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에 소개한 동양고전 50

아제아제 바라아제/ 현장스님의 <반야심경>

김현거사 2015. 8. 7. 08:15

 

 아제아제바라아제/ 현장(玄裝)스님의 반야심경(般若心經)

 

 불교도가 아니라도 색즉시공(色不異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반야심경 구절은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거리의 시주승 독경, 혹은 초상집 독경, 또는 산사 예불에서 하는 스님 염불 90프로가 이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은 총 270자로 된 짧은 경문이다. 1300년 전 현장삼장(玄裝三藏) 스님이 천축에서 불경을 가져와 서안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에 봉안하고, 처음 한문으로 번역했다.

 애초에 인도에서 처음 경이 설해진 시기에 관한 것은 이설이 많다. 

 첫번째는 부처님이 35세 되던 해 성도한 뒤에 21일간『화엄경』을 설한 때 한 것이라는 설, 그 다음 12년간 「아함부경」을 설한 때, 그 다음 8년간 방등부경」을 설한 때, 21년간은 「반야부 경전」을 설한 때, 최후의 8년간「법화 열반경」을 설한 열반시(涅槃時)에 설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짧은 270자로 이뤄진 이 반야심경은 지구상에서 가장 빈틈없고 완전무결한 논리 체계를 가진 사상이다. 서양철학의 큰 숙제인 유물사상과 유심사상을 합일하여 각(覺)의 세계로 귀납시켜, 지금은 서양에서 오히려 깊이 연구하고 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摩訶)는 크다, 많다, 초월하다는 뜻이고, 반야(般若)는 프라즈냐(prajna)의 음사어로 지혜의 뜻이며, 바라밀다(波羅蜜多)는 파라미타(parammita)의 음사어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심(心)은 흐리다야(hrdaya)의 음사어로 심장이라는 뜻이며, 경(經)은 수트라(sutra) 즉 성전이라는 의미이므로, 심경(心經)은 핵심되는 부처님 말씀이란 뜻이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부처님의 화신불인 관자재보살(관음보살)이  반야바라밀다(深般若波羅密多)의 사상을 깊이 수행할 때, 오온(五蘊 )이 모두 공(空)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고액(苦厄)과 고통을 넘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오온이란, 유형의 현상계와 물질을 총칭하는 색(色), 감각작용을 뜻하는 수(受), 지각(知覺)을 뜻하는 상(想), 행위를 뜻하는 행(行), 식별을 뜻하는 식(識), 다섯가지를 말한다.

그러면 공(空)은 무엇이냐? 공은 우리 언어로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유(有)의 반대인 무(無)도 아니고, 실제 존재하는 실체에 반대되는 가공의 허상도 아니다. 불확실한 우리 오관(五官)에 포착되는 그런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떠난 실상이다. 프라톤의 '이데아' 비슷한 것이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불(舍利 佛)이여, 깨닫고 보면, 물질 현상계인 색은 실상인 공과 다르지 않고, 반대로 실상인 공은 현상계인 색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니라.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에 새겨진 감각작용, 지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 같은 수상행식(受想行識)이 곧 여래(如來)의 마음에 새겨진 공(空)이요, 여래의 공(空)이 곧 깨닫지 못한 이의 색(色)과 같으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불이여, 이 우주(十方世界)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존재와 현상과 법칙이 원래는 헛된 상이니, 이 모든 현상계는 관세음보살의 차원에서는,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죽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감소하여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부증불감(不增不減)이란 대목을 주목하자. 사물의 본질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질량불변의 법칙과 같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은 선, 악, 미, 추 가치판단의 상대적 허무함을 말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생사를 상대적 개념으로 해석하지 않고, 동일 개념으로 보고 있다. 

 이 맥락에서 서산대사의 시을 읽어보자. 생자일편부운기(生者 一片浮雲起), 사자일편부운멸(死者 一片浮雲 滅). 즉 태어남은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조각 뜬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다.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러므로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떠난 실상의 세계인 공(空)에서는, 우리의 불확실한 오관에 포착되어오는 물질계의 모든 것은 없는 것이다. 육진(六塵)이라 불리는 눈, 코, 귀, 혀, 몸, 의지 같은 감각 기능도 원래는 없고, 이 감각 기능을 통해서 들어오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같은 육식(六識)도 원래 없다. 한마디로 우리의 불확실한 안계(眼界)나 의식계를 통해서 인식된 것은 다 오류요, 원래 없다는 것이다.

 

*참고; 신실재론(新實在論)

 여기서 칸트의 인식론(認識論)과 버트란드 러셀의 신실재론(新實在論)을 참고하자.

 이 세상에는 여러 대상들이 있는데 이러한 대상의 실존,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에게 지각되는 바대로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를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적 실재론(natural realism)'이라고도 불려지는 이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은 인식의 감각적 단계를 인식과정 전체와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객관적 실재가 지각을 통해 완전히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소박한 실재론은 시간적, 공간적 규정과 감각적 성질까지도 객관적 사물의 구성요소로 본다. 그런 태도는 지각의 대상이 그 지각을 갖는 그 어떤 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재함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거론되는 '실재론'은, 좀 더 정교한 이론적으로서, 이를 과학적 반성에 의해 도출되었다고 하여 '반성적 실재론'이라고도 한다.

 '과학적 실재론'은 상식적인 지각의 세계가 곧 실재의 세계라 보는 '소박한 실재론'의 견해를 비판한다. 실재와 지각이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색은 시각(視覺)에 나타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고 에테르(ether)의 진동으로 비롯된 것이며, 소리 역시 색과 마찬가지로 주관적 감각에 불과하다. 맛이나 냄새도 객관적으로 우리의 밖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박한 실재론은 비록 상식에는 부합되지만, 과학을 통해 볼 때 많은 수정이 불가피함을 지적하고 있다. 과학적 실재론은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과 상이한 에테르나 양자 등과 같은 것들이 실재한다. 이것들이 우리의 감각을 어떤 형태로든 자극하여 지각내용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공의 세계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는 고로....

대승불교는 무명의 정의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다. 하나는 일체법이 공(空)한 줄 모르고, 둘째는 마음의 본성이 불성(佛性)이며 진여(眞如)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대승의 중심사상이 공과 불성이므로, 무명의 문제도 공과 불성에 두고 설명을 한다. 공을 체달하지 못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라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특징은 무명을 실체로 보지 않고 도리어 이를 불성과 진여의 한 작용으로 본다는데 있다. 대승불교는 중생들에게 무명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 무명은 본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부처님 마음과 똑같은 광명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연기설에 대해서도 무명으로 시작하는 연기설이 아닌 부처의 마음이라 할 수 있는 진여연기설을 따른다. 무명은 본래 진실하고 청정하고 밝고 변하지 않는 진여와 불성의 성질을 띠고 있으므로, 십이연기 또한 진여와 불성의 작용이라고 설한다.

 마치 물이 오염되어 흐리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지만 물의 본래 성질은 맑고 고요한 것처럼(水不離波, 波不離水), 중생의 마음이 무명에 물들어 갖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해도, 그 실상은 맑고 고요해서 부처의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

 12단계 인연연기(因緣緣起)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命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를 말하는데, 이 모든 현상이 없으므로, 죽고 사는 현상을 생각하는 그 마음도 없다는 것이다.

 

無苦集滅道  

 

 사람은 태어나므로서 늙고 근심하고 병들고 슬퍼하고 죽게 되는데, 공의 세계에서는, 태어남으로 해서 생기는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없다. 

사성제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도제(道諦)로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고제(苦諦)>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4고(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 네 가지로 8고(苦)라 한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요, 싫은 사람 만나고 함께 산다는 것이 고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거나 사별하는 것이 고요, 구하는데 얻지못하는 것이 고요, 오온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를 개괄한 오온(五蘊)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집착 그것이 고라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dukkha)이라는 고성제이다.

<집제(集諦)>는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쉬운 무명(無明)과 갈애(渴愛)를 고의 원인으로 본다. 혹은 고통의 원인인 탐욕(貪)·분노(瞋)·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괴로움에는 원인(samudaya)이 있다는 것으로, 즐거움을 탐하고 추구하는 갈애, 살아남으려고 하는 갈애가 바로 그 원인이라고 하는 것이 집성제이다.

<멸제(滅諦)>는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말한다. 번뇌를 일으키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을 얻는다고 말한다. 괴로움은 완전히 멸할 수 있으며 괴로움을 없앤 상태가 해탈이라고 본다.

<도제(道諦)>는  이상향 열반에 도달하는 수행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수행법이다.

 

*참고; 절에 가서 사성제 설법만 듣고 그 부분만 진리라고 오해하는 보살들이 많다. 반야심경의 이 사성제도 없다는 이 無苦集滅道 라는 큰 뜻을 몰라 그런 것이다.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일체개공(一切皆空),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니, 안다고 생각하는 지혜도 없으며, 버리고 얻는다는 범부(凡夫)의  취사지심(取捨之心)도 없나니, 그래서 잃고 얻는 것이 없으므로,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

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제법(諸法)을 다 깨친 청정무구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와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잘못된 생각, 잘못된 몽상을 멀리 떠나 마침내 구경의 열반에 들었으며,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전생, 현생, 내생의 모든 부처님도 오온이 다 공하다는 도리, 즉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의 반야지(般若智,완전한 깨달음)를 얻었느니라.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이러므로, 이 반야바라밀다경은, 뜻이나 말로 전달할 수 없는 큰 신비한 주문(呪文, 眞言,陀羅尼)이며, 우주를 밝힐 큰 밝은 주문이며, 이보다 더 뛰어난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이와 견줄 수 있는 동격의 진언을 생각할 수 없는 최상의 주문이며, 

*참고; 불교의 주문은 부적과 주문으로 액을 때우는 속된 사술(詐術)과 다르다. 불교의 심오한 주문을 그런데 쓰는 것은, 마치 무식한 목수가 금도끼로 장작을 패는 것과 같다.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능히 일체의 고액을 소멸시키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시며 즉석에서 가로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菩提(깨달음이여) 娑婆訶(영원하여라) 라고 하셨다.

* 마지막 '아제아제 바라아제....' 부분은 범어(梵語)의 비밀신주(秘密神呪)  원음을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