은 줄 예전엔 미쳐 몰랐다

 

 끽연과 음주와 녹차, 이 세가지야말로 인생에 꼭 필요한 벗 이다. 술과 담배와 차는 설월화(雪月花)와 같다. 눈을 구경하는 덴 감수성 많은 벗이 필요하고, 달을 감상하는 데는 감상적 친구가 필요하고, 꽃구경은 미모의 여인이 필요하다. 요컨대 술 담배 차 역시 같이 즐길 벗이 필요한 것이다.

 

 차를 마실만한 곳은 뜰 앞에 오동나무가 있고, 뒤에 몇그루 푸른 대가 서있는 초옥이 좋다. 물소린 고요한데, 마당의 죽상(竹床)에는 달빛 아래 하얀 연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풍로가 보인다. 그런 심야의 오두막에서 세속의 욕심 벗어난 벗과 마시는 차가 격조 높다. 찻물은 바위 밑에서 솟아난 것으로, 음과 양이 야반에 맺혀서 이루어진 천지의 정즙(精汁)이니, 사이다 콜라 같은 탄산음료나, 커피전문점에서 내놓는 카푸치노, 아메리카나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술은 주로 문인이 마신다. 이태백과 두보가 마신 술은 사천성 패주(牌酒)인데, 이백은 한 말 술 마시면 삼 백 편의 시를 읊었고, 두보는 관복 저당 잡히고 도처에 외상 술값 많던 애주가다. 소동파는 두강주(杜康酒)를 즐겼고, 백거이는 항주 배꽃이 필 때 익는 이화춘(梨花春)을 즐겼다. 백거이는 북창삼우(北窓三友)라 해서 술과 시와 거문고를 꼽았는데, 거문고 뜯다가 술 마시고, 술 마시다 시를 읊었다. 무측천이 즐긴 술은 죽엽청주(竹葉靑酒)고, 건륭황제가 그 술 마시려고 일부러 강남에 7 일 머물렀다는 술은 양하대곡(洋河大曲)이다. 왕희지가 곡수연(曲水宴) 할 때 마신 술은 붉은 빛 소흥주(紹興酒)다

 도연명이 현령 지낸 평택에 도령주(陶令酒) 있고, 조조의 고향 박주에 그가 헌제(獻帝)에게 올린 구온춘주(醞春酒) 있다. 공자님 고향 곡부(曲阜) 손님 접대용으로 만든 공부가주(孔府家酒) 있다. 

  요컨대 술(酒)은 조물주가 만들어 낸 영약(靈藥)이다. 사람의 기상을 청아 웅혼하게 하여 학이 창공을 나르는 것처럼 만들고 시취가 무르익도록 만든다. 그래서 지기를 만나면 천 잔도 모자라고, 말이 통하지않는 사람과는 반마디 말도 많다'(酒逢知己千杯少. 話不投機半句多)'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잔을 앞에 놓고, 마치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품행 방정한 사람인 것처럼 외면 하거나, 알코홀이 독이라도 되는 양 입술에 조심조심 홀짝거리는 사람에게 술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 행위를 자랑인양 착각하는 벗이 옆에 오면 당연히 멀리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담배연기는 철학자에게 예지를 일으키고, 종교인에게 명상을 야기하고, 학자에게 고서를 읽게 하는 기체이다. 유거(幽居)하는 선비가 심야의 달이 중천에 뜬 창가에 앉았을 때, 홀로 등하(燈下)에서 명상에 잠겼을 때, 미풍이 불어오는 뜰에서 장미 향기가 진하게 불어올 때, 나비가 그 위를 아름답게 춤출 때, 우수수 낙엽 지는 산사에서 은은한 풍경소리 들을 때, 친하던 친구의 돌연한 부음을 들었을 때, 우리는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 마음 속을 모락모락 채울 연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건강만 따지고 정신적 혜택 모르는 벗에게 담배가 무슨 소용이랴. 그걸 건네고 라이터 불 켜주는 다정한 우정의 교류는 일찌감치 단념하는게 옳다.

 

 그래 나는 세가지 마시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