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진주 팔경(晉州 八景)/ 남강문학 7호(2016년)

김현거사 2016. 4. 15. 09:11

       진주 팔경(晉州 八景)

 

 일찌기 소주(蘇州)에서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杭)이란 말을 들은 적 있다. 하늘에 천당이 있고, 땅에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이다. 소주는 곳곳에 운하가 그물처럼 연결되어있고, 태호(太湖)라는 호수가 있고, 쌀과 차, 비단, 물고기가 풍부해서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리는 곳이다. 거기다가 그곳 문필가 위치우위(余秋雨)란 사람이 '물은 너무나 맑고, 복사꽃은 너무나 아름다우며, 먹거리는 너무나 달고, 여인은 너무나 곱다' 고 표현해놓는 바람에 더욱 그럴싸하게 보였다.

 그래 나는 진주 역시 누가 그런 표현을 해줄 사람이 없을까 기다려 보았다. 진주도 남강물은 너무나 맑고, 복숭아꽃은 너무나 아름다우며, 먹거리는 너무나 달고, 여인은 너무나 곱고, 진양호란 큰 호수 있고, 최상급 비단 생산하고, 쌀과 과일, 채소와 물고기 풍부하여, 그야말로 ‘어미지향’(魚米之鄕)이기 때문이다.

  그 뒤 항주에 가서, 서호(西湖) 10경(景)을 자랑하는걸 또 본 적 있다. 무슨 이야긴가 했더니, 백낙천이 만든 물 위에 걸친 아취형 돌다리에 눈 쌓인 모습이 아름답고, 둘째 호수 안에 외로히 떠있는 고산(孤山)의 누대에 뜬 가을 달이 곱고, 세째 연꽃 활짝 피는 5월 술집 뜨락에서 피어난 술 향내가 정원의 연꽃 향기와 함께 바람에 떠다니는 분위기가 기막히고. 네째 소동파가 만든 여섯 개의 아름다운 다리 아래로 물안개 피는 봄날 새벽에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진 가운데 하얀 북숭아 꽃잎이 살짝 물 위에 뜨있는 경치. 다섯째 추석날 배를 띄우고 달과 인공섬인 소영주(小瀛洲) 석등에 켜진 불이 셋으로 보이는 모습. 여섯째 서호 남쪽 호반의 정원에 모란꽃이 활짝 피고, 화려한 색을 뽑내는 비단잉어 노니는 모습. 일곱째 남녂 골짜기에 운무가 끼어 마치 구름에 봉우리가 꽃혀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 여덟째 석양의 남병산(南幷山) 정자사(淨慈寺)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 아홉째 우뚝 솟은 영봉산(靈峰山) 뇌봉탑(雷峰塔) 너머로 지는 노을. 열번째 물 오른 버들잎이 봄바람에 살랑일 때 듣는 꾀꼬리 울음소리가 그리 곱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보니, 내고향 진주도 항주와 다름없다. 촉석루 맞은 편 넓은 백사장과 대숲에 눈 쌓인 모습 청아하기 그지없고, 둘째 진양호에 뜨있는 섬에 비치는 가을 달 한없이 곱고, 셋째 그 근처 술집 뜨락의 꽃 향기와 술 향기가 바람에 떠다니는 분위기 기막히고, 넷째 물안개 가득한 봄날 새벽에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복숭아 꽃잎이 살짝 물 위에 뜨있는 경치, 다섯째 추석날 배 띄우고 구경하는 촉석루와 의암의 달빛, 여섯째 신안동 들마을에 모란꽃이 활짝 피고, 수박냄새 풍기는 은어가 헤엄치며 올라와 남강에서 민첩하게 노니는 모습, 일곱째 망진산 절벽에 운무가 끼어 마치 구름에 봉우리가 꽃혀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 여덟째 석양이면 호국사(護國寺)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 아홉째 뒤벼리 절벽 너머에 뜨있는 보름달, 열번째 물 오른 버들잎이 바람에 살랑일 때 천수교에서 듣는 꾀꼬리 울음소리가 그리 곱다. 

 이쯤 되니 소주 항주 두 곳의 장점을 합한 곳이 진주이고, 진주야말로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진주(下有晉州) 이다.

  그런데 중국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란 그림을 보았더니, 또 진주 비슷하다.

 원래 그 그림은 동정호(洞庭湖)와 그 남쪽 두 개 물줄기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그린 여덟 폭 산수화인데, 북송(北宋) 때 이성(李成)에 의해 처음으로 그려진 이래 하도 유명해서, 고려에서도 명종이 문신들에게 소상팔경을 글로 짓게 하고, 이광필(李光弼)로 하여금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후 이인로(李仁老), 이규보(李奎報), 이제현(李齊賢) 같은 문인들이 소상팔경을 시로 남겼고, 조선시대는 안견(安堅)을 비롯하여 이징(李澄), 김명국(金明國),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 최북(崔北), 김득신(金得臣), 이재관(李在寬)이 작품을 남겼다.

 그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첫번째가 소상야우(瀟湘夜雨)인데, 이는 동정호(洞庭湖)와 그 남쪽 두 개 물줄기 소수(瀟水)와 상수(湘水)의 밤에 비 뿌리는 풍경을 말한다. 그런데 진주는 지리산에서 흘러온 덕천강과 경호강 두 강이 합수하는 진양호(晉陽湖)가 있고, 소수(瀟水)와 상강(湘水)의 밤에 뿌리는 비가 있듯이, 덕천강 경호강 밤에 뿌리는 비가 있다. 동정추월(洞庭秋月)이란 것은 동정호에 뜬 가을 달을 말함인데, 넓은 진양호엔들 가을 달이 없겠는가. 원포귀범(遠浦歸帆)이란 멀리서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를 말하는데, 진양호 섬과 섬 사이엔들 멀리서 돌아오는 낚싯배 없겠는가. 평사낙안(平沙落雁)이란 말도 그렇다. 백사장이야말로 남강의 명물 아니던가. 가을철 남강 백사장에 떼 지어 내리는 것 모두 기러기다. 연사만종(烟寺晩鐘)은 안개 덮힌 절간에서 울려퍼지는 늦은 종소릴 말하지만, 진주는 해만 지면 의곡사 호국사 종소리가 쌍으로 나란히 시내에 울려퍼진다. 어촌석조(漁村夕照)는 어촌의 저녁 노을을 말하는데, 한번 진주 선학산(仙鶴山) 밑 뒤벼리로 가보시라. 거기서 석양의 조각배에 한가한 어옹이 낚시하는 신선같은 모습을 항시 볼 수 있다. 강천모설(江天暮雪)이란 것은 저녁 강에 내리는 눈을 말하는데, 밤에 흰눈 내리면 진주 남강 십리 대숲은 천하 제일 산수화가 된다.

 소상(瀟湘) 악양루 있고, 진주에 촉석루 있고,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고 그쪽엔 자랑하는 반죽 담뱃대가 있다면, 진주는 반죽, 왕죽. 오죽 모두 잘 자라는 곳이고 죽제품 천국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다. 최근에 진주에 이상한 일이 하나 생겼다. 교포 사업가 김두용 선생이 일본서 '소상팔경도' 8폭 병풍을 구해서 진주로 보내온 것이다. 이를 문화재청은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시키고 보물 제1864호로 지정했다. 아마 두 곳이 하도 닮아서, 이 소상팔경도를 진주로 보내야겠다는 것이 상천의 심오한 뜻이었던 모양이다. 하늘의 뜻이 그렇다면야... 누군가 그 뜻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진주에서 그런 묵흔(墨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외람됨을 무릅쓰고, 말석의 이 사람이 한번 진주 팔경(晉州 八景)을 읊어보았다.

 

 진주 팔경(晉州 八景)

 

矗石明月 촉석루에 비치는 밝은 달빛

義巖聞鐘 의암에서 듣는 종소리 

遠浦歸帆 진양호에 돌아오는 고기잡이 배

新安牧笛 신안동 들판 목동의 피리소리 

飛鳳春霧 비봉산 봄날 새벽 안개

望晉夏雲 망진산 절벽 여름 구름

南江竹林 남강의 십리 푸른 죽림

仙鶴釣魚 선학산 밑 뒤벼리에서 고기잡는 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